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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발제] 아침꽃 저녁에 줍다 - 마지막 :: 0418(수)
토라진 / 2018-04-17 / 조회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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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기록 


 어릴 적 기억 속의 연부인은 무던히도 너그러웠고 누가 일을 저질러도 결코 그 애 부모들에게 일러바치는 일이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으며 아이들이 다칠 때는 보살펴 주기도 했다. 어느 때는 야한 도색 그림을 보여주며 놀려대기도 했기만 말이다. 어느 날 그녀는 돈이 궁해진 그에게 어머니 돈이 네 돈이니 어머니 돈을 훔치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그녀 집으로의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이후 루쉰이 집안 물건을 훔쳐 팔아먹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실과 다른 소문이었지만 남들의 시선과 어머니가 측은해하실 것이 두려워 루쉰은 집을 떠나 난징의 학교로 갔다.
 그곳에는 높은 장대가 솟아 있었으며 두 명의 학생이 물에 빠져 죽게 되자 메워버린 수영장 용도의 연못이 있었다. 해마다 칠월 보름이면 학교 운영자가 종교 행사를 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뒤죽박죽’인 학교였다. 그러니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루쉰은 이후 광로학당에 시험에 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지학(지질학), 금석학(광물학) 등을 배웠다. 헉슬리의 [천연론]과 같은 새로운 책들을 접하게 되었고 서양 철학자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졸업을 했지만 막연했다. ‘훌륭한 제품을 만들려면 사전에 연장을 잘 벼려야 한다.’는 말처럼 연장을 벼리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 높은 장대를 몇 번 오르내린 것으로 해군병사가 될 수 없음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몇 해 동안 강의를 듣고 굴 안을 몇 번 드나들었다고 해서 금, 은, 동, 철, 주석을 캐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일본에 가기 전 일본 여행을 다녀온 선배의 충고대로 중국 양말을 많이 가져갔으며 돈은 일본 은화로 바꾸어갔다. 하지만 막상 일본에 가 보니, 양말도 은화도 모두 소용없게 되었다.
 
후지노 선생


 도쿄도 그저 그런 곳이었다. 루쉰은 센다이로 가서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골학을 강의하는 후지노 선생을 만났다. 그는 루쉰을 불러 노트 필기가 수월한지 묻고는 필기장에 미처 받아쓰지 못한 내용을 보충해주고 문법적 오류까지 교정해 주곤 했다.
 하지만 루쉰은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 후지노 선생과의 교류는 꾸준히 이어졌다. 선생은 귀신을 존중하는 중국의 미신 때문에 루쉰이 해부를 하지 않으려 할까 염려하기도 했으며 중국 여인의 전족이 발뼈에 어떤 기형을 가져오는지 궁금해 하며 묻기도 했다. 이런 교류들 때문인지 그는 은근한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너는 회개하라!”라는 익명의 편지를 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톨스토이가 러시아와 일본 황제에게 보낸 첫 마디였다. 이 편지에는 후지노 선생이 필기장에다 시험 제목을 표시해주고 그것 때문에 루쉰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후 후지노 선생에게 이를 알리고 무례하게 필기장을 가져갔던 학생회 간사들의 행동을 힐책함은 물론 그 검사 결과를 발표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조치로 소문은 사라졌으며 익명의 편지를 썼던 이들에게 루쉰은 톨스토이식의 그 편지를 도로 돌려주었다. “너는 회개하라!”
 그는 세균학 수업 중에 운명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세균학 수업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중국사람 한 병이 러시아의 정탐 노릇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런데 구경하는 무리들이 모두 중국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교실 안에도 한 사람 있었으니 바로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2학년 말에 그는 생물학을 공부하기 위해 센다이를 떠나기도 결심했다. 떠나기 전, 후지노 선생은 그를 집에 불러 뒷면에 ‘석별’이라고 쓴 사진을 한 장 주었다. 루쉰은 후지노 선생에 대해 그의 스승 중 그를 가장 감격시키고 고무해준 한 사람이라고 진술한다. 그를 떠올리며 루쉰은 용기를 얻고 ‘정인군자들’에게 미움을 사게 될 글을 계속 써내려간다고 적고 있다.  
    

판아이눙


 루쉰은 청말 혁명단체 회원이었던 서백손이 최고 관리를 살해한 사건에 대한 처리 문제를 두고 판아이눙과 갈등하게 되었다. 루쉰은 서백승의 사형 소식을 베이징에 전보를 보내 만청정부를 규탄할 것을 주장했지만 판아이눙이 이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 후로 루쉰은 서백승의 제자였음에도 전보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 판아이눙을 아주 가증스런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중국에 돌아와 있을 때 우연히 판아이눙을 만나게 되었다. 그제야 루쉰은 판아이눙이 자신의 주장을 반대했던 이유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판아이눙 일행이 처음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 루쉰이 마중 나와 그들을 못마땅하게 머리를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루쉰은 그들의 짐 속에 전족을 챙겨온 점이나 차에서 자리를 양보하느라 소란을 피우는 것이 한심해 보여 머리를 흔들었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우창봉기(신해혁명)가 일어나 사오싱이 광복되었던 어느 날, 그들은 함께 거리에 나서게 되었다. 거리에는 흰 깃발이 넘쳐나 마치 해방을 맞이하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지난 날 그대로였다. 왕진파가 돌아와 권력을 다시 쥐었던 것이다.
 이후 루쉰은 사범학교 교장으로, 아이눙은 학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당시 루쉰은 왕진파에 반대하고 신문을 만들고자 하는 청년의 부탁으로 신문 창단자로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그것은 왕진파들에게 보복을 당할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지만 그는 괘념치 않았다.
 그러던 중 왕당파에서 돈 오 백 원을 신문사로 보내는 일이 생겼다. 청년들은 돈을 받고 왕당파에게 욕을 계속하자고 결정했다. 루쉰은 돈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를 했지만 그들은 충고를 무시했다. 이후 루쉰은 교육 운동을 하고 있던 난징교육부를 맡아달라는 지푸의 부탁을 받고 난징으로 갔다. 그 때 신문사 창단자로 이름을 올렸던 더칭 선생이 린치를 당하는 일이 생겼다. 더칭은 자신의 상처 자국을 사진으로 찍어 군정부의 횡포를 폭로했다.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을 무렵 아이눙은 학감 자리에서 쫒겨났다. 아이눙은 가끔 루쉰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얼마 전 그가 물에 익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이눙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던 탓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으며 술만 마셨다는 것이다. “아마 내일은 전보가 올지도 모르지. 펼쳐보면 루쉰이 나를 부르는 걸세.”라고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하면서 말이다.

 

후기  


 루쉰은 자신의 글의 오류를 수정하고 삽화의 그림들을 비교하며 의미들을 정리하고 있다. 앞서 썼던 글에 대한 내용을 보충하고 주석 같기도 하고 정보 메모 같기도 한 글을 이어간다. 
 본인 스스로도 후기를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몇 장의 낡은 그림을 찾아내어 삽화로 삼으려고 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본문을 쓰는 데 일 년이 걸렸으며 이 짤막한 후기도 근 두 달이 걸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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