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철학사 발제] 2장 자학시대 통론, 3장 공자 이전과 당시의 종교, 철학사상 :: 0314(수)
김현
/ 20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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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상) 2, 3장 발제 2018-03-14 (수) 발제자 : 현
제2장 자학시대 통론
1. 자학시대의 개시
중국문화는 주(周)에 이르러 규모를 갖추었고, 그 문화(文)와 전장제도(禮)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공자도 스스로 주를 추종한다고 공언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 이전, 개인 저술의 사례는 없었다고 장학성은 말한다.
고대 귀족정치에서는 정치경제상의 통치계급이 곧 지식계급이었다. 통치계급은 책을 저술할 시간도 적은데다 이미 정권을 잡고 있기 때문에 그 정치의 장에서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따로 책을 저술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서론에서 언급한대로, 책을 저술하는 일은 부득이한 상황에서였다. 공자는 직접 저술하지도 않았지만, 벼슬이나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서 강학만 할 때가 있었는데, 이는 처음 있는 경우였다. 공자 본인이 친필로 쓴 것은 아니지만, 제자들이 기록한 것을 보면 체계적인 사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이유로 공자는 중국철학사에서 그 시작의 위치, 그리고 후세에까지 유일한 스승으로 표상되고 숭앙되었다.
2. 자학시대 철학 발달의 원인
자학시대는 중국철학사에서 그 학파의 수, 주제의 다양함과 광범함 등에서 제일이었는데 이런 특수한 정황에는 그 이유가 있다.
고대 사회는 귀족정치의 사회로, 이들은 모두 정치상 관직을 세습했는데, 사회조직에 있어서도 각종 계급이 있어야 했다. 후에 귀족정치가 파괴되자 고대의 정치, 사회 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조익에 따르면, 진한시대 무렵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관직 세습의 답습으로 온갖 폐단이 누적되고,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군주, 주요 호족들 간의 서로에 대한 시해 등이 지속되자, 하류 계층부터 자신의 힘만으로 일구어내려는 사람들이 일어나 통일을 이룩하려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군주로 인정보다는 혹독하여 여전히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한 고조가 일어나 다시 천하를 통일했고, 이때에는 공을 세워 관직을 얻기도 했으나 시운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한 대립 시기, 공보다 6국의 후예들을 내세웠는데, 여전히 봉건제도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6국이 임금이 모두 멸망하고, 모두 지위를 상실하고 시간이 지나서는 세습제도는 사라지고 과거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세상이 왔다.
귀족정치 붕괴의 조짐은, 이미 춘추시대에 있어왔다. 서인이 관리로 상승하거나, 공자처럼 귀족이 서민으로 하강하기도 했지만, 한 고조에 이르러서는 필부가 천자가 된 셈이니, 정치제도와 사회조직에 걸쳐 큰 변동이 있었다.
정전제도는 귀족정치와 연계된 경제제도로, 모든 땅이 왕의 것이어서 농부들은 토지에 딸린 노예라고도 하는 이런 인식은, 계급이 정치적, 사회적 의미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유효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후 정전을 파괴하고 상공인이 늘어났는데, 『한서』는 왕제가 멸절하고 예법이 무너진 결과라고 설명했지만, 경제사관적 관점에서 보자면, 농노와 상인들의 경제력이 증대했기 때문에 귀족정치가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봉록 세습과 정전제가 파괴되고, 서민이 해방되어 부호가 된 이러한 과정 역시 고대 경제제도에 있어서의 변동이었다.
정치, 사회, 경제적인 격변은 춘추시대에 태동하여 한나라 중엽에 완성되었다. 이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큰 전환기였고,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런 격변기에는 예전을 향수하는 구제도의 옹호자들이 나타나는데, 공자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구제도를 옹호하려면 그에 타당한 이론상의 근거를 부여해야 했는데, 이 작업의 실마리를 공자가 열었고, 유가학파는 이를 계승했다. 물론, 전환기의 상황에서 유가가 옹호한다고 그 변화가 멈추지 않았고, 유가 외에 다른 선비들의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다. 구제도는 무너져 가고, 신제도가 수립되지 않은 과도기의 상황에서 의견의 갈림은 당연했고, 그렇기에 구제도를 옹호하는 주장의 근거는 더욱 요구되었다. 이에 이론을 중시하는 습관이 생겼고, 이것은 곧 철학의 시작이었다.
‘고대철학의 발달은 당시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서 비롯되었는데, 사상과 언론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가 하나의 커다란 해방의 시대이자 과도기였기 때문이다.’(37)
3. 자학시대의 종결
흔히 고대철학의 종결을 전국시대 말기로 생각한다. 진시황의 분서에 있어서는 대체로 야만의 시대, 학설의 소멸을 떠올리지만, 관청의 서적은 불사르지 않았고, 오히려 학설의 전수에 있어 사적인 것은 금했지만 학살의 말살 의도는 아니었다. 물론, 학설을 통일하려던 의도 때문에 획일적이고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 속에서 학술의 발전이 침체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진의 멸망이 빠르게 진행되었으므로 크게 영향이 있지는 않았다. 한(漢)나라 초에도 여러 학파의 학설은 번성했다. 그러다 한 무제 초기에 동중서의 대책문에서 공자를 찬양하고 백가를 배척했다. 이후 봉록의 길로 유학이 번성하고 춘추시대 이후 자유로운 분위기를 없어졌다. 동중서의 주장으로 자학시대는 종결되고, 경학시대가 시작되었다. 음양오행가의 사상은 유가와 결합하여 동중서에 체계적으로 표현됐는데, 이때부터 유가는 유교로 변했다. 후에(하권 내용), 고문학이 출현하면서 공자는 다시 신에서 인간으로, 유교는 유가로 회복되었다.
4. 고대 대과도기의 종결
본래 한 무제와 동중서의 사상통일 정책은 진시황과 이사의 정책이었다. 진시황은 실패했지만, 한 무제는 어떻게 성공했는가하면, 춘추시대 때 시작된 정치, 사회, 경제적 변동이 한나라 중엽에 이르러서는 그 정세가 사라져 점차로 정치했다. 기존의 구제도가 붕괴하며 사상과 언론은 자유로워지다가 진나라가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평정하자 표면상 변동 국면이 끝났다. 반면, 실질적으로는 귀족이 잔존하여 세력을 유지하다가 평민 출신의 한 고조가 평정했는데, 이때 비록 봉건제도가 있었지만, 정치적 의미만 있었을 뿐, 경제적 의미는 없었다. 이렇게 한나라 중엽에 들어서는 신질서에서 안정되었다.
5. 고대의 저술체재
서론에서 말했듯, 각 시대의 자료는 그 시대에, 누군가의 말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고대철학에 있어서는 곤란이 따른다. 위서가 아니라 진서라도, 어느 부분이 실제 그 저술가의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본래 그들은 자기들의 도를 아무도 능가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려 했으므로 말과 글의 출처를 사사로이 가린 적이 없었다.……한 사상가의 언행을 편집할 때 모두가 반드시 그 자신이 논술할 것일 필요는 없었다.……저마다 대도의 한 측면을 획득하여,……근거가 있고 말은 이치가 섰으므로, 이윽고 그들의 학술은 부연되고 추종자들에게 전수되었던 것이다.’(43) 라고 장학성은 고대의 저술체재를 설명한다.
과거의 사람들은 역사 관념, 저작자 관념에 밝지 않았기 때문에 '자(子)'가 붙은 저술들이 꼭 그 한 사람이 손수 쓴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리하여 맨 먼저 저술한 부분과 나중에 덧붙인 부분을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현재는 분간할 수 없다. 따라서 전국시대의 이런 책들은 그 일파의 책으로 보고, 저마다의 사상체계가 있었다고 보아야지, 그 한 사람의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
고대철학은 이런 제자의 학 안에 존재하며, 자학시대라고 할 수 있다. 사마담은 음양, 유, 묵, 명, 법, 도덕의 6가로 나누었고, 가(家)라고 한 이유는 이들 모두 개인적으로 강학했기 때문이다. 유흠은 이 외 농, 종횡, 잡, 소설을 더해 10가로 보았지만, 때로 철학과 무관한 것도 있으므로, 앞으로의 내용은 철학과 관계있는 것을 발생순서에 따라 논한다.
제3장 공자 이전과 당시의 종교, 철학 사상
공자 이전은 개인 저작이 없으므로, 『시』, 『서』, 『좌전』, 『국어』에 나오는 말들을 통해, 공자 이전의 종교, 철학사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귀신
‘원시시대 인간의 인식이 처음 열릴 즈음, 우주간 사물은 신이 통치하고 있다고 여겼다.’(47) 인용된 『국어』를 보면, 신경들이 많았고, 그 신령들은 인격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종교와 같이 이런 신령들을 믿고 있었는데, 하(夏), 상(商) 이후에 ‘하늘(天)’과 ‘하느님(帝)’의 관념이 생겨 일신론이 세력을 얻는 듯했지만, 다신론이 소멸하지는 않았다. 『좌전』과 『국어』에서는 하늘 뿐 아니라 신령도 많이 언급하고 있다. 인용된 저서들에서 언급되는 ‘백신’이란 많은 신령을 뜻하고, 하느님과 병칭된 즉, 같은 것이 아니었다. 고대에는 이러한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런 귀신에 대한 신앙은 점차 쇠퇴했다.
2. 술수
‘고대인은 대체로 우주간 사물들을 인간사와 상호 영향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53) 각종 술수(술법)로 현상들을 관찰하고 인간의 화복을 예측했다. 술수는 명당에 소속된 태사와 태복에 의해 관장되었는데, 이 술수는 여섯 가지로 분류된다.(아래 여섯 가지 모두 「예문지」)
첫째, 천문으로, 오성(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과 일월의 운행을 계측하여 길흉의 조짐을 포착했다.
둘째, 역보(책력)으로, 사계절의 질서를 정하고, 춘분, 추분, 하지, 동지의 절기를 정하고, 일월과 오성의 주기를 추적하여, 한서와 성쇠의 실상을 고찰하는 것인데, 운명을 간파하는 성인의 도술이다.
셋째, 오행(수, 화, 목, 금, 토)은 오상(인, 의, 예, 지, 신)의 물질적인 기운이다.
넷째, 시구(시초점과 거북점)인데, 군자가 무언가 도모할 일이 생길 때, 말로써 시초(蓍草)에 물어보면, 그 길흉을 판정하고, 인민의 분발을 촉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다섯째, 잡점은 만사의 조짐을 포착해 선악의 징후를 점치는 술수이다. 그 중 해몽점이 가장 중요한데, 주나라에는 이를 전담하는 관직이 있었다.
여섯째, 형상법으로, 영토의 지세를 바탕으로 건물을 설립하고, 생김새를 유형화하여 길흉을 탐색하는 것이다.
제시된 인용문에 따르면, 사조, 비조, 자신, 신수, 장홍, 사묵 등은 자연 현상, 혹은 ‘하늘의 이치’를 바탕으로 인간사를 예측했다. ‘천문’, ‘역보’, ‘오행’ 등은 모두 하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 것으로, 하늘의 이치와 인간사는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 이후에 등장하는 음양오행가는 이런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3. 하늘
‘백신(百神) 외, 하늘(天)과 하느님(帝)이 있다.’(60) 각 저서에서 ‘하늘(天)과 제(帝)를 언급한 곳이 매우 많은데, 대부분 인격적 하느님(상제)을 지칭한다.’(61) 여기서 상제란, 지고무상의 권위자로 여러 신경이 그에 복종했다. 이는 예부터 존재하던 중국의 일반 평민의 종교적 신앙이다.
중국 문자에서 하늘(天)은 다섯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땅에 있어서 상대적 하늘(물질지천), 둘째, 황천상제로서의 인격적 하늘(주재지천), 셋째, 우리 삶에서 어찌할 수 없는 대상(운명지천), 넷째, 자연의 운행을 지칭한 하늘(자연지천), 마지막으로, 우주 최고의 원리를 지칭하는 하늘(의리지천)으로, 앞서 말한 네 저서에 나오는 하늘은, 물질적 하늘을 지칭할 때를 제외하면, 모두 주재지천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논어』에서의 하늘도 마찬가지이다.
4. 일부 사람들의 개명적인 사상
‘그러나 춘추시대에 비교적 진보적인 일부 선비들이 점차 귀신, 천도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62) 귀신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점차 ‘공경하되 멀리하는 태도’를 취하려 했다.
‘이밖에 매우 이른 시기에 이미 음양의 학설로써 우주간의 현상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 것도 있었다.’(63) 『국어』에 등장하는 백양보는 양기와 음기로 지진을 설명하려 했고, 『좌전』에 등장하는 숙흥은 자연현상을 음양으로 이야기하며 길흉의 원천은 다만 사람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도 했다. 『국어』에 나오는 범여 또한, 우주현상을 음양으로 해석하였다. 범여가 말한 하늘은 노자와 상당히 비슷하여 노자학의 효시라고도 추정한다.
5. 인간의 발견
처음에는 각종 사회 제도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하느님(天帝)이 만든 것으로 여겼다. 『서』에서는 하늘의 법도가 오법도를 실현하도록 했다고 하며, 오복과 오형이 하늘에서 비롯하여 시행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시』에서 역시, 하늘이 인간을 낳도록 할 때에 그 법칙이 있게 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하느님의 법도라 함은, 예교와 제도로, 고대인들은 고대 그리스인들도 유사하게 대부분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각종 제도에 점차 인본주의적 해석을 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 제도는 인간이 만들고 인간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정 환공 때의 사백은, 같은 것에 같은 것을 보태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하지만, ‘다른 것에 다른 것을 조합하는 것’이 화합이라고 하며, 그에 맞는 위계를 이야기했고, 이런 ‘화(화합)’와 ‘동(동일)’의 차이 제시를 통해 제도가 풍부하고 다양해야 하는 까닭을 설명하려 했다.
안자 역시, 화합과 뇌동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단지 임금의 말에 똑같이 말하며 따르는 것은, 그릇됨이나 허물을 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며, 오히려 그릇됨을 지적함으로써 옳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화합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임금의 각각의 행동의 양식들이 어떤 덕목과 상징을 천명한 것인지에 대해서 서술함으로써 예악과 정치조직의 기원, 기능에 대해서도 설명하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임금이 예악을 사용하는 이유는 ‘백관이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율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숙향은 자산에게 써 준 글에서, 형법 공포를 반대했는데, 좋은 왕은 사건의 경중을 헤아려 그것에 따라 단죄하고, 신뢰와 자애로써 백성들을 보살피며, 충성을 가르치고, 선행을 장려하는 등의 일을 시행했지, 만일 법률이 생긴다면 통치자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지고, 쟁론의 심리가 발생할 것이라는, 일종의 인본주의적 해석을 부여하고 있다. 자태숙이란 사람도 예악과 형벌의 효옹을 백성이 혼란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면서, 그 기원을 천지를 모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관역보라는 사람은 또한, 제사에 대해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한 사람인데, 그에 따르면, 제사는 반드시 신령이 강림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도, 그 기회를 빌어 친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경건한 마음을 훈련시키는 것, ‘인민을 굳건히 단속하는’ 데 있다.
『국어』에 등장하는 유하혜는, 장문중이 날아든 이상한 새에 제사를 지내게 하자 반대했는데, 그 이유로 신중하게 제사를 제정하여 국가의 전례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보은의 도리를 제사의 근거로 삼아야 하는 것이므로, 제사는 귀신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각종 제도가 인본주의적으로 해석되면서, 임금의 존재도 신성불가침적 존엄을 상실했는데, 『국어』나 『좌전』에서와 같이, 임금이 시해당한 것에 대해 신하가 옳다고 하는 것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견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으로, 이런 인물들의 근본사상은 인본주의적 경향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