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후기] 감시와 처벌 :: 복종화를 넘어서는 정치적 실천을 위해! (0308) +11
삼월
/ 2018-03-09
/ 조회 2,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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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푸코가 1960년대부터 관심 가졌던 광기와 비정상성의 문제, 정신의학 영역의 연구를 통한 지식-권력 분석이 한 권의 책에 집약되어 있을 것 같은 예감입니다. 책의 첫 부분을 읽고 세미나를 마치고 나니,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푸코가 60년대와 70년대에 했던 강의록들을 읽은 것이 떠오릅니다. 신체를 포획하는 치밀한 정치적 전술에 대한 푸코의 연구가 완숙하면서도, 비교적 명확하게 설명된다는 느낌입니다. 《성의 역사》 1, 2, 3권에 대한 세미나를 어렵게 마치고 나서 저작을 역순으로 읽어나가고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에 읽고 이야기 나눈 제1부 제1장에서는 프랑스대혁명(1789) 이전과 혁명시기 동안의 형벌제도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등장했습니다. 주로 18세기에서 19세기의 이야기였는데요. 그 이야기들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푸코가 68혁명 당시의 변화와 고민들을 과거의 역사와 함께 녹여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역사를 쓰겠다는 푸코의 다짐을 여러 번 되새기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세미나 중간중간 지금 현실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운동’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일단 제1부 제1장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책의 처음에는 왕정시대 국왕시해범에 대한 처벌의 과정과 대혁명 이후 감옥의 일과시간표가 상세히 서술됩니다. 매우 상반된 두 묘사는 처벌방식의 두 가지 큰 변화를 보여줍니다. 가능한 떠들썩하고 잔인하게, 처벌을 스펙터클로 삼던 방식의 소멸과 처벌에서 육체적 고통을 제거하려는 노력. 대혁명 이후 처벌과점은 점점 은밀해지고, 신체의 고통을 줄이려고 하고, 교정과 치료를 목적으로 삼게 됩니다. 처벌 자체의 폭력성으로 인한 처벌행위에 대한 불쾌감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교정과 치료를 목적으로 삼다보니 정신, 영혼이라 부르는 부분에 대한 개입이 시작됩니다. 재판은 범죄행위 자체보다 범죄자의 성향, 도덕, 욕망이나 충동들을 더 문제 삼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행위 자체보다 성향, 도덕, 욕망이나 충동들이 그 사람을 더 설명해주는 방법으로 이해되기도 하고요. 인간에 대한 지식-권력은 이렇게 영역을 넓혀갑니다.
형벌 실행단계에서 푸코가 주목하는 법조항은 광기에 대한 것입니다. 프랑스혁명 시기에 만들어진 형법(1810)에서 광인에게 범죄는 증발됩니다. 광인은 치료 대상이지, 죄의 처벌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법 조항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채 광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정신감정을 통해 감경사유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발전됩니다. 이후에는 광기와 전혀 관계없이 모든 범죄에 광기와 비정상성의 가설을 도입하여, 범죄자를 교정과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감금을 통한 교정으로 사법과 행정의 역할은 분리되고, 재판 안에는 인간의 정신과 관련한 비법률적 요소들이 통합됩니다.
감금이 아무리 신체의 고통을 제거하려는 형벌이라고 해도, 감금은 구타나 식사 제한 등 신체에 고통을 주는 보충적 형벌들과 함께 행사될 수밖에 없습니다. 징벌의 적용지점이 범죄자의 영혼으로 변했다고 해도, 징벌은 신체에 대한 규율을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광인이나 범죄자는 자본의 입장에서 노동하기를 거부하는 자, 혹은 노동시키기에 부적합한 자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정과 치료라는 이름하에 감금된 채로 신체의 복종과 체력의 배분을 강제당합니다. 강제복종의 구조 속에 있을 때만 신체는 노동하는 신체가 되며, 사회에 유익한 신체로 인식됩니다. 푸코는 이 복종의 강제가 폭력이나 공포를 통해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폭력이나 공포가 아닌 신체의 ‘지식’과 체력의 통제가 존재하며, 이 지식과 통제가 신체의 정치적 기술을 이룹니다. 학교, 군대, 직장, 감옥 등에서 우리가 겪은 것들이 이 정치적 기술에 속할 것입니다.
푸코는 이 책에서 보여줄 연구의 일반원칙 몇 가지와, 권력에 대한 두 가지 가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연구의 일반원칙 중 중요한 두 가지는 처벌을 복합적 사회기능으로 파악할 것과, 징벌이 정치적 전술이라는 전망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권력에 대한 두 가지 가정 중 한 가지는 권력이 소유되기보다 행사되는 것이며, 권력관계의 그물망으로 존재하면서 사회심층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권력과 무관한 지식은 없으며, 권력이 지식을 창출한다는 사실입니다. 인식 주체, 인식 대상, 인식 양태는 모두가 권력-지식의 기본관계와 그 역사적 변화의 결과들입니다. 이에 따라 푸코는 처벌기술을 정치체의 역사 속에서 파악하려 합니다. 형벌의 실체는 법률이론의 결과보다 정치적 실천의 장으로 여겨야 합니다. 정신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사람들이 해방시키려 했던 인간은 복종화의 성과입니다.
푸코는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감옥이 신체에 대한 정치적 기술의 문제임을 알게 된 것이 현재를 통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세미나원들 역시 ‘미투운동’이라는 현재를 통해 푸코의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미투운동의 피해자들은 우리와 같은 복종화의 성과를 통해 나타난 이들이며, 권력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권력을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고 무력감을 느꼈던 듯합니다. 그들을 성욕의 대상이 아니라 권력관계 안에 있는 개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복종화를 통해 신체는 저항의 방식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미투운동의 전개과정은 피해자들과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권력의 효과를 다시 실감하게 합니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권력의 개념이 다시금 실제적이고 유용하게 인식됩니다. 법적으로 강간의 기준이 아주 좁게 적용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미투운동의 가해자들은 법적 처벌을 넘어선 사회적 처벌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나아가 새로운 입법의 필요성까지 제기될 것입니다. 형벌의 실체는 법률이론의 결과가 아닌 정치적 실천의 장이라는 푸코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미투운동을 중요한 실천이자 혁명의 과정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실천과 혁명의 과정을 눈여겨보면서 함께 《감시와 처벌》을 읽어나가고자 합니다.
댓글목록
돈키호테님의 댓글
돈키호테
푸코 세미나를 처음부터 참가하지 않아서 아무래도 생각이나 표현이 정제되지 않고 오류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많이 이해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푸코 철학의 단계를 크게 봐서 지식 권력 주체로 나누는데 지식문제를 검토하지 않고 바로 권력의 문제로 가는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 성의 역사에서 나타난 주체의 문제도 제가 아직 검토하기 전이라 다른 분들에 비해 더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좋은 문장들이 많지만 특별히 인상적인 문장은
......요컨데, 권력에 유익한 지식이든 불복종하는 지식이든간에 하나의 지식을 창출하는 것은 인식주체의 활동이 아니라 권력-지식의 상관관계이고, 그것을 가로지르고,그것이 조성되고,본래의 인식형태와 가능한 인식영역을 규정하는 그 과정과 싸움이다.
미셸푸코 감시와 처벌 제1부 신체형 1장 수형자의 신체중에서 인용
석관샘께서 말씀하신 지식의 순결성에 대한 부정이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아니 조금 슬프기까지 하네요^^
개인적으로 푸코의 지식에 대한 초기 저작 광기의 역사와 조금 어렵고 버겁기는 하지만 말과 사물도 조금 읽어봐야 겠어요.
다른 분들은 읽었지만 저는 참여하지 못했던 성의 역사1,2,3도 조금 개인적으로 봐야할것 같아요.될지 모르겠지만^^
미투운동을 정치적 실천의 장으로 또는 사회변화의 과정으로 봐야되는 점은 맞지만 저는 우선적으로 저를 포함해서 개인들이 조금 더 철저하게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고 개인적으로 실천하는 문제가 더 우선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철학을 왜 공부하느냐에 대한 답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공부하게 될 감시와 처벌 세미나와 연관되지 않을까 해서 인용해봅니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이해 가능성의 원리가 사물의 생성에서만 모색되고, 사물이 재현의 공간을 떠나 버리면서, 사물이 오그라듦에 따라, 이번에는 서양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기이하게도 인간은 순진한 시각으로 보자면 소크라테스 이래 가장 유구한 탐구의 대상으로 간주되지만, 아마 사물의 질서에 생겨난 어떤 균열, 어쨌든 지식의 영역에서 최근에 사물의 질서가 새롭게 배치되면서 모습을 드러낸 형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인본주의를 둘러싼 온갖 환상, 인간에 관한 반쯤 실증적이고 반쯤 철학적인 일반적 성찰로 이해된 ' 인간학 ' 의 온갖 안이함은 이로부터 움텄다. 그렇지만 인간은 최근의 발견물이자 출현한 지 두 세기도 채 안되는 형상이며 우리의 지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단순한 주름일 뿐이라고, 우리의 지식이 새로운 형태를 띠자마자 인간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위안과 깊은 안도감도 역시 이로부터 싹텄다.
미셸푸코 말과 사물중 서문에서 인용
돈키호테님의 댓글
돈키호테
........권력과 지식은 상호적으로 직접 관여한다는것, 그리고 지식의 영역과의 상호관계가 조성되지 않으면 권력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권력관계를 상정하거나 구성하지 않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미셸푸코 감시와 처벌 제1부 신체형 1장 수형자의 신체중에서 인용
지식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알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지식의 성격이 먼저 규명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의 앞으로의 과제일것 같습니다.
미투운동에 대해서 부연하자면 지식-권력의 관계망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식-권력의 관계망이 작동하는것은 나와 우리로부터 시작되기에 미투운동을 정치적 실천의 장으로 또는 사회변화의 과정으로 봐야되는 점은 맞지만, 이에 앞서서 개인의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영화가 연상되는데요, 외계생명체가 인간의 몸속에 들어가서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조종한다는 내용인데, 그러한 불안과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우리를 지켜나갈것인가요?
삼월님의 댓글
삼월
푸코세미나에 참여하자마자,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계시군요. 감사합니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상관성을 '지식-권력'이라는 이라는 표현을 통해 보여주고 있지요.
특히 <감시와 처벌> 등에서 보여주는 푸코의 권력 분석은, 권력이 논리적 전략을 넘어선 신체적 전략임을 보여줍니다.
처벌방법은 권력의 기술이며, 정치적 전술입니다. 처벌은 인간의 정신과 신체에 모두 작용합니다.
우리가 '미투운동'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미투운동의 피해자들은 단순히 성범죄의 피해자가 아니라, 권력관계 안에서 복종화된 신체를 갖게 된 이들일 수 있습니다.
미투운동이 확산되면서 그 복종화에 균열이 생기면, 성찰이나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체 자체가 권력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변화는 신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것입니다.
푸코가 지금 <감시와 처벌>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지금 우리의 형벌제도가 정치적 실천의 결과물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정치적 실천은 사회의 변화로 나타날 수 있으며, 정치적 실천의 주체가 국가기관과 같은 거대권력에 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적 실천은 실천과 동시에 인식의 변화를 낳습니다. 물론 그 인식은 권력관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누군가의 소유도 아니며, 관계망 속에서 각 개인들을 거점으로 삼습니다.
신체를 통해 길들여진 우리가 신체를 통해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미투운동'에서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세미나에서 활약하는 돈키호테님의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돈키호테님의 댓글
돈키호테
푸코는 과학이라는 용어보다는 지식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고 합니다.일상적인 담화와 고도의 과학사이에 존재하는 담론들중에서 특히 과학을 지향하고 있는 담론들을 의미한다고 하며 정신병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지식의 전형적인 예라고도 합니다. 감시와 처벌에서 죄수들의 교정을 위해 동원된 지식도 그러한 지식이 아닌가요?
지식들을 담론들이라고 할수 있을까요?구체적으로 어떻게 담론에서 권력과 욕구를 작동시키는 부분이 가능할까요?
제가 머물고 있는 인식의 지점이자 한계인것 같습니다.
다음 세미나에서는 조금 진전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신체를 통해 길들여진 우리가 신체를 통해 사유할수 있는 계기를 미투운동에서 찾자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실천의 방법들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 봐야 겠어요^^
감시와 처벌 세미나가 끝난후에는 조금 달라질수 있겠지요.
삼월님의 댓글
삼월
푸코는 지식이 권력과 함께 구성된다는 점에서 담론의 일부이며, 담론을 생산한다고 말합니다.
지식과 마찬가지로 담론 역시 구성되고 변화해가며, 다른 변화들을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모든 담론은 변화에 의해 생산되며, 또한 변화를 생산합니다. 푸코의 세계는 이처럼 역동적입니다. ㅎㅎ
지식을 우리가 습득해야 할 진리의 체계로 이해하면, 그 역동성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푸코가 형벌제도의 변화를 인간에 대한 학문이 낳은 결과로 보는 게 아니라,
정치적 실천의 결과로 보는 관점이 그 역동성을 잘 보여주지요.
푸코는 정치나 권력을 부정하거나 혐오하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은 모두 권력관계 안에 있고, 권력이 스쳐지나가는 거점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와 권력을 전략과 전술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실천과 사유의 문제 역시 따로 있지 않으며, 담론처럼 서로를 구성하고 생산합니다.
푸코가 말했듯, 권력에서 자유로운 지식은 없기에 인식 자체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합니다.
인식이 삶의 변화, 태도의 변화를 끌어내고, 변화가 다시 변화를 생산하는 것.
끊임없이 문제제기하고 질문하고 변화를 지켜보는 것. 푸코는 철학의 효용을 여기서 찾습니다.
일단은 아직 시간이 많으니 차근차근,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푸코의 책을 차분히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것이
돈키호테님의 공부에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사유는 인식의 한계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바로 거기가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돈키호테님의 댓글
돈키호테
지식을 우리가 습득해야 할 진리의 체계로 이해하면, 그 역동성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이 인상적인데요,
진리가 은폐하는 지점이 존재하는것 같습니다. 미셀푸코의 꼴레쥬 드 프랑스 취임 강연인 담론의 질서를 완역한 책인 담론의 질서에는 이러한 부분이 잘 드러나 있는것 같은데요 그중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풍요로움,다산성,부드러운 그리고 교활하게도 보편적인 힘이라 할수 있을 그러한 진리만이 나타나는 것이다.그리고 우리는 역으로 놀라운 배제 장치로서의 진리에의 의지를 비켜간다. 우리의 역사에서 진리가 금지를 정당화하고 광기를 정의하고자 하는 바로 그곳에서, 이 진리에의 의지를 드러내고 그를 진리에 대립시켜 다시 문제 삼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 니체로부터 아르또, 바따이유에 이르기까지의 이 모든 사람들----은 이제 우리에게 매일의 작업을 위한 기호들(물론 불손한 기호들)을 제공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미셀푸코 담론의 질서 제1부 담론의 질서중 인용
추신: 삼월님 항상 관심 가져주시고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김현님의 댓글
김현
성의 역사가 끝나고 감시와 처벌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나름의 기대가 있었습니다.
처음, 푸코를 읽어보겠다고 감시와 처벌을 읽었을 때에, 지금 생각해보면,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권력의 모델?과 너무나 달라 그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성의 역사를 읽어 가며, 맷집을 길러낸 덕인지, 아니면, 그래도 성의 역사 보다는, 친절하게 아닌 건 아니라고 써 주어서인지.... 이번 감시와 처벌은 보다 명확하게 읽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육체를 정신의 감옥으로 알고 있던 것과 다르게, 심지어 푸코는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 이라는 표현까지 쓰는데, 이제야 어렴풋 그 의미가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단지, 영혼을 묶어 두기 위한 신체라는 관념 말고, 신체를 규율하도록 하는 그 영혼 말이지요.
더 긴 얘기는 제가 후기 쓰는 타이밍에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ㅋㅋ
근데 위에 돈키호테님이 쓰신 미투 운동에서의 자기 성찰은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여하튼, 첫 세미나, 새로운 분들, 이어가는 분들 모두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
돈키호테님의 댓글
돈키호테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의 관계들이 사회의 심층속에 깊숙히 내려가 있다고 하고 국가와 시민들 사이에, 혹은 국가와 계급들의 경계 사이에 있는 관계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을때 또한 영원히 계속되는 전투이며, 권력은 소유되기 보다는 오히려 행사된다고 하며 지배계급이 획득하거나 보존하는 '특권'이 아니라,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인 효과이며, 피지배자의 입장을 표명하고 때로는 연장시켜주는 효과라고 했을때, 정치적 실천의 장으로써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과 방법이 무엇인지 조금 더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회가 변화한다는 것에서 무엇이 변화해야 하는가 변화의 대상과 주체는 무엇인가 궁금하기도 하구요, 어쩌면 개개인이 사유하는 방법과 일상성속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스스로 강해지는것도 하나의 방법인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성의 역사 부분을 읽어보지 못해서 아직 생각이 구체적이지는 못한것 같습니다.
세미나가 끝난뒤 다시 이야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돈키호테님의 댓글
돈키호테미투운동에 대해 부연하자면 자기성찰에서 중요한 점은 일상성속에서 내 스스로가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는지 항상 확인해봐야 한다는 점인것 같습니다.^^
너울님의 댓글
너울
모임을 앞두고 혹시나 들어와 봤더니 ^^벌써 의견을 많이 주고 받으셨군요. 1장의 디테일이 가물가물하던 가운데, 삼월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 정리가 되네요. 19세기 감옥의 죄수들에 대한 규율과 복종의 기록, 교정화 과정 등이 범죄학 같은 학문 지식체계로 만들어지고, 이러한 지식은 범죄 이전에 범죄자를 확정적으로 분류해 내고 배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권력입니다. 푸코에게 감옥이란 법학의 학문적 지식체계, 경제, 사회 문제, 문화, 정치권력까지 얽히고설킨 권력의 장이라는 점 아닐까요. 즉 교정의 대상인 수용자들의 범법 행위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간의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지식/권력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잠시 어리석은 상상을 해봅니다. 혹시 그들이, 권력 그 자체로 뭔가 생산이 가능하다는 푸코의 권력 개념을 떠올렸다면, 위계간 성폭력의 가해 행위를 그리 오랫동안 벌일 수 있었을까. 미투운동 담론이 며칠 사이 난데없는 공작설에 휘둘리고(mb가 검찰에 출두하는 날에 딱 맞춰 안씨의 2번째 피해자 고발을 왜 하냐구?) 마구잡이 폭로는 죄를 물을 수도, 피곤하기만 하니 권력형만 따로 구분하자는 둥 방향을 잃은 듯도 합니다. 한국에 푸코가 있다면 이런 가당치않은 피해의식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역사적 조건을 무엇으로 규정지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푸코가 감옥을 권력의 장으로 보았고,
감옥수용자들의 문제를 사회구성원 간의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지식-권력의 문제로 보았다는
너울님의 정리에 다시 한번 공감합니다. 저도 가물가물했던 기억이 다시 살아나네요.
또 아래에 너울님이 지적한 문제는 상상이라기보다 걱정, 우려에 가까울 것 같은데요.
푸코라면 안타깝지만, 그 생성과 변화의 지점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려고 노력했을 듯 합니다.
위의 댓글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저는 '미투운동'이 실천인 동시에 우리가 권력의 효과를 사유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고 예상합니다.
권력관계 안에서 복종화된 신체의 문제, 그리고 그 신체의 권리를 되찾는 문제는
자신이 행사해야만 할 권력(예를 들면, 복종하지 않을 신체의 권리 같은 것이랄까요?)을 깨닫는 데서 시작될 테니까요.
저는 푸코가 결국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 권력의 추악함이 아니라
권력관계 안에서 각자가 어떻게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학의 문제라고 보고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대항의 윤리학, 새로운 주체의 윤리학을 사유해야 한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