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철학사] 변주와 실험, 백가학설과 노자 후기 0404(수) +1
현
/ 2018-04-08
/ 조회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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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상) 후기
백가 학설, 노자
제7장 전국시대의 “백가 학설”
여전히 낯선 면이 있으면서도, 때로는 재미있습니다.. 특히 이번 백가 학설 부분에 들어서서는,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학설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맹자 시대 이전에는 공자 혹은 묵자 외에 딱히 세력을 가진 학파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맹자 시대에 이르러 ‘백가 학설’이 등장하였습니다. 당시 제나라는 선비들을 잘 대접하려 했던 이유 때문인지, 제나라 직하라는 곳은 학술과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전국시대의 ‘백가 학설’에 등장하는 학파들은, 대체로, 독립된 저술이 없고, 여기 저기에 조금씩 등장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학파 중, 중국철학사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양주입니다. 풍우란은 양주를 도가의 원류로 보아 노자는 여기에서 진일보, 장자는 진이보했다고도 말합니다. 양주는 묵자와 묶여 ‘양묵’이라고도 불립니다. 맹자는 양주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지만(맹자는 백가 학설의 대부분을 비판하는 듯합니다...) 자신만을 위한다(爲我)는 내용이나 자신을 존중했다(貴己)는 내용은, 중국철학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저의 편견 때문인지 저는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양주는 이기주의자나 쾌락주의자로 비친다고도 합니다. 세상에 이익이 된다 해도, 자신의 신체 무엇 하나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던 ‘은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일관된 학설로 근거를 세운 것이 양주라고 합니다. 자신을 존중하고, 생을 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지만, 스스로로부터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도 대처해야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여겼고, 그 방책으로 양주는 ‘피(避:도피)’를 이야기합니다. 주석의 신편을 보면, ‘도가철학은 몰락한 귀족의식의 집중표현’ 이라는 이야기까지도 나오는데, 위아, 귀기, 중생, 그리고 그 방법으로 ‘피’를 이야기하는 식의 ‘극단적으로 소극적인 사상은 구시대 귀족의 극단적인 몰락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진중자는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소신대로 삶을 산 선비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어서, 허행과 진상은 농가학파로, 누구나 똑같이 평등하게 일(농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자를 비롯하여 인성론자들은 사람의 본성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성(性)은 생 그 자체라고 하며, 자연의 타고난 산물로, 선도 불선도 없으며, 선악은 교육과 습관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윤문과 송경은 일종의 평화주의자로, 전쟁하려는 나라의 왕을 찾아가 전쟁이 이롭지 못함을 설득하려는 일이 맹자에 전해집니다. 이들은 모욕당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므로, 모욕을 수치라 여기지 말며, 인간의 본심은 많이 욕망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며, 이런 것들이 인간 본성 때문이 아니라 풍속과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팽몽, 전변, 신도는 만물을 있는 그대로 두면 알아서 합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들 중 팽몽의 학설은 만물의 평등성, 공평하고 아집이 없는 것, 지식 폐기, 성현의 불필요, 흙덩이는 도를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식이 욕망을 낳기에 지식을 폐기해야 하며, 흙덩이의 경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만물을 본성 그대로 두게 하는 것을 이릅니다.
그러나 세미나 시간에 기픈옹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식을 폐기하는 것, 반지성주의가 좋은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추연과 음양오행가가 등장하는데, 음양오행가는 중국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주석 신편의 이야기를 빌려오면, ‘음양오행가는 우주에 대하여 체계적이고 전면적인 설명을 하려고 의도’했고, ‘하나의 체계로써 자연계와 인류사회에 대해서 일종의 통일적인 해석을 하여, 일련의 원칙으로써 자연계와 인류사회를 관철시키려고 의도’했다고 합니다. 음양오행가에서는 ‘오덕(토, 목, 금, 화, 수)이 순차적으로 옮아가며, 그때마다 각 덕에 합당한 정치가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 이 오덕은, 감각, 날씨, 절기, 기후 등 모든 것과 연관되게 됩니다. 절기에 대한 해석과 함께 통치의 방법도 우주적 리듬과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미나 시간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러한 오행이 농경사회와의 연결성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그래서 최근 오행과 관련해서는 북반구에 한정한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재미있었네요.
제8장 노자
중국철학사에서 노자를 볼 때에, ‘노자’와 ‘노자라는 텍스트’를 구분해야 한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노담이란 사람(이 외에 이이 또는 노래자로 전해지기도 한다고 합니다.)은 공자보다 나이가 많다고 전해지지만 노자 텍스트는 전국시대 작품으로 볼 수 있는데, 첫째, 공자 이전에는 사적인 저술의 사례가 없다는 점, 둘째, 문답체가 아닌 점, 셋째, ‘경전’체라는 점에서 전국시대 작품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또한, 앞서도 말했지만, 『사기』에서는 ‘이이’라는 사람으로 실재의 인물이고, 노담은 전설 속 인물이라고도 전해집니다. 이런 식으로, 전설상의 인물, 실제 인물, 텍스트 간의 시간차가 있으며, 다른 인물과 텍스트에서도 어느 정도 이러한 시간차가 있을 수 있다고 하네요.
더불어, 노자 텍스트 역시 한나라 사람의 정리와 편집을 거친 것이므로, 노자라는 텍스트는 한 개인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세미나 시간에, ‘백서 노자(비단에 적힌 노자)’, ‘초간 노자(초나라 무덤 나뭇 조각에 적힌 노자)’, ‘통행본 노자’ 크게는 이렇게 세 가지 판본이 있다고 하는데, 이들 모두 배치와 글씨가 다르다고 합니다. 덧붙여, 세미나 시간에 하상공(한), 왕필(위진), 성현명(당) 등의 노자 주해가 대표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보는 노자는 통행본 노자인 것 같고, 81장으로 구성, 도경과 덕경 크게 두 파트로 나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노자』를 『도덕경』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노자 이전의 도는 사람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노자』에서의 도(道)는 형이상학적 의미가 부여되어, 천지만물 생성의 원리를 도라고 이름했다고 합니다.
노자 본문도 아리송하지만, ‘사물은 유(有)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도는 사물이 아니므로 다만 무(無)라고만 일컬을 수 있다. 그러나 도는 천지만물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에 유라고도 일컬을 수 있다. 따라서 도는 유무를 겸한 말인데, 무는 도의 체(體)를, 유는 도의 용(用)을 일컫는다.’(285) 는 중국철학사 내의 도에 대한 것도 형이상학적인 내용이라서인지 선뜻 이해가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설명을 듣기로는 본체(substance)와 작용(function)으로, 도란 이 본체와 작용이 함께 있고, 유와 무가 구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파도로 유는 물로, 무는 물결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도요. 이렇게 도는 천지만물 생성의 총원리로 초월성을, 덕은 한 사물의 생성원리로 구체성의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고 합니다.
기존의 노자, 무위자연과는 다른, ‘『한서』 「예문지」는 도가를 일컬어 “군주의 통치술”이라고 했다.’(280) 는 해석은 낯설게도 보이지만, 세미나 시간에 이야기한 노자는 또 다른 느낌으로 읽히는 것 같습니다. 처세에 대해 노자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장차 움츠리려면 우선 펴주어야 하고,
장차 약화시키려면 우선 강화시켜야 하고,
장차 폐할려면 우선 흥성시켜야 하고,
장차 빼앗으려면 우전 주어야 한다.
이러한 반대 원리를 처세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그것은 군주가 아닐까, 하는 의문과 더불어,
지혜를 끊고 지식을 버리면 인민의 이익은 백배 증가하고,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자식은 효도하고 부모는 자애로워지며,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은 없어진다.
이 세 가지는 법도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다음의 원칙을 제시한다.
겉으로는 단순하게 표현하고 안으로는 소박한 마음을 품고,
사심을 감소하고 욕망을 줄여라.
이런 식의 이야기는, 단순하게 보면 욕심을 버리라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지혜를 끊고 지식을 버리면’ 같은 부분은 의미심장해보입니다. 기픈옹달님이 말씀해주신 ‘도적’도 그랬는데, 도적은 일반적으로 개개인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체제를 뒤흔드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노자는 주로 함께 묶이는 장자와는 그 결이 상당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지난 시간, 전국시대의 다양한 학파와 노자에 대한 또 다른 시각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고 들으며, 흥미로웠습니다. 분량도 많고 낯설지만, 그만큼 재미있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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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 파도의 비유는 유/무 보다는 체/용이 적절할 거예요. 굳이 나누면 유/무는 존재의 여부라면 체/용은 존재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