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 0412 후기_고양이 요람 Part II +3
희음
/ 2018-04-16
/ 조회 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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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세미나 시간에 소설의 전체적인 틀이나 알레고리적 요소에 대해 워낙 많은 이야기들이 오간 터라, 이번 세미나에서는 부분적인 대목의 내용 형식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미시적인 논의가 많았습니다. 벌써 그 기억이 ‘옛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처럼 흐려지긴 했지만 수묵화스러운 후기도 나름 의미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밀고 나가봅니다.^^
우선 산로렌조라는 섬이 무엇에 대한 비유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치열하게 오갔습니다. 보코논교를 숭배하는 자에게는 갈고리형에 처해진다는 무시무시한 규제법이 작동하고 있으며, 종교를 금하고 과학을 절대 신으로 숭앙하는 파파 몬자노가 우두머리로 있는 산로렌조. 누구든, 어떤 세력이든 마음만 먹으면 그 섬의 주인이 되곤 했던, 개들은 짓지 않고 아이들은 울지 않으며 좀비 같은 눈빛과 몸체를 가진 이들이 섬의 국민이라는 껍데기를 걸치고 떠다니는 곳. 그곳에서는 누구도 저항하지 않으며,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이가 없는 듯합니다. 그곳은 마치 하나의 큰 감옥 같기도 하고 강대국들에게 무수히 지배받은 식민지 같기도 했습니다. 혹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뿌리내린, 자본주의라는 공리계가 자신의 질서대로 장을 주무르는, 다름 아닌 '지금-여기'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습니다. 거은 님이 지적해 주신 대로 이런 진술이 도드라져 보였으니까요.
“캐슬 설탕이 산로렌조에서 운영하는 사업들은 전혀 이윤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노동에 대한 대가를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회사는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겨우 봉급을 줄 만한 돈을 벌면서 매년 그럭저럭 수지를 맞춰나갔다. (···) 귀족계급은 캐슬 설탕 회사 플랜테이션의 감독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외부에서 온 중무장 백인들이었다. 기사계급은 조그마한 선물과 그럴싸한 특권만 주면 명령 한 마디에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 입히거나 고문할 덩치 큰 원주민들이었다.”
귀족계급인 백인들은 자본가처럼, 기사계급인 원주민들은 중간관리자처럼 보이지 않나요. 좀비 같은 국민들은 상처 입고 채찍질 당하면서도 섬을 벗어날 수 없는 노동자들인 거고요. 섬을 벗어날 수 없으며, 벗어나지도 않으려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초과 노동으로 피폐해진 노동자들이 다음 날이면 자발적으로 공장의 검은 팻말 앞에 줄 서는 광경을 떠올리게도 됩니다.
귀족계급 혹은 손쉽게 섬을 점령한 자들에게서 미국의 모습을 본다는 모로 님과 토라진 님의 의견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작가인 보니것은 이 작품에 대해,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에 기대어 식민주의적 자본화를 현실화해 나갔던 자국, 즉 미국에 대한 비판을 의도했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죠. 작품 안에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나오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곳에서 미움을 받게 되어 있지요. 클레어는 편지에서 미국인들이 미움을 받는 것은 사람 된 죄로 정상적인 벌을 치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 자기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벌을 면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지적했던 겁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인간 보편에 대한 ‘미움’ 또한 강조되고 있다고 보았는데요, ‘사람 된 죄로 정상적인 벌을 치르고 있을 뿐’이라는 언급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이라면,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혹은 신에 의해 내던져졌다고 해도 다시금 구원의 밧줄을 내리는 것은 그렇게 내던져진 각자의 몫이라는 뜻으로 이 대목이 읽히더군요. 또 그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던져짐에 대한 울분은 ‘고양이 요람’이라는 상징에 의해서도 소설 안에서 지속적으로 발화되고 있다고 보였어요.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도.
“아이들이 자라서 미치더라도 놀라운 일은 아니죠. 고양이 요람이라는 게 두 손 사이의 X자들에 불과한데도 어린애들은 그런 X자들을 보고 보고 또 보고 하는데···.”
“하는데?”
“빌어먹을 고양이도 없고, 빌어먹을 요람도 없으니까요.”
고양이의 없음과 요람의 없음, 즉 구원의 없음이, 위의‘미움’이라는 한 단어에 응축되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더랬어요. ‘고양이 요람’과 닮아 있는 이 세계에 대한 비유로 사용된 듯했던 뉴트의 그림 묘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뉴트의 그림은 작고 시커멓고 사마귀들이 할퀴어 놓은 것 같았다. (···) 그 자국들은 거미그물 같은 모습을 만들었는데, 나는 그것이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말리려고 걸어놓은, 인간의 부질없음으로 짠 끈끈한 그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세계의 비밀을 알아버린 자의 한숨 같은 그림이었습니다. 토라진 님은 캐슬이 폭포 쪽으로 던져 버린 그 그림이 계곡이 끝나는 어디쯤에 걸려, 아랫마을의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었을 거라는 작가의 상상력에 두 번 놀랐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곳은 가난한 나라요. 알아챘는지 모르겠지만. 그물에는 어떤 것도 그리 오래 걸려 있지 않아요. 모르긴 해도 뉴트의 그림은 지금쯤은 아마 내 꽁초와 함께 햇볕에 마르고 있을 거요. (···) 어떤 째지게 가난한 사람에게는 수월찮은 소득이지.”
정말이지, 이런 작은 풍경 하나로도 이 섬나라, 산로렌조의 수직적 계급구조를 알아보게 하는 작가의 서사 배치 감각이 탁월하게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댓글목록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후기를 보니 새록새록 그 날의 이야기들이 떠오릅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쟁점이 되었던 부분들을 잘 정리해 주셨네요. 고맙습니다.
희음님이 언급해주신 것처럼 지난 번에 읽은 분량에서는 본격적으로 샌로렌조의 국가 구성원리와 종교와의 관계들이 본격적으로 펼쳐졌습니다. '샐로렌조'를 통해 우리는 푸코와 니체를, 그리고 자본주의를 다시금 되짚어보기도 했지요.
이 소설은 분명한 주제와 통렬한 풍자와 해학이 있지만,
어쩐지 이야기는 기괴하고 서사는 모호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전개 속에서도
작가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문체와 구조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은 물론이구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소설의 의미와 특이성들을 파악해나가는 것이 넘 흥미롭고 즐겁네요.~~
이번 주에도 기대기대......하고 있습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세미나 시간에도 보니것의 이야기 구성 방식의 특이성을 토라진 님이 언급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해당 소설은 미국 혹은 우리가 사는 바로 지금의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한다는 걸 분명히 알게 하면서도, 그 구체적 서사는 비현실적이다 못해 황당무계하고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쓰여져 있어, 그 뒷 이야기에 대한 예측으로부터 독자들을 따돌리고 무력화하는 측면이 도드라지는 것 같아요.
그건 어쩌면 보니것 특유의 작가적 자존심에서 연유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또한 들더군요. 예술이 현실을 설명하거나 현실에 대한 자각이나 계몽을 위한 도구로 쓰이지는 않으면서도 현실을 풍부하게 품어내는 방식이 어떤 식으로 작품 안에 구현될 수 있을지에 대한, 보니것 나름의 대답 같다는 생각.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의 소설 쓰기는 예술이란,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지난한 과정에 다름아니라는 생각도 드네요. <문학의 고고학>에서 푸코가 말한 바대로요.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결국 문학은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기 보다는 삶의 실존과 세계의 사건을 웅숭깊게 응시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유머에 깃든 비애와 스타일리시한 전개는 아마도 이런 과정을 거쳐나온 결과일테구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예술에서 중요한 점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니것은 독보적인 특이성을 획득한 탁월한 예술가이지 않을까요?
제 댓글에 깊이를 만들어주고 더욱 분명한 의미를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희음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