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발제] 열풍 - 1919년
토라진
/ 201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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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수감록 39>
이상파들을 비판하는 이들은 이기(利器)로 ‘리(理)’(學理 또는法理)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이기는 바로 청조에서 얻은 과거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理자가 붙은 것은 모두 서양의 것이라는 이유로 배척했지만 서양에서 중요시되는 인격의 평등은 결국 외래의 과거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원래부터 이러한 것’이기만 하면 무조건 보배가 되는 현실에서 이상과 망상은 구분이 분명치 않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이 ‘공리가 강권을 이겼다’라는 선전에 중국이 슬쩍 끼어들어 이를 이용했던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수감록 40>
어느 청년이 보내준 시에 깃든 깨어난 사람의 진짜 소리에 감동을 받았다. 그 청년은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어야 함을 깨달았으며 과거 사람들이 저지른 죄악을 알고 고민하다 입을 열어 소리를 지른 것이다.
- 동쪽에서 먼동이 트면서 인류가 여러 민족에게 요구한 것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다만 사람의 아들, 며느리와 며느리의 남편 밖에 없으므로 인류의 앞에 바칠 수가 없다......그런데 여성들은 애당초 죄가 없었음에도 지금 낡은 습관의 희생 노릇을 하고 있다. (462)
- 우리는 크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 꾀고리라면 꾀꼬리처럼 소리치고, 올빼미라면 올빼미처럼 소리치면 된다. 우리는 거들먹거리며 사창가를 빠져나오자마자 “중국의 도덕이 제일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소리를 배워서는 안 된다.(462)
- 우리는 또한 사랑 없는 비애를 소리쳐야 하고 사랑할 것이 없는 비애를 소리쳐야 한다......우리가 낡은 장부를 깨끗이 지워 버리는 순간까지 외쳐야 한다.
<수감록 41>
- 나는 항상 두려워하며, 중국의 청년들이 냉기를 벗어나 자포자기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오로지 앞을 향하여 걸어가기를 바란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일하고 소리 낼 수 있는 사람은 소리를 내라. 한 점의 열이 있으면 한 점의 빛을 발하라. 반딧불이처럼 어둠 속에서 한 점의 빛을 발할 수 있다면 꼭 횃불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466)
<수감록 42>
영국 성공회 의사가 서문에서 중국인을 토인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 말은 모독이긴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중국 사회에 존재하는 식인, 약탈, 살해, 인신매매, 생식기 숭배, 심령학, 일부다처 뿐 아니라 전족 풍습 역시 토인의 특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뉴질랜드 토인들이 그들의 신화적 역사에서 뽑아낸 유사한 사건을 들어 이야기해야만 설득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13경, 25사가 신화적 역사이다.
<수감록 43>
- 우리가 요구하는 미술가는 ‘공민당’의 수령이 아니라 길을 인도하는 선각자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미술품은 수평선 이하의 사상적 평균 점수가 아니라 중국 민족이 지진 지능의 최고점의 표본을 기록하는 것이다.(471)
<수감록 46>
신문에서 한문 폐지를 주장하는 풍자화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외국 그림을 배워 외국어를 욕하면서 ‘포커’라는 외국어 이름을 쓰는 미술가가 불쌍하기까지 했다.
- 우리 세대가 재주와 능력이 모자라 창작을 하지 못한다면 공부는 해야 한다. 숭배하는 것이 새로운 우상이라고 하더라도 중국의 낡은 것보다는 어쨌거나 낫다. 공자와 관우를 숭배하기 보다는 다윈, 입센을 숭배하는 것이 낫다(476)
<수감록 47>
고문을 읽고 외우는 방식에 대해 비판한다. 이런 방법이 학문의 능력이고 학문 그 자체라고들 하지만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다행인 것은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일 뿐이다.
<수감록 48>
유신을 통해 배워온 새것으로 외래의 새것을 막아내고, 대문을 닫고 다시 옛것을 고수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중학을 본체로 하고 서학을 쓰임으로 한다” 거나 “시절에 맞추고 절충이 지당하다”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처럼 마음대로 행해질 수가 없다. 결국 입센의 말은 옳다. “All or nothing”
<수감록 49>
- 나는 종족의 연장 – 곧 생명의 연속 – 은 분명 생물계의 사업 가운데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연장하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진화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화의 도중에는 언제나 신진대사가 필요하다. 따라서 새로운 것은 흥겹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건강함이다. 낡은 것도 흥겹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저마다 이렇게 걸어가는 것이 바로 진화의 길이다.(483)
<수감록 53>
‘미술가’들의 내홍(내부에서 저희끼리 일으키는 분쟁)에 대해서 실망했다. 오늘날 중국의 미술가들의 병폐는 19세기 미술을 연구한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미술 중에서 세잔이나 고흐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그들이 결코 어떤 세기의 미술도 연구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수감록 54>
중국 사회의 상태는 수십 세기를 한꺼번에 축소시켜 놓은 형국이다. 문제는 ‘이중 사상’에 있다.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면서도 공자 존경을 강조하고, 전조 유로임을 자처하면서 민국에서 돈을 인출하고, 혁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복고를 주장한다. 진보를 바란다면, 이 ‘이중사상’을 뽑아내야 한다.
<56. ‘온다’>
- 이것은 바로 ‘온다’가 온다는 것이다. 온 것이 주의이고 주의가 도달했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만 ‘온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 덜 왔고 다 오지 않았고 올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다.
<57. 현재의 도살자>
“백화는 비루하고 천박하므로 식자들이 아랑곳할 가치조차도 없다”고 고아한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누구나 백화를 쓴다. 썩어 빠진 명교(삼강 오상 같은 전통적 예교)와 사후강직된 언어를 강요하며 현재를 여지없이 모멸하는 것이야 말로 ‘현재의 도살자’라 할 수 있다. 이는 ‘현재’를 죽이고 ‘장래’도 죽이는 일이다. 그런데 장래는 후손들의 시대이다.
<58. 인심이 옛날과 똑같다>
“세상이 경박하고 인심은 옛날과 다르고 국수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예전과 지금은 달라진 것이 없다. 혁신을 저지하려 하고 왕의 개인적 자유만을 중시하는 일이 여전한 것이다. 정녕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바깥 세계와 교류하지 않고 원시적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실론 섬의 베다족처럼 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인구가 해마다 감소하여 베다족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십분 애석한 일이다.
<59. ‘성무’(제왕의 무공을 칭송하여 부르는 말)>
중국은 어떤 주의도 들어오지 못하며 혹여 주의나 외래 사상이 들어온다 해도 금방 색깔이 변해버린다. 이는 중국 역사의 정수 때문이다. 정수에는 어떤 사상이나 주의가 포함되지 않은, 칼과 불, 그리고 ‘온다’가 그것들의 통칭이다. 하지만 이것이 거슬린다면 ‘성무’를 정수라 해보자. 하지만 이것은 순수 수성(獸性)적 측면에서서의 욕망의 만족일 뿐이다.
- 지금의 왜래 사상은 어쨌거나 자유평등의 숨결과 상호공존의 숨결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오로지 ‘나’만 존재하고 오르지 저들에게서 빼앗으려고 생각하고 오로지 모든 시공간 안의 술을 자기가 죄다 마셔 버리려고 하는 우리들의 사상계에는 정녕 발붙일 여지가 없다. (504)
- 따라서 ‘온다’를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른 나라를 살펴보면 ‘온다’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주의를 가지고 있는 민중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주의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뼈와 살로 칼날을 무디게 만들고 피로써 화염을 소멸시킨다. 칼빛과 불빛이 사그라지는 가운데 희미하게 밝아 오는 하늘빛이야말로 바로 신세기의 서광이다. (504)
<61. 불만>
‘우리 중국의 인도는 어떠한가?’ 질문해본다. 대답은 ‘그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도는 각자가 힘껏 쟁취하여 심고 보호하는 것이다. 군국주의와 싸워 이겼는데도 그들의 평론가들은 스스로를 탓하면서 불만을 드러낸다. 불만은 향상을 위한 수레바퀴로서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는 인류를 싣고서 인도를 향하여 전진한다.
-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종족은 영원히 전진하고 영원히 희망이 있다.
남을 탓할 뿐 반성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종족에게는 재앙이 있을지니, 재앙이 있을지니!(507)
<62. 분에 겨워 죽다>
- 모름지기 우선 자신부터 개조한 다음 사회를 개조하고 세계를 개조해야 한다. 절대로 불평 만으로는 안 된다. 원망은 거의 아무런 소용이 없다.(510)
- ‘원망을 품은 사람’이라고 자칭하며 분에 겨워 죽을 것 같은 면상으로는 사실 결코 분에 겨워 죽지도 않는다.(510)
<63. ‘어린이에게’>
아라시 다케오의 [작품집]에서 <어린이에게>라는 소설에 대한 소개.
- 인간 세상은 아주 적막하다......너희들과 나는 피를 맛본 짐승처럼 사랑을 해보았다. 가거라, 나의 주의를 적막으로부터 구하고자 한다면 힘껏 해보거라. 나는 너희들을 사랑했고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나로 하여금 너희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준 너희들’에 대한 나의 요구는 나의 감사를 먹고 힘을 축적한 새끼 사자와 같이 강건하고도 용감하게 나를 버리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513)
<64. 유무상통(없는 것과 있는 것을 서로 융통하여 돕는다는 뜻)>
- 우리는 자신을 개량하고 다른 사람들을 온전하게 지켜 주어야 한다. 서로 도우려는 방법을 생각하면 서로 해치는 국면으로 끝장나게 되고 말 것이다.(516)
<65. 폭군의 신민>
폭군 치하의 신민은 대개 폭군보다 더 포악하다. 폭군의 신민은 폭정이 타인의 머리에 떨어지기만을 바란다.
<66. 생명의 길>
- 생명의 길은 진보의 길이다. 언제나 정신이라는 삼각형의 빗변을 따라 무한히 올라간다. 어 떤 것도 그것을 저지하지 못한다.(519)
- 생명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 웃고 춤추며 사망한 인간을 뛰어넘어 앞을 향해 나아간다. (519)
- 무엇이 길인가? 그것은 바로 길이 없던 곳을 밟아서 생겨난 것이고 가시덤불로 뒤덮인 곳을 개척하여 생겨난 것이다.(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