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발제] 0년 :: 9장 하나의 세계를 위하여 (0322)
삼월
/ 201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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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의 사람들에게 남은 것 중 하나는 냉소였다. 국제연맹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실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된 국제연합은 어쩌면 그런 냉소 속에서 시작되었다. 전후에 국제연합 준비를 도운 영국인 정보장교 출신 브라이언 어커트는 냉소 속에서 세계기구의 결점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그 이상에 대해서는 항상 감동했다. 한편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인 스테판 에셀 같은 사람에게는, 전쟁에 대한 증오나 희망보다는 강제수용소 안에서 겪은 국제적 경험이 세계인권선언 작성을 추동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당시에 새로운 세계의 건설과, 국제연맹보다 강력한 국제기구의 세계 통치는 보편적 이상이었다. 제3차 세계대전을 방지하려면 전 세계적 경찰력을 갖춘 세계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미국인들이 이 주장에 심각하게 고무되었다.
실제로는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과, 식민지의 지도자들이 그리는 세계정부의 상이 매우 달랐다. 그 상들을 크게 두 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기독교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영미 중심의 자유주의, 2) 반나치·반파시즘을 내세운 유럽 중심 세계연방. 통합 유럽의 이상은 9세기 신성로마 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길다. 여기에는 통합된 유럽 기독교 세계와 영원한 평화라는 두 가지 주제가 담겨있었다. 평화적 통합은 종교적 이념이자, 기독교적 유토피아였다. 이 이상에 따라 반공주의자들은, 신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에 맞선 전쟁이 도덕적 사업이라고 믿었다. 한때 히틀러숭배자였다가 1950년대에 냉전주의자가 된 존 포스터 덜레스는 국제연합을 ‘도덕적 권력’으로 신봉했으며, 미국 대표단 고문으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했다. 한편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은 정치적으로 낡은 생각들을 파괴하면서, 국가 주권까지 제한하는 국제연합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루스벨트가 처칠에게: “유나이티드 네이션스!”
전후 국제기구를 계획하고 움직인 방식은 종교나 도덕적 이상보다는 정치였다. 1941년 8월 뉴펀들랜드 해안가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이 각자의 군함에 승선한 채 합의한 ‘대서야 헌장’은 국제연합 헌장의 기원이 되었다. 처칠은 대서양헌장에 미래 세계기구에 대한 언급을 넣자고 주장했다. 당시 루스벨트는 영국 제국주의에 관심이 없었고, ‘인류의 4대 자유’를 위해 파시즘과 싸우자고 주장했다. 헌장에 담긴 ‘강탈된 주권과 자치의 회복’, ‘국민이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 등은 식민지 해방을 위해 싸우는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게 환영받았다. 네루 같은 사람은 그 선언에서 위선을 읽어냈다. 그러나 헌장에 밝힌 민족자결권을 영국에 계속해서 요구했고, 이 권리들을 보장하는 ‘세계연방’을 촉구했다. 처칠은 이 ‘자치정부’의 권리가 나치점령국에만 적용된다고 주장했고, 미국과 영국은 식민지 문제와 관련해 갈등을 빚었다. 아직 국제연합은 세계기구라기보다 추축국에 대한 동맹 조직 정도로만 여겨졌다.
1942년 1월 중국과 소련을 포함한 26개국이 국제연합 설립에 서명했다. 루스벨트는 국제기구에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직접 ‘유나이티드 네이션스’라는 이름을 지었다. 전시 동안 국제연합을 둘러싼 쟁점들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전시동맹을 전후 평화를 위한 안정적 국제질서로 전환시킬 것인가? 어떻게 세계 경제 불황을 막을 것인가? 또 다른 히틀러가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이 국제사업을 ‘공산주의’의 공작이라 의심하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준동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결론은 세계기구의 실질적 영향력으로 모아졌다. 국제연합은 평화를 강제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력도 사용할 수 있어야 했고, 효과적 권위를 위해 강대국 간의 친밀함도 필요했다.
한편 미국은 전쟁 피해국들의 식량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인도적 지원을 위한 국제단체인 국제연합구제부흥사업국(1943년)을 발족시켰다. 이 사업국의 구호품 상당량이 동유럽이나 소련으로 갔는데, 이 문제는 미국 내에서 반공을 내세운 공화당의 비난에 부딪혔다. 스탈린이 유럽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면서 소련이 부상하기 시작하자, 국제연합에서는 강대국들이 통제하는 안전보장이사회 조직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독일을 격파하기 위한 경제협력은 국제규범을 갖춘 국제통화기금 설립의 초석이 되었고, 곧 국제사법재판소도 창립되었다.
1944년 11월 4선에 성공한 루스벨트는 전후 국제연합에 헌신하겠다는 의도를 선거에서 명확히 밝혔다. 루스벨트는 전 지구적 차원의 뉴딜이 필요하며, 국제연합은 전 지구적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 선거 직전에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개국이 모여 국제연합의 형태에 대해 의견을 조율했다. 강대국들의 거부권 문제가 미해결의 난제로 남았다. 1945년 4월 루스벨트가 사망하고 이어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었다. 트루먼은 루스벨트보다 민주적 세계질서에 대한 기대치를 더 높게 잡았고, 매우 미국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유럽 제국주의의 이중 게임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 회의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략적으로 진행되었다. 아르헨티나는 파시스트에게 동조했으나, 미국과 소련이 회유를 위해 초대했다. 소련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가 소련공화국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국가인 폴란드는 임시정부와 소련이 추천한 정부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초대받지 못했다. 아랍인들은 구경거리가 되어 당혹스러워했고, 미국이 너무 부유하고 강력한데다 전쟁피해가 없다는 이유로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미국의 지위를 우려했다. 4대 강국은 일반적 원칙에 신속하게 합의했으나, 나머지 국가와 강대국 간에는 우월성과 세계기구의 목표 사이에 긴장이 존재했다. 호주를 비롯한 소국들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강대국의 거부권 행사에 분개했지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강대국의 입장을 강경하게 취하려 했다. 여기에 폴란드 전시 지하운동가들이 소련에서 ‘나치협력자’로 재판받은 사실이 밝혀져, 회의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그 순간에도 인권선언을 논의했고, 이 보편적 인권에 대한 선언은 후에 전후 질서의 가장 위대한 공헌으로 꼽혔다. 보편적 인권은 뉘른베르크재판이 ‘반인류 범죄’에 적용한 법률과 연관되었고, 집단학살 개념과도 연결되었다. 그러나 인권 시행의 의사록은 제안되지 않았고, ‘인권을 보장한다’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결국 폴란드 지하운동가들은 소련 감옥에서 대부분 살해되었지만, 미국 언론은 소련의 도덕적 지도력과 식민지 국민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칭찬했다.
1945년 6월 말 프랑스군과 싸우던 시리아가 이 인권선언에 의거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은 1944년에 시리아를 이미 독립국으로 인정했었다. 선교에 대한 열정과 상업적 이해 때문이었다. 1941년에 전후 시리아의 독립 인정을 약속한 영국은 고민 끝에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드골은 영국의 행동이 프랑스와 서구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만 보면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계획된 세계질서가, 시리아에서 대서양 헌장과 국제연합 정신에 부응하는 사례로 완벽하게 실험된 꼴이었다. 프랑스는 1941년의 약속(대서양헌장)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 권위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영국은 새로운 자국의 위상에 만족했지만, 중동지역에서 다른 민족에게 이중의 약속을 하면서까지 중요한 존재가 되려고 했다. 시리아 사태는 사실 19세기의 제국주의적 충돌과 닮은 점이 있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중동에서 우위를 잃고, 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은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얼마나 미미한지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실망스런 결과
세계정부가 작동하려면 국가들이 주권을 포기해야 했으나, 주요 회의참가국들도 주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국제주의의 목소리는 오히려 민족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통해 샌프란시스코회의 기본원칙의 필요성은 확인되었으나, 신중함이라는 핑계 앞에서 세계정부의 이상은 결점을 드러냈다. 강대국들은 단합하지 못했고, 이는 냉전으로 이어졌다. 소련의 몰로토프는 공산주의가 강력했던 두 나라인 프랑스와 중국을 괴롭혔다. 위협이 영국과 미국에게까지 번지자, 소련은 전 세계의 적이 되었다. 냉전의 시작이었고, 세계질서의 커다란 균열이었다.
국제연합을 통한 개별국가의 주권 포기와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은 애초에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였다. 미국은 그 상황에서 도덕적 관점을 취하려 했고, 도덕적 판단이 일치하지 못해 국제연합의 힘이 약한 상태로 유지될 거라 전망했다. 냉전주의자 덜레스에게 냉전은 정치뿐 아니라 도덕적 갈등이었고, 악에 저항하는 선의 전쟁이었다. 냉전은 양분된 평화가 아니었고, 결국에는 전쟁을 향해가는 세계를 의미했다. 세계 민주주의와 세계정부, 세계경찰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다. 프랑스와 영국은 제국의 몰락과 함께 영향력이 더욱 축소되었고, 소련과 미국은 공개적인 적대관계가 되었다.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분리되었고, 1949년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쫓겨 갔다.
평화: 스포츠와 음식 이야기 그리고 0년의 성과
0년, 1945년은 그렇게 감사와 걱정의 교차 속에서 끝났다. 대부분 지역에서 일종의 평화가 이루어졌으나, 미래에 대한 환상은 별로 없었다. 세계는 조금씩 분단되어 갔고,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었다. 팔레스타인과 한국처럼 테러와 반식민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확실하게 대부분 지역에서 전쟁은 끝났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가족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다시 날씨와 스포츠,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에서 위안을 찾는 것도 가능해졌다. 독일인과 일본인들은 고통과 환멸, 혼돈, 수치와 형벌의 한 해를 떠나보냈다. 다시 일상의 감각이 살아남은 이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물론 독일이나 일본의 전쟁포로 수용소에 난민상태로 머물러 있거나 오갈 갈 데 없는 이들에게는 아직 그렇지 않았다.
산산조각 난 국가를 재건하는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에, 축하나 애도를 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냉철하고 정연한 인식이 필요했다. 일부에서는 식민주의나 내부의 적에 대항하는 전쟁이 계속되고, 새로운 독재자가 나타났다. 전쟁은 잊고 싶은 과거와 함께 향수를 남겼다. 세상은 더 이상 과거보다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0년은 수년간 파괴를 경험한 세계의 집단기억 속에서 퇴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0년 이후에 태어나 성인이 된 사람들에게도, 1945년은 중요한 해이다. 복지국가, 성장만 할 것 같은 경제, 국제법, 미국에 의해 보호받는 ‘자유세계’의 이상은 1945년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 모든 것들이 지속되지는 않겠지만, 1945년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고난과 희망, 열정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