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발제]1945년 0년 :: 0308(목) 7장 자신만만한 희망의 아침
라라
/ 2018-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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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 0년 >
제3부 네버 어게인
7장 자신만만한 희망의 아침
1945년 최악의 독일 강제수용소 중 하나인 부헨발트 정문에는 “당할 만한 이유가 있다”라고 새겨진 주철 글씨는 “네버 어게인”이라는 푯말로 도배가 된다. 역사상 최악의 고통을 격었던 사람들은 ‘결코 다시는 없을 것이다’라는 감정은 단순한 감정이 이상이었다. 유토피아적 이상이었고, 잿더미에서 다시 더 새롭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역사는 사라질 수 없다. 인류 역사에서 백지와 같은 상태는 없었다. “독일 0년”이라고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합의는 아직 덜 된 상태이다. 유토피아적 이상, 온건한 정치적 변화에 대한 야망도 매우 다양하다. 급진적인 변화는 피식민 국가에서 일어날 것 같았지만 영국에서 먼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폐허의 ‘0’년 : 희망의 조건
-노동당의 승리 ; 1945년 7월 선거에서 윈스턴은 실각했고 노동당 당수 클레멘트 애틀리가 예상을 뒤엎고 압도적 표차로 승리했다. 7월 선거의 승리자 역시 압도적인 표차에 놀랐고 1년이 지나서야 승리에 대한 발언을 했다. “지금은 우리가 주인이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럴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정부의 오만함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다른나라의 태도 : 미국은 뉴딜주의자들을 제거하고 중도 방향으로 우향우하는 상황에서 영국이 사회주의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노동당이 친유대적이라 환호했다. 그리스 왕당파는 흔들렸고 좌파는 변화를 기대하면서 의기양양했다. 소련은 별다른 언급이 없었고 스페인 파시스트 정부는 외교단절을 예상했다. 무슬림 고위인사는 영국 유권자들이 전멸의 위험에서 그들을 구한 사람을 더는 필요없다고 제거한 것처럼 보인다고 평했다. 프랑스는 영국은 토리당(보수당) 지배로 인한 대가를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처칠이 없는 노동당을 선택했다고 보도했다. 시대를 위한 메시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영국도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분석했다.
-처칠은 특유한 유머로 패배를 받아들였다. “차분하면서도 금욕적으로 결과를 받아들였는데, 운명이 드라마 같은 장난을 칠 수 있다는 한 가닥 유머와, 유권자들이 보여준 자립성에 대한 존중도 함께였다.”
-영국분위기 : ①맥밀런은 영국인들은 건전한 본능에 의거해 좌파정부의 지배가 훨씬 더 현명한 선택했다고 보았다. 전쟁이 끝나면 유토피아가 즉각 따라올 것이라는 생각에 설득당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가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순진무구한 이상주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처칠의 영국은 지나갔고 상층계급이었던 맥밀런은 가장 힘든 업무를 해왔던 하층계급의 분노를 인정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②니컬슨은 완전히 ‘비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상류계급이나 보수주의자들의 잘못으로 여기는 계급의식과 계급적 분노가 강하다고 지적했다.=>계급에 따른 특권을 수용하는 것이 ‘비논리적’인가? 모두 고통을 공유한 상황에서 낡은 사회의 불평등 질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였고 여기에 새로운 권리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게 영국판 ‘네버 어게인’이다.
③에드먼드 윌슨(미국 비평가)은 자신의 관찰과 목격으로는 영국은 완벽한 계급차이가 있다고 감지했다.=>영국사회를 계급복지나 후생의 문제로 설명할 수 없다. 상층 부르주아도 처칠이 전후 국가에서 제대로 해낼지 의심했다. 전쟁 후 사회적, 정치적 태도가 변한 것은 계급의식외에 교육도 있다. 음악콘서트와 공연, 토론, 교육프로그램도 영향을 주었다.
④시릴 코널리는 모든 인간은 문명사회의 삶을 살 자격이 있기 때문에 노동당에 투표했다. “영국을 행복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만이 제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믿는다.”
-1944년 파월과 프레스버거의 영화[켄터베리 이야기]는 당대의 정신적, 정치적 갈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속 ‘글루맨’은 젊은 여성들이 군인들과 데이트하는 것을 막고 영광스러운 영국 역사와 시골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영국을 위해 싸우는 인물로 이상주의적이면서도 거의 성인에 가까운 인물이다. 영국 시골에서 팽배했던 애국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클레멘트 애틀리 사회주의는 파월과 프레스버거의 토리식 낭만주의와는 동떨어져 있었지만 영국 사회주의에는 강한 기독교 전통이 있어 [켄터베리 이야기]는 애틀리의 정치 견해를 반영하는데 동떨어져 있지않았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찬가 [예루살렘]은 예수그리스도가 영국을 낙원으로 바꿔놓았다는 독실한 믿음과 애국주의가 뒤섞인 표현이다. 사회주의 영국은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간주되었다.
-처칠은 유럽대륙의 인간사회에 관한 관념인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필연적으로 경찰국가가 될것이라고 했다. 사회주의 정부는 게슈타포식 정부형태로 후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푸르고 쾌적한 땅을 즐겨야 한다는 처칠식 자유방임주의의 시도는 선거패배로 불발에 그쳤다.
처칠은 전시의 계획 및 통제 폐지를, 애틀리는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기 위해 계획과 통제가 확대해야 한다고 믿었다. 1930년대 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불신과 경기 불황에 대한 비판, 이에 따른 높은 실업률은 좌우파 정권을 막론하고 지속되었다. 히틀러나 애틀리, 동아시아에서도 완벽한 사회를 계획한다는 생각은 20세기의 거대 신념이었다.
보수주의자 드골의 타협 (진보주의,애국주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드골주의자들도 다정한 프랑스에 대한 사랑만으로 비시정부와 독일인에 대항해 싸운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이상이 있었고 레지스탕스 출신들이 전후에 이상을 실현하기를 바랐다. 레지스탕스 국민회의는 일종의 예비정부였다.
스테판 에셀은 당시 국민회의는 개인적 이해가 공동선에 복속되는 합리적인 경제조직을 제안했다고 기억했다. 독재에서 공동선을 해방시키기위해 파시스트 국가의 형상을 창조해 냈다고 회고했다. 에셀의 정치적 견해은 왼쪽에 가깝다.
드골은 영국의 처칠처럼 위대한 인물이긴 하지만 동시에 진보에 방해되는 반동적인 인사로 여겨지고 있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드골을 “권력을 위해 민중의 고혈을 짜내고 싶어하며 민중이 약하면서도 독실하기를 바라며 부르주아 같은 드골주의자가 되기를 바라며 실질적인 부르주아가 되기를 원한다”고 적었다.
드골은 보수주의자로 레지스탕스 출신들이 정치적 권력을 잡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진보주의와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산업과 광업, 금융업을 정부가 책임지는 계획은 드골정부의 전형적인 계획경제 모델이었다.(장 모네)
전 유럽에서 계획을 중시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시칠리아와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에서는 독일인을 쫓아내는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진행되었다.
이 모든 기저에는 강력한 범유럽적 요소가 있었다.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는 아이디어는 한 국가보다는 전체 유럽의 생각이었다.
시릴 코널리는 통합된 유럽만이 또 다른 자멸적인 충돌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코널리의 ‘네버 어게인’은 유럽연방으로 모든 사람이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문화독립체를 의미하며 만약 유럽이 국제적 지역주의를 위해 개별 국가의 경제문제를 일정 정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유럽은 그리스 도시국가처럼 멸망하게 될것이라고 경고했다. 코널리는 유럽연방은 좌파만이 시행할 수 있으며 이 좌파가 제 3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는 결의를 가진 유럽민중전선이라고 믿었다.
유럽의 미래에 대한 다른 주장은 애국주의적인 견해로 국가의 위대함은 통합된 유럽에서만 되찾을 수 있다는 관념이었다. 프랑스에서 비시 정권 출신의 관료들에게 두드러졌다. 계획국가라는 모네의 애국적 헌신은 프랑스 전 국민의 단합이 필수적이었다. 1945년은 가장 완벽한 시기였다. 경제를 국유화하고 프랑스를 현대화하고 다음은 유럽 석탄공동체 이후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 그리고 완전한 통합유럽을 최종 목적지로 두고 있었다.
유럽 기술 관료들과 독일 계획가들의 협력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중 하나는 나치 점령하의 독일 계획가들과 유럽 기술 관료들 간의 협력이었다. 그들에게 파괴는 때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논쟁으로 결정이 지연되는 식의 자유민주주의가 야기하는 혼란에 싫증은 내는 관료들은 장 모네처럼 강력한 리더십 아래 행동을 동합하길 원했다. 이런 점에서 나치 정부는 그들이 원했던 정책을 펼칠 기회를 제공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로테르담을 파시스트 양식으로 재건하려는 독일인들의 계획에 대해 조금도 의도한 바가 없었다. 독일인도 로테르담의 현대화를 함부르크나 브레멘 같은 항구도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실현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1943년 링거가 체포되면서 재건 계획은 중지되지만 전쟁이 끝나고 링거는 네덜란드식의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기술자가 된다.=>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치 점령기의 유산에 기대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이다.
기시노부케와 괴뢰국가 ‘만주국’
만주국의 실체
1930년대와 1940년초 일본이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가. 일본 제국이 서구식 자본주의를 ‘이기적’이라고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만주국은 의사 독립국가 형태를 띠었다. 공식적으로는 집단적 사회정의와 평등주의의 모델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일본이 건설한 광산과 공장은 중국인 노예노동에 의존하였고 일본 관동군의 지배 아래의 중국과 한국인의 삶은 참혹했다.
만주국의 수도 신징의 청사진은 오스만의 파리와 19세기 영국의 정원도시 개념, 독일의 바우하우스등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가장 현대적인 대형의 정부 건물은 일본사찰과 중국 궁궐을 본뜬 박공.합각 지붕으로 장식될 것이었다. 거대한 원형 관장을 중심으로 바퀴살 모양으로 퍼지는 웅장한 설계는 아시아 양식의 웅대한 관료주의의 요새였다. 매끈한 외관의 남만주 고속열차인 ‘아시아 익스프레스’에서부터 혁신적인 공공주택의 수세식 화장실까지 모든 게 재대로 작동했다.
일본인 지배자들은 상당수가 군국주의자였고 모든 일본인은 민족주의자였으며 꽤 많은 일본인이 일본이 주도하는 서구식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서 새로운 아시아 범아시아적 이상을 믿었다.
만주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을 무시했다. 악의에 넘치는 관동군과 살인적인 헌병대, 일본 깡패 무리, 뜨내기 뒤에는 완벽한 계획경제의 운영 발판으로 봤던 높은 관료와 관리자, 기술자 군단이 있었다.
전형적인 만주국의 ‘개혁관료’는 자유주의자보다는 공산주의자들과 공통점이 더 많은 급진 우파로 묘사하는게 정확할 것이다. 대표적인 유형은 기시 노부스케이다. 상냥한 표정의 관료주의 운영가의 목적은 국가권력의 확장이었다. 냉철한 효율성으로 만주국을 산업화했고 나중에 일본에서도 실행되었다.
1945년은 일본에서도 0년 즉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완벽한 기회일 수 있었다. 기시 노부스케도 아유카와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지만 일본에 건립한 제도는 온전하게 남았다. 일본을 평화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려는 미국 뉴딜주의자들이 생각했던 내용과 일본 재무성이 작성한 보고서(세계는 마침내 국가자본주의, 또는 통제되고 조직화된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매우 흡사하다. 경제적 궁핍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일본인들이 공산주의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해법은 군부의 이해나 대기업의 욕심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일본의 산업능력을 재건, 일본인들이 빨리 자급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하는 애국적이고 평등주의적 이상을 가진 공무원에게 경제정책을 맡기는 것이었다.
‘사대’의 수치 : 한반도의 비극 ‘분단’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에 한국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기뻐했다. 사람들은 독립에 도움을 준 소련에게 감사하는 플래카드를 들기도 했다.
한국의 레지스탕스 영웅 여운형은 서울에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여운형의 연설은 관대함(지나간 것은 지나가게 합시다. 좋게 헤어집시다)과 유토피아(절대 깨지지 않는 단합으로 함께 나아갑시다)를 볼 수 있다.
소련이 평양에 도착하기 전 ‘한국의 간디’ 조만식은 독립을 준비했다. 여운형처럼 공산당 소속이 많기는 했지만 공산주의자가 지배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다. 남과 북 모두에서 한국인들이 구성한 위원회가 일본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았다. 위원회 대부분은 공산주의자이거나 온건한 좌파, 기독교인이거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일본인은 물론 한국인 엘리트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과 반란은 한국의 전통 샤머니즘과 기독교 영향이 결합된 메시아적 구석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반일 저항은 지주계급에 반발해 봉기했던 옛 농민 반란의 현대판 현현이었다.
한국사에서 통합은 드문 일이었다. 조만식과 여운형이 통일된 한국이라는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더라도 좌파는 파벌로 쪼개져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시간과 장소만 가능하면 어디서든 권력을 쥘 준비가 되어있었다. 여운형은 서울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뒤에 한국민주당으로 결집한 우파의 도적에 직면했다.
한국인들에게 ‘네버 어게인’은 외세에 지배당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주독립에 방해되는 모든 세력에 투쟁할 것이며 완전한 독립국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실현할 것을 결의했다. “합리적인 낙원”에서 사대라는 수치는 영원히 없어져야 할 것이었지만 한국인은 결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미군 책임자로 온 존하지 중장은 한국을 알지도 못하면서 책임자로 뽑혔다. 하지 장군은 여운형 동생 여운홍의 면담을 거부했고 일본 행정부를 그대로 놔두라고 발표했다. 한국의 반응에 번복하기는 했지만 일본인들을 자리에 그대로 머물라는 지시를 했다. 하지는 한국인 대부분을 일본의 지배로 교육이 안 된 동양인으로 말을 나누기 힘들다고 여겼다.
북쪽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다스렸다. 인민법정이 세워졌고 일제협력자와 반동분자를 숙청했다. 이 과정에서 심각한 폭력이 발생했다. 지주계층은 남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게릴라 전사로 다소 뚱뚱한 30대 남자가 소련 최고사령관의 환영을 받는다. 7만여명이 경의를 표하고 김일서은 ‘감사를 표하는 한국인 대표’로 소련을 찬양하는 연설문을 읽는다. 김일성 숭배는 한국 역사에서 정치운동이 가졌던 메시아 신앙과 연계되어 있다.
남쪽은 미군정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직접 통제를 하고 있었다. 사실 공산주의자들의 의도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미국에 우호적이면서 미국에서 교육받은 이승만을 한국정부를 이끌 사람으로 정한다.
미국과 소련은 신탁 통치후 한국인들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영국와 중국의 도움아래 완전한 독립을 향해 나가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북쪽은 신탁을 반대한 조만식을 숙청했다. 남한은 좌파와 보수파의 연정 구성에 실패하자 좌파는 신탁에 동조한다. 이승만의 보수파는 이를 사대라고 비난하며 진정한 애국자로 떠오른다. 미국은 이승만을 지원하면서 한국인이 자신들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조선인민공화국은 사라진다.
북쪽은 김일성이 임시공산주의 정부를 책임지고 남쪽은 이승만이 지배하면서 나라는 분단이 되고 1950년에 북한의 남침으로 200만명의 사망자를 낸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북한은 유사 제국주의왕조의 지배가 계속되고 남한는 수십 년간 군부의 지배를 받는다.
핵폭탄 투하로 날아간 케인스의 희망
유토피아적 꿈은 환상이 조각나면서 고물상에서 생명이 끝날 운명이었다. 하지만 모두 같은 방식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취와 흔적도 남기게 마련이다.
영국의 새로운 예루살렘은 ‘재정적 던커크’ 때문에 실패했다. 미국 구호 혜택을 받기로 희망했지만 일본이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영국 재정은 심각한 어려움을 격었다.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도 급격히 잃어갔다. 1945년의 열정은 사라지고 돌턴(노동당 당수)은 “자신만만한 밝은 아침은 다시는 없다”고 적었다. 1951년 처칠이 집권한다. 노동당은 다시 집권하는데 15년을 기다려야 했다. 다른 서유럽 국가들도 천주교와 기독교 민주당은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바탕으로 정상을 약속했고 좌파의 혁명적 기백은 퇴색했다.
돌턴은 영국의 “자신만만한 밝은 아침”의 종말을 애도하면서도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았다. 해방의 절정은 쇠멸하지만 밝았던 새 출발의 시기에 세워진 많은 제도까지 해체되지는 않았고 일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국과 다른 유럽국가의 기독민주당 정부는 전시 레지스탕스의 이상주의자들이 창조해낸 복지국가 기초를 부수려고 하지 않는다. 토리당도 노동당보다 더 많은 공공주택을 건설했다. 사회주의자들만큼 자유방임 경제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1970년대 서유럽 복지 시스템이나 영국의 복지 시스템이 훼손되고 일본과 남한의 경제가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하지만 통합된 유럽은 유럽인들이 다시 싸우는 전쟁은 방지할 것이다. 1945년의 이상은 성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