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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발제] 0419 세미나_젠더트러블 1장 발제
아라차 / 2018-04-17 / 조회 4,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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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버틀러 <젠더트러블> 발제

 

제 1 장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

 

1. 페미니즘 주체로서의 ‘여성들’

페미니즘 주체로서의 ‘여성들’에 대한 의문 제기. 무엇이 여성이라는 범주를 구성하고 또 구성해야 하는가. 푸코는 권력의 사법체계가 주체를 생산해내며 주체는 그 결과로서 재현되는 것이라고 했다. 체제에 의해 규제된 주체들은 그 체제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체제의 필요조건에 따라 형성되고 정의되고 재생산된다. 이 분석이 옳다면 여성을 페미니즘의 ‘주체’로 재현하는 언어와 정치학의 사법적 구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담론적 구성물이자 당면한 재현 정치학의 결과일 것이다. 페미니즘 비평은 페미니즘 주체인 ‘여성들’의 범주가 해방을 추구하는 바로 그 권력체계에 의해 어떻게 생산되고 구속받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성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며, 따라서 그 용어는 완전한 의미가 될 수 없다. ‘젠더’를 정치적, 문화적 접점에서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버틀러는 페미니즘 주체에 전제된 보편성과 통일성이, 주체가 작동되는 담론의 구속력 때문에 상당히 훼손되었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이 안정된 주체로 명확히 정리된 재현 정치학의 요구에 동의하게 되면 그 결과로 나타난, 잘못된 재현에 대한 책임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2. 섹스/젠더/욕망의 강제적 질서

페미니즘 주체에 균열이 시작된 것은 섹스와 젠더의 구분 때문이다. 젠더는 섹스의 인과론적 결과도 아니고 섹스처럼 외형적으로 결정된 것도 아니다. 젠더를 섹스의 다양한 해석 중의 하나로 보는 이러한 구분 때문에 주체의 통일성은 이미 잠재적 논쟁거리가 되었다. 섹스/젠더의 구분은 섹스로 결정된 몸과 문화로 구성된 젠더 간의 극단적 단절을 시사한다. 

젠더를 이미 정해진 섹스에 문화적 의미를 각인한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젠더는 섹스 자체가 설정되는 바로 그 생산장치를 지칭하기도 한다. 섹스의 내적 안정성과 이분법적 틀은 담론 이전 영역에 섹스의 이원성을 드러냄으로써 효과적으로 보장된다. 섹스를 담론 이전의 것으로 생산하는 것은, 젠더라 지칭되는 문화적 구성장치의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3. 젠더 – 현대 논쟁에서 돌고 도는 유적

뤼스 이리가레의 논의. 여성들은 ‘하나’의 성이 아니다. 대체로 남성적이고 남근로고스 중심적인 언어 안에서 여성들은 재현불가능성을 구성한다. 이리가레는 주체와 타자 모두가 폐쇄된 남근로고스 중심의 의미화 경제의 남성적인 버팀목이라고 주장한다. 그 닫힌 질서는 여성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전체화의 목표를 달성한다. 이리가레는 여성적인 ‘성’이 언어의 부재지점, 문법적으로 규정된 실체의 실현 불가능성, 따라서 그 실체야말로 남성적 담론의 지속적이고 근원적인 환영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이러한 부재는 남성적 의미화 경제 안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리가레에게 여성의 성은 남성적인 주체를 내재성이나 부정성으로 규정한 ‘결핍’이나 ‘타자’가 아니다. 오히려 여성의 성은 재현의 필요조건 자체를 벗어난다. 타자나 결핍이라는 범주는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적 기획에 내재된 사르트르적 주체와 관련된다. 이리가레에게 여성적인 것은 보부아르의 주장처럼 주체의 표식이 될 수 없다. 게다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간의 결정된 관계라는 관점으로는 어떤 담론에서도 여성적인 것을 이론화할 수 없다. 정체성의 범주들은 근본적으로 재고될 필요가 있음이 확고해진다.

이리가레는 표식하는 자와 표식되는 자가 모두 남성적인 의미화 양식 속에 있으며, 그 안에서 여자의 몸은 의미화가 가능한 영역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리가레의 해석에서 여성을 ‘생물학적 성’으로 보는 보부아르의 주장은 전복되어, 여성은 자신으로 지칭된 성이기보다는, 타자성의 양식으로 활보하는 또하나의, 체현된 남성적 성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4. 이분법적인 것과 일의적인 것 이론화하기, 그리고 그 너머

보부아르가 불균형적 변증법의 실패한 상호관계로 우회하는 반면, 이리가레는 그 변증법 자체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자기 독백적 산물이라고 본다. 페미니즘 비평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전체화된 주장도 탐구해야 하지만 페미니즘 자체의 전체화 동향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적이어야 한다. 적을 단일한 형태로 규명하려는 노력은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대신 억압자의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는 하나의 역담론이다. 이 전술이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의 맥락에서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식민화하려는 제스처가 근원적이거나 불가피하게 남성적인 것만은 아님을 시사한다. 그것은 인종적, 계급적, 이성애 중심적 종속이라는 다른 관계들도 생산한다. 억압은 간단히 등급을 매길 수도, 인과론적으로 연관을 지을 수도, ‘원본’과 ‘파생본’의 국면으로 배치할 수도 없다. 타자에 대한 변증법적 전유와 억압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절대적 전락이라기보다는, 남성적 영역을 확대하거나 합리화하는 작용을 하면서 중점적으로 전개되긴 하나 배타적이지는 않은 여러 전술 중의 하나이다. 

여성 범주의 일관성이나 통일성에 대한 주장은 수많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그 다양성 안에 구체적 ‘여성들’의 배치가 구성되는데도 말이다. 페미니스트의 행동은 안정되고 통일되고 합의된 정체성으로부터 설정되어야 한다는 강압적 기대만 없다면, 여성이라는 범주의 의미가 영원히 고정되지 않은 수많은 ‘여성들’에게도 더 적합한 것이 될 것이다. 정체성은 이를 구성하는 구체적 실천에 따라 존재화될 수도 있고 해체될 수도 있다. 어떤 정치적 관행은 일단 눈에 보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연적 토대 위에 정체성을 설정한다. 

 

*(있다고 믿어지는)본질, (남성을 일반으로 한)보편성, (생물학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일관된)정체성이라는 토대위에서 논의된 여성이라는 범주는 문제의 소지가 많다.

*젠더는 그 총체성이 영원히 보류되어서, 주어진 시간대에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도 없는 어떤 복합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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