[버틀러 발제] 젠더 트러블 :: 역자 해제, 저자 서문 등 (0412)
삼월
/ 201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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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퀴어이론은 섹슈얼리티의 영역을 넘어선 정치적 급진성의 문제였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급진성 혹은 ‘성소수자의 인권’ 너머에 있는 ‘퀴어’의 실체를 잘 알지 못했다는 데 있다. 2002년 하리수가 화장품 광고에 등장했을 때, 광고의 카피는 ‘여자보다 예쁜 여자’였다. 미지의 존재였던 성소수자와의 대면은 정치적 급진성을 능가하는 상업마케팅을 통해 가능해졌다. 하리수를 소개한 광고카피에는 ‘여자’라는 단어가 두 번 들어간다. 앞의 여자는 누구이고, 뒤의 여자는 또 누구인가. 그 여자들을 묶어서 같은 여자로 볼 수 있는가. 1990년에 쓴 이 책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페미니즘이 정치적 주체로 가정해온 ‘범주’로서의 여성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과연 그런 범주로서의 여성 집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공교롭게도 이 질문은 최근 한국 땅에서 현실화되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누군가가 트랜스 여성은 페미니즘의 주체인 여성이 아니라고 발언했고, 하리수는 이 발언에 분노하며 논쟁했다.
버틀러는 젠더가 일관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젠더는 인종, 계급, 지역의 문제와 교차되거나 경합하며, 그때그때 우연적으로 구성된다. 이런 구성을 무시하고 ‘범주’로서 여성을 통일하고 보편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버틀러는 정체성에 근거하지 않은 페미니즘을 위해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허물고, 모든 권력의 기저에 있는 가부장적 이성애주의를 밝히고자 한다. 섹스와 젠더는 다른 것이 아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보부아르의 주장을 ‘문화적 의미로 해석되는 몸’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타고난 몸(섹스)이라고 불렀던 것 역시 젠더라고 보아야 한다. ‘여성’이라는 젠더는 명사가 아니며, 수행성을 특징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동사이다. ‘범주’로서의 여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 자체가 재의미화와 재각인화의 장소라고 볼 때 그 장소는 정치적 급진성의 장이다. 여성은 그 장의 우연적 토대 위에서 정치적 사안마다 일시적으로 소환되고 흩어질 수 있다.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21쪽)
그렇다면 버틀러가 말하는, 우연적 토대 위에서 일시적으로 소환되거나 흩어질 수 있는 여성은 누구인가. 버틀러는 젠더, 권력, 몸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언어로 구성된 자아라는 측면에서 여성 주체를 연구한다.(22쪽) 역자는 해제에서 버틀러의 젠더 논의를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하여 설명한다. 모든 정체성은 허구적으로 구성되며, 내재화한 사회 규범에 따라 반복 수행되어 몸에 (재)각인되는 행위에 불과하다. 네 가지 논의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패러디적 정체성 - 원본은 모방본보다 우월하지 않다
2. 수행적 정체성 - 행위 뒤에 행위자는 없다
3. 법 앞에 반복 복종하는 정체성 - ‘법의 무의식’ 때문에 저항은 내부로부터 가능하다
4. 우울증적 정체성 - 내 안의 그대, 그대 안의 나
젠더는 원본 없는 패러디이다. 하리수의 예쁨이 ‘여성’에 대한 과장된 패러디라면, 거기에 원본은 없다. 광고카피 안에서 하리수의 예쁨과 비교대상이 되는 여자들이 여성을 모방하는 하리수에게 우월감을 느끼거나, 하리수보다 (‘예쁨’으로 대표되는) 젠더 수행을 잘 하지 못했다고 자괴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 하리수와 여자들은 모두 ‘여성’이라는 젠더를 수행하고 있다. 버틀러에 의하면, 타고난 젠더 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완전히 복종할 수 없다. 주체는 이데올로기가 호명하는 이름이 지칭하는 정체성을 완전하게 달성(수행)하지 못한다. 이처럼 호명된 정체성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전복을 가능하게 한다.
버틀러의 네 가지 정체성 논의를 가면에 비유할 수 있다. 가면은 어떤 배역의 본질이 아닌 이상적 자질에 불과하므로, 원본이 복사본에 비해 더 권위를 갖지 않는다. 가면을 쓴 배우는 행위자가 아닌, 배역의 수행자일 뿐이다. 복종을 강요하는 규범공간은 무대를 구성하지만, 배우는 늘 같은 연기를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배우는 배역을 구현하지만, 반복 속에서 배역을 재탄생시킨다. 배우에게 배역은 사랑의 대상이지만, 상실한 후에도 애도를 마치지 못해 자신의 에고로 합쳐진 대상이다. 사랑의 대상과 자아의 젠더 정체성은 모호해진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이성애와 남성성의 문제는 더욱 모호해진다. 모든 젠더 주체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젠더는 원본과 모방본의 경계를 허무는 무대 위의 공연이고, 법에 반복 복종하면서 타자를 안고 있는 가변적 주체이다.(38쪽)
퀴어이론가로서 주디스 버틀러의 연구는 젠더 이분법을 허무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버틀러의 논의가 동성애를 정치적 실천 혹은 신념과 연결시키고 있지는 않다. 버틀러의 관심은 비규범적 성의 실천들이 젠더의 안정성에 제기하는 의문에 있다. 아무리 이성애 중심의 규범으로 젠더를 강력하게 통제하려고 해도, 비규범적 성의 실천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버틀러는 이 통제가 이성애를 안정되게 만드는 방법으로 활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젠더의 모호성은 비규범적 성적 실행을 포함하거나 왜곡할 수 있고, 이에 따라 규범적 섹슈얼리티를 유지하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54쪽) 버틀러는 사람들이 젠더에 대해 거는 기대를 설명하기 위해 카프카의 짧은 글 <법 앞에서>를 예로 든다. 법의 문 앞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 있다. 법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의 기대이고, 권위가 부여되고 설정되는 수단 역시 마찬가지다. 버틀러가 보는 젠더의 수행성도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젠더화된 본질에 대한 기대가 자신을 외부에 가져다놓고, 수행을 의례적으로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버틀러가 젠더규범의 폭력성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자신의 생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해부학적으로 젠더를 규정할 수 없는 몸을 가지고 태어난 친척의 고통스러운 삶, 집을 떠나야 했던 게이 사촌들, 십대에 겪은 자신의 격렬한 커밍아웃. 그럼에도 버틀러는 성생활에서 추구하는 기쁨과 합법적 인정에 대한 고집을 꺾지 못했다. 젠더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동시에 폭력적으로 단속받는다. 버틀러는 이 책에서 규범의 폭력에 저항하려는 욕망과 함께,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이성애 가정을 근절하려는 욕망으로 젠더를 ‘탈자연화’하려 한다.(63쪽) 그것은 버틀러에게 생존의 문제였으며, 전복과 비전복의 구분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전복은 반복을 통해 생산될 수 있고, 전복이 반복되면 언제든 죽은 상투어가 될 수 있다. 당연한 줄 알았던 젠더 지식이 변화·수정될 수 있는 실제임을 이해한다면, 정치적 혁명은 그 가능한 것과 실재하는 것의 변화를 통해 가능해진다. 당연시되는 젠더 지식은 실제에 대한 폭력적 경계선으로 작동한다. 버틀러는 규제적 몸의 규범이 부과한 폭력에 대항할 성적 소수자들의 연대를 희망한다. 성급하게 권력을 위계로 환원하거나, 정치 차원의 논의를 거부하지 않기도 바란다.
쟁점 1. 페미니즘의 주체는 누구인가
쟁점 2. 이성애 여성/남성을 기본으로 설정하는 젠더규범과 비규범적 성의 실천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