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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잡문] 사라지지 못한 글
기픈옹달 / 2018-03-21 / 조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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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코 꽃이 되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는 그가 결코 몰아낼 수 없었던, 허무와 어둠 탓이다. 찰싹 붙어있는 ‘그림자’ 같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그 무엇. 깊숙이 스며들어 결코 빠지지 않는 어떤 얼룩처럼. 그러나 이 음영이야 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처럼 끊임없이 자기 삶의 그늘을 응시했던 자에게는 더욱.  

 

당신은 나의 작품을 늘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 작품은 너무 어둡습니다. 나는 늘 ‘어둠과 허무’만이 ‘실재한다’고 느끼면서도 기어코 이런 것들을 향해 절망적 항전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소리가 아주 많이 들어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아마도 나이, 경험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틀림없이 확실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끝내 어둠과 허무만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먼 곳에서 온 편지: 제1집 4>, 루신 전집 

그를 ‘문인文人’이라 칭하지만 ‘문학가文學家’라 부르기기에는 주저하고 있다. 문학가란, 작품을 써내는 작가란 무릇 한 세계를 독립적으로 창작해내는 그런 인간 아닐까. 그러나 그는 시대와 너무 가깝다. 그의 글을 읽을수록 그의 시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적어도 그가 대상으로 삼는 수많은 ‘적’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아마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 따위는 안중에 없었을 테다. 그에게는 창작의 열망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보다 투사의 이미지가 보인다.  

 

루쉰은 생전에 여러 책을 내었다. 대부분 이래저래 쓴 글을 묶어 책을 내었다. 그래서 대체로 책머리에 붙은 <제기題記>는 그 책의 가장 마지막 글이다. 책의 마침표. 그런데 뿌듯함을 발견할 수 없다. 자신의 행적에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 루쉰은 자신의 글을 알뜰히 아껴대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자신의 글이 사라지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나는 이 태도가 영 못마땅하다. 글이란 소멸에 저항하는 게 아니던가? 인간은 망각과 싸우기 위해 붓을 든다. 소멸의 운명에 맞서기 위해 무엇인가 쓴다. 그런데 그는 소멸을 열망한다. 사라지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한다. 여전히 자신의 글이 읽힌다는 사실에 비애를 느낀다. 

 

나는 시대의 폐단을 공격한 모든 글은 반드시 시대의 폐단과 더불어 사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혈구가 종기를 생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제거되지 않으면, 다시 말하면 자신의 생명 유지는 바로 병균이 여전히 존재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풍: 제목에 부쳐>, 루쉰 전집 

루쉰은 자신의 글이 종기 - 고름과 같다고 여겼다. 상처가 고름을 낳는 것처럼. 고름이 남아 있음은 아직 아물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이다. 루쉰은 묻는다. 상처 - 시대의 폐단을 없애고자 했던 지난날의 수고가 무슨 결실을 맺었단 말인가. 루쉰은 자신의 말이 쓸모없는 시대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날은 쉬이 오지 않는다.  

 

그가 건드린 ‘시대의 폐단’은 오늘날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시대와 오늘은 약 100여 년이나 떨어져 있다. 게다가 그는 중국에 우리는 한국에 있지 않나. 그가 말한 ‘시대의 폐단’이란 정작 우리에겐 강 건너 불구경할 정도의 것이 아닐까. 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덧붙여 ‘시대의 폐단’이라면 2010년 대한민국이야 말로 얼마나 이야기하기 좋은 무대인가. 오늘날 회자되는 그 많은 적폐야 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진 ‘시대의 폐단’ 아닌가. 

 

백여 년 뒤 이웃나라에서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에 대해 루쉰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무엇 때문에 그런 불필요한 수고를 하냐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가 말한 병균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은 이상, 그의 글을 읽는 게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더럽고 병약한 20세기 중국인의 모습을 구경하는 악취미가 아니라면.  

 

그러나 사멸을 욕망하는 그 욕망 자체, 어둠과 허무에 육박하는 그의 투철한 정신 때문에 그의 글은 여전히 유효하다. 병증이란 치료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림자란 떼어낼 수 없는 것이므로. 사멸을 욕망하였으나 사멸되지 아니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줄곧 무엇을 하고 있는지 끝내 알지 못하고 있다. 토목공사에 비유하자면, 일을 해나가면서도 대를 쌓는 것인지 구덩이를 파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설령 대를 쌓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그 위에서 떨어지거나 늙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구덩이를 파는 것이라면 그야 물로 자신을 묻어 버리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요컨대, 지나가고 지나가며, 일체 것이 다 세월과 더불어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하고 있다. — 이러할 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주 기꺼이 바라는 바이다.  

<무덤 : 무덤 뒤에 쓰다>, 루쉰 전집 

지나가버리고자 했으나 지나가버리지 못한 글. 사라지고자 했으나 사라지지 못한 글. 이 역설은 루쉰의 역량 부족이라거나 그 글이 가진 미진함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니다. 도리어 지나감, 사라짐, 소멸에 그가 얼마나 투철하게 나아갔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글은 역설 덩어리이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다른 꼼수가 담겨 있지도 않다. 순박하고 솔직하다. 단순하고 단호하다.  

 

但如果凡我所写,的确都是冷的呢?则它的生命原来就没有,更谈不到中国的病证究竟如何。然而,无情的冷嘲和有情的讽刺相去本不及一张纸,对于周围的感受和反应,又大概是所谓“如鱼饮水冷暖自知”的;我却觉得周围的空气太寒冽了,我自说我的话,所以反而称之曰《热风》。 

 

그런데 만약 내가 쓴 모든 글이 정녕 차가운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의 생명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므로 중국의 병증이 필경 무엇인지는 더욱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무정한 냉소와 인정어린 풍자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는 법이다. 주위의 느낌과 반응에 대해서는 소위 “물고기가 물을 마실 때 차가운지 뜨거운지를 절로 아는 것과 같다”라고 할 수 있다. 주위의 공기는 너무나 차갑게 느껴진다. 허나, 나는 나의 말을 하고 있으므로 외려 그것을 일러 <열풍>이라 부르기로 한다. 

<열풍: 제목에 부쳐>, 루쉰 전집 

冷嘲热风이라는 말이 있다. 차가운 냉소와 뜨거운 풍자. 루쉰의 글에는 냉소가 서려있다. 그토록 차가운 글이 무엇을 줄 수 있냐며 손가락질받을 법하다. 그러나 거꾸로 그가 당면한 시대야 냉소로 가득 차 있다. 개혁을 주창하던 자들이 개혁가를 비판하며, 개혁을 비방한다. 5.4 운동에 나타났던 보이스카우트식의 신문팔이가 여전하지만 낡고 헤어진 채로 있을 뿐이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춥고 쓸쓸한 시대의 풍조를 반영하고 있는 건 아닐지. 이런 와중에 루쉰은 자신의 글을 열풍이라 불렀다. 그저 자기 말을 하고 있으므로. 

 

루쉰은 물고기는 차가운지 뜨거운지를 절로 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글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잘 모르겠다.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열풍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차갑다고 말해야겠다. 물론 이는 그가 비판한 ‘냉소’와는 다르다. 시대의 변화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하며 씁쓸한 미소를 날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시대의 한복판으로 스스로를 구겨 넣으려 했다. 그러나 거꾸로 그의 말에는 근본적인 차가움이 남아 있다.  

 

<들풀>에서는 ‘죽어버린 불’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쓴다. 무엇을 태우지 않고 그저 불꽃과 그을음마저 얼어버린 불. 아마도 그런 모순이야 말로 루쉰의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닐지. 그런 면에서 그가 예로 든 물고기의 비유가 쉬이 넘어가지 않는다. 문득 질문이 든다. 차가운 물속에 있는 물고기는 차가운 줄을 알까? 뜨거운 물속에 있는 물고기는 뜨거운 줄을 알까? 물속의 물고기에게는 안과 밖이 없거늘 그가 느끼는 차가움과 뜨거움이란 대체 무엇일까? 거꾸로 그에게는 물고기와는 다른, 외부와 결코 온도를 맞출 수 없는 근본적인 차가움 혹은 뜨거움이 있지 않았을지. 그것은 다만 몇 마디 말을 통해 언뜻 비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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