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후기] 차라투스트라3부_낡은 서판들과 새로운 서판들 :: 0409(월) +6
연두
/ 201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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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서판들과 새로운 서판들에 대하여
20180411_연두
지난 9일, 이번 세미나는 고등래퍼 김하온이 얼마나 니체적인 인간인지로 시작해서 김하온, 이병재라는 대립적 존재가 서로를 얼마나 빛나게 하는지 감탄하며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긍정의 현현인 김하온과 심연의 현현인 이병재. 이들은 서로가 아껴 두어야 할 한층 품격 있는 적이고, 벗이다. 세미나 반장의 말대로 하온과 병재는 선/악, 긍정/부정처럼 대칭적 위치에서 서로의 존재이유가 되면서도 각자의 특이성으로 자기의 존재이유를 증명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재앙이자, 축복이다. 그들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연결된다.
'낡은 서판들과 새로운 서판들에 관하여'는 '낡은 가치들과 새로운 가치들에 관하여'이다. 그리고 '낡은 서판들을 부수기와 새로운 서판들을 만들기에 관하여'이다. 즉, 이 장은 몰락과 생성, 파괴와 창조에 관한 모음곡이다. 이 다음 장에서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가 극복해야 할 더없는 자기 모순을 집중해서 잘 보여주기 위한 간주가 아닐까 싶기도. 정상으로 다시 올라간 차라투스트라는 심연의 사상을 불러낸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깊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없이 깊어질 때 한없이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우리는 제대로 배워야 하므로, 그에게 '배우는 법을 배워야 하므로, 제대로 씹어 삼킬 위장을 준비해야 하므로. 셀 수 없을 '복된 모순'들, 그 가치들의 대립들을 드러내며 차라투스트라는 그것들을 어찌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지 자기에게 이야기한다. 아무도 그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므로 스스로 들려줄 수밖에 없다고. 그의 독백은 그들의 랩과도 닮았다.
온갖 최상급의 표현, 대립되는 가치들이 서른 개의 아포리즘 속에서 끊임없이 바퀴를 돌린다. 이 장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쉼없는 운동, 운동의 힘, 전복 그 자체다. 니체는 삶이란 끊임없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생명이 어찌 멈추어 있을 수 있냐고, 그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이다. 바퀴를 돌리는 것은 그 대립되는 가치들의 상이한 힘의 의지이며, 그것들이 각자 최상급이 될 때 우리의 동그라미는 더없이 커질 것이다.
생성하는 모든 것이 신들의 춤과 신들의-자유분방으로 생각되며,
이 세계가 해방되어 거칠 것 없으며 자기 자신을 향해 다시 도망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그 곳에는.
많은 신들이 영원히 서로로부터 도망을 치고 서로를 다시 찾는,
많은 신들이 서로 복된 모순을 일으키며, 서로 귀기울이고, 서에게 다시 귀속하는 것으로서.
모든 시간이 순간에 대한 복된 조롱으로 보이고, 필연이 자유라는 가시를 가지고 복에 겨워 유희하고 있는,
자유 그 자체였던 그곳에는.
또한 내가 나의 옛 악마이자 불구대천의 적인 중력의 정령과, 그가 만들어낸 모든 것,
이를테면 강제, 율법, 곤경과 결과, 목적, 의지, 선과 악을 다시 발견한 그곳에는.
가히 그것을 뛰어넘어 춤을 추고, 또 춤을 추며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것이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벼운 것, 더없이 가벼운 것을 위해서라도 두더지와 묵직한 난쟁이들이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에게는 최선의 것을 위해 최악의 것이 필요하고,
더없이 악하다는 것도 하나같이 사람에게는 최선의 힘이 되며,
최고의 창조자에게는 더없이 단단한 돌이 된다.
세미나 때 명령과 복종에 대하여 열띄게 논의했다. 나는 복종 없는 명령은 없으며, 명령과 복종이 구별 불가능한 지점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생명체의 천성은 복종으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사람은 마땅히 복종을 해야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복종할 때에도 복종하는 '힘에의 의지'가 생명체의 심장부에 있다. 자신에게 명령할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고결한 자다. 그 고결한 자들은 스스로 입법자, 가치를 만드는 자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의 법에 대해 판관, 수호자, 그리고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모든 명령에 따르는 시도와 모험이란 것이다.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명령하는 자가 되겠는가. 다양한 고결한 자들 속에서 귀족이 출현한다. 새로운 서판에 '고결'을 써넣을 새로운 귀족이 되겠는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립된 가치들이 공존하며 한 번에 모두 긍정되는 그곳, 저편을 향하는 차라투스트라, 선과 악, 모든 가치의 용광로, 저편의 그곳. 그곳을 향하며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 충분히 악한가. 기꺼이 범죄자와 악인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 선하다는 자들의 떳떳한 양심을 버릴 수 있겠는가. 너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죄책과 고통이다!
선과 악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망상일 뿐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도대체 악인이란 누구인가, 죄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그는 우리에게 '악인이 될 자유'를 선사한다. 생은 우리에게 (자기)향락과 순진문구를 약속하고 있으므로. 순진무구한 하늘 위에 '그래서'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래서?'를 띄워라.
자, 이제 낡은 서판들을 부숴버려라. 사람 사회, 그것은 일종의 시도다!
댓글목록
neovarsa님의 댓글
neovars…압축적으로 정리를 잘 하셨네요. 고수의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위 글 중 '복종'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았어요. 복종에는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외부의 명령에 피동적으로 복종하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자발적인 복종이 다른 사람의 명령을 생성시키는 것. 물론 후자는 전자의 합리화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너와 나의 구분이 없다면, 나의 복종이 스스로에 대한 명령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두님의 댓글
연두
역시 명령과 복종의 문제는 잔상이 많이 남아요. 세미나 때 치열했던 만큼.
저는 바르샤님 말씀하신 두 가지 모두를 니체는 자발적인 복종, 복종하는 힘에의 의지의 발현이라고 말한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명령에 복종하더라도 자신의 복종하려는 의지가 작동한다는 거죠.
오늘 저녁에 산책을 하며 명령과 복종의 문제를 계속 떠올리게 되었는데,
마땅히 명령이 외부로부터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복종하는 것조차 하지 않는 상태.
명령을 스스로 내리고 복종하지도, 외부에 마땅히 복종하지도 않는 그런 상태가 삶에 가장 위험한 것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생명체의 천성이 복종하는 존재라는 거라면,
자기에게도 타인에게도 복종하지 못하는 존재는 생명력이 썩어 있는 상태가 아닐까요.
그는 큰 도시의 성문을 지키며 꽥꽥 거리던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 그 늪의 개구리이며,
지쳐 있다고 하는 자이며, 사람을 뛰어넘는 익살꾼이 아닐까요.
+
스스로 명령하는 자와 귀족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이 부분이 아직 선명하지가 않습니다.
스스로 명령하는 자는 모두 귀족일까요. 좀 더 텍스트를 들춰봐야겠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 명령하려면, 복종하라! :: 명령하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에 관하여 ]
**연두의 후기와 세미나의 토론이 '명령과 복종'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
1. 생명체의 2가지 의지 :: 복종하는 의지, 명령한는 의지
"생명체를 설득하여 복종하고 명령하도록 하며, 명령을 하면서도 복종을 익히도록 설득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생명체를 발견하면서 '힘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 " <2부. 12장 자기극복>
명령과 복종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2가지 속성 혹은 의지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힘의 의지'가 있으며, 명령하는 의지와 마찬가지로 복종하는 의지도 힘의 의지입니다.
2. 복종하는 의지와 명령하는 의지의 관계
[생명체의 천성1. 복종]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복종 운운하는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모든 생명체는 복종하는 존재이다."
[생명체의 천성2. 명령] "자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존재에게는, 다른 자의 명령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생명체의 천성3. 복종보다 명령이 더 어렵다] "복종보다 명령이 더 어렵다.
명령하는 자가 복종하는 자 모두의 짐을 져야 하며, 모든 명령에는 시도와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명령을 할 때 생명체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건다. 생명체는 스스로에게 명령할 때, 자기자신의 율법의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
<2부. 12장 자기극복>
복종하는 의지가 생명체의 보다 근본적(자연적) 의지라면, 명령하는 의지는 자유정신(자기입법)과 연관된 의지처럼 인식됩니다.
복종하는 의지가 근본적인 것은, 생명체는 먼저 자신이 근거하고 있는 자연(자기신체.외부세계)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명령하는 의지가 자유정신인 것은, 타인에게 명령할 때 그의 짐을 모두 져야 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걸기 때문이고,
자신에게 명령할 때 자기입법자-자기율법의 판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복종하는 의지와 명령하는 의지의 구별불가능성 :: "나는 나에게 '복종'을 명령한다!"
"자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존재에게는, 다른 자의 명령이 떨어진다"는 표현에서,
'자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복종'을 명령하다는 말이지요.
자기입법자-자기율법의 재판관으로서 자기가치를 생성.복종할 수 없다면, 다른 자의 명령(가치)에 복종해야 한다는 거지요.
즉 복종하는 의지와 명령하는 의지는 자신에게서는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4. 복종하는 의지의 생명체적 본성 :: "명령하려면, 복종하라!"
"생명체는 보다 약한 자 위에 군림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설득하여, 보다 약한자는 보다 강한 자를 마땅히 모셔야 한다고 말한다.
보다 작은 자가 더 작은 자에 대해 즐거움과 힘을 누리기 위해 보다 큰 자에게 헌신하듯..." <2부. 12장 자기극복>
생명체가 '보다 약한 자'에게 명령하려면, '보다 강한 자'에게 마땅히 복종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보다 작은 자'가 '더 작은 자'에게 힘을 누기기 위해서는, '보다 큰 자'에게 헌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생명체가 근거하고 있는 자연(자기신체, 외부세계)의 필연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생명체는 자기신체 내부의 무수한 세포와 생명흐름의 명령과 복종의 메커니즘에 의해, 그리고
하나의 생명체는 외부세계와 관련하여 다양한 명령-복종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체가 자기신체나 외부세계와 관련하여, 명령만하고 복종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요?
과연 그 생명체는 존재할 수 있을까요? 결국 복종하는 의지는 명령하는 의지만큼 중요하다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강자일 수록 명령 만큼이나 복종이 자연스러우며, 공동의 신체로서 '공동체' 역시
명령하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가 다채롭게 구성될 때,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가 될 것입니다. ^^
+++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복종(가치긍정)하지 못하는 존재는, 명령(가치생성)하는 존재가 되지 못할 뿐아니라,
어떤 가치도 생성하지 못하면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허무주의가 아닐까요?
+++
귀족이 '강자의 인격화'라면 그는 긍정하는 자-능동적인 자이므로, 당연히 명령하는 자일 것입니다.
동시에 귀족은 명령만큼이나 복종조차(나는 복종을 명령한다!)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자가 아닐까요?
엇결과 순결님의 댓글
엇결과 순결
명령과 복종, 그리고 강자의 모습.
상호 모순된 것들이 긍정의 힘 속에 녹아 들어갈 때, 모순이 새로운 자아를 생성하는 지점.
그것이 강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해의 답보상태.
어쩌면 이것도 모순되는 것들이 하나의 귀결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지도......
연두와 오라클님의 후기 속에 뭔가 힌트가 잡히는 듯 하기도.
어려운 독해의 순간마다 실생활에서 사례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곤 합니다.
회사생활 시절 팀장의 오더가 맘에 안들 때, 스스로에게 설득이 안될 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대들고(상대방 기준에서?) 그러나 그 끝에서 비로소 진심으로 오더가 이해되었을 때
그 명령은 이제 나의 의지로 행하는 나의 명령이 되고 그 과정이 미션을 더욱 치열하게, 즐겁게 만들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잘 복종하는것도 스스로의 명령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좋은 토론과 후기가 주말 아침을 상쾌하게 시작하게 하네요.
즐 주말.
ps. 하온이가 우승을.
끝까지 전혀라는 곡으로 자신이 진짜였음을 보여준 병재도.
열린 결말로 땅에서 날아오르는 축가로 경쟁을 마무리해준 하온도.
모두모두 승자입니다.
이제야 전쟁같은 벗. 사랑. 결혼이 조금 이해가 되네요.
연두님의 댓글
연두
회사에서의 에피소드 완전 공감해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스스로 설득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순을 긍정하지 못하고 끌려가면
(이것이 바르샤님이 표현하신 피동적으로 복종하는 상태인 듯하고)
그것은 명령에 대한 복종이 아니며, 자기포기에 가까운 상태인 것 같습니다.
제가 후기를 쓰면서 명령/복종과 관련하여 주목한 지점은 차라투스트라 텍스트에 언급되지 않는 어딘가였어요.
복종하지도 명령하지도 않는 상태, 이것이 니체가 경계했던 '힘의 과소상태'가 아닌가 하고요.
물론 그는 가치를 창조하고 평가하는 자가 되기를 명하고, 고병권샘은 판단의 포기가 정말로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판단의 포기'다. 판단하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복종하는 데 익숙해진다.
-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대립과 모순을 끌어안지 못할 때, 우리의 힘에의 의지는 방향을 잃고 사그라드는 것이 아닐까,
그 때 우리 신체는 아무것도 생성하지 못하는 힘의 과소상태로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엇결과 순결님의 댓글
엇결과 순결
갑자기 떠오른 생각 하나.
니체의 텍스트가 모순을 하나로 아우르는 답을 찾는 여정이라면,
늘 모순성을 한가운데에 두고 사유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글이 때로는 이말 하다가 갑자기 반대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닌 모순 속에 존재하는,
어쩌면 진실은 모순 속에 존재하기에 그 모두를 천개의 눈으로 바라보고
보이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의 텍스트, 표현 하나하나에 소홀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는게 우선이나 또한 라인 하나하나를 나의 것으로
해석하는 것도 전체를 이해하는 길이라는 것.
이것도 모순적인가요? ㅎㅎ
연두님의 후기가 아침부터 제 머리를 두들깁니다. 마구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