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 후기] 오리엔탈리즘1부 3~4장 :: 0227(화) +2
임마
/ 2018-03-01
/ 조회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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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 인상에 남습니다. 푸코는 무척 재미있지만 푸코적 방법론을 차용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힌 자들(푸코디언) 글 치고 성공적인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고. 푸코의 흔적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사이드의 경우 비교적 성공적인 푸코디언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만(특히 서설은 정말 압권인 것 같습니다), 부족한 점도 많이 보입니다. 비판하기에 앞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저자의 입장에서 우호적으로 이해해보고(friendly reading), 그러고 나서야 비판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지만, 우호적 독해를 건너뛰고 비판만 해대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지만, 이런 우려는 세미나에 참여해주신 다른 분들의 견제를 받아 다행히도 저도 많이 배우고 괜찮은 세미나 시간이 되었던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3~4장은 책의 전반부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의 기원과 전개양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3장은 서양의 동양 지배, 진출의 기점으로 삼는 나폴레옹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오리엔탈리즘 시도들과 그 이후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서술되고 있고, 4장은 3장에서 다룬 이후 시기의 오리엔탈리즘과, 2차대전 이후 세계 각지의 해방운동으로 오리엔탈리즘이 위기를 맞이한 과정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이 결과적으로 상실시킨, 무시한, 동양의 인간론적 가치에 대해 제2부에서 다뤄질 예정이며 근대 오리엔탈리즘이 낳는 파단에 대한 대안 혹은 해결책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기대해봅니다.
세미나는 발제자가 던진 큰 질문 : 나폴레옹 이전의 오리엔탈리즘과 나폴레옹 이후의 오리엔탈리즘은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을 기준으로 열띤 토론이 진행됐습니다. 같다, 다르다 는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 토론의 과정에서 각자 오리엔탈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고 깊어졌다고 느꼈습니다. 발제자가 생각 없이 던진 과한 표현들(사이드가 나폴레옹 이전의 오리엔탈리즘과 이후의 오리엔탈리즘을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라는 등)은 취소하기로 했고, 그럼에도 나폴레옹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같은지 다른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는 데까지는 합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앞 부분을 다시 읽어봐야 겠다는 의견도 나왔던 것 같습니다.
발제자는 과도하게 텍스트 의존적이며 저자의 논리적 완결성과 일관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자칫 현실과 너무 멀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는 오라클, 현, 미로, 사랑님 등 다른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중화될 수 있었습니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 댓글 창 등에서 흔히 보이는 '선진국' 주장, 선매매와 성매춘 담론을 둘러싼 낙인과 권력의 효과, 최근 전개되는 미투 운동 등은 오리엔탈리즘의 포괄적인 적용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들입니다. 권력 관계가 작용할 수 있는 모든 한 쌍의 두 주체와 객체는 오리엔탈리즘으로 묘사, 설명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음 주 부터는 학생의 탈을 쓴 저를 위해 세미나 시간을 바꾸게 되었고, 또 마지막 2월을 기념하며, 오랜만에 만난 미로님을 포함한 세미나원들의 만족과 단합을 위한 회식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즐거운 시간 보냈고 언젠가 회장님이 만들어주실 칵테일을 기대하며 후기를 마칩니다. 좋은 선례를 남기겠다 선언해놓고 성공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김현님의 댓글
김현
먼저, 꼼꼼하고 고민과 비판의 지점에서 발제문을 써주셔서 세미나 시간에 더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후기도 엄청 신속하고 세미나 시간에 오고 간 이야기의 핵심을 잘 짚어주셨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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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시간에 큰 주제로 자리잡았던 나폴레옹 이전과 이후에 대해 우선 남겨볼까 합니다.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1부 1,2장에 있던 내용에서 다시 훑고 보니, 저자가 생각하는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방법론적? 변곡점이 나폴레옹인 듯합니다. 3,4장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보니, 1,2장에 이런 연대기적 개관이 분명 있었음에도, 다시 읽어보니 너무 새롭더군요. ^^;;;
다시 되짚어 보자면, 오라클님의 1,2장 발제문에서 잘 정리되어 있듯이,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존재형식 중 첫번째는, 경험적이지 않은 학문적 의미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출발한 것,
그리고 인식론적인 면에서 어떤 공통점이 존재한다고는 해도, 나폴레옹 점령 이후의 오리엔탈리즘은 어쨌거나 경험적 세계와 텍스트 의존적 성격이 부딪히면서도, 다시금 텍스트에 기반한 인식이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그 이전의 서양의 무력에 의거한 침략이라기 보다도 학문적인 인원을 투입한 것, 그 외에도, 현실의 동양과 마주한 점 등의 면면들은, 나폴레옹 이전의 오리엔탈리즘 전개 양상과는 확연하게 다른 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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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님이 후기에도 남겨주셨듯이, 저 역시도 저자가 오리엔탈리즘이란 지적 권위를 해부하는 과정에서 푸코의 흔적을 많이 느낍니다. 이전 시간 오라클님의 후기, 삼월님의 댓글에 저도 썻지만, 이번 시간에 본 내용이라 여기에 다시 그 내용을 소환해볼까 합니다.
'어떤 현실에 관한 지식을 포함하고자 의도한 텍스트, 그리고 내가 위에서 서술한 것과 유사한 상황에서 생긴 텍스트는 그렇게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는 전문적 서술이며, 학자나 연구기관 또는 정부가 그것에 권위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그 텍스트는 현실적 성공이 보증하는 이상의 큰 위신을 갖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텍스트가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서술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 현실 자체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지식과 현실이란, 일종의 전통, 즉 미셸 푸코가 담론이라고 부른 것을 낳게 된다. 그리고 담론의 내부에서 생긴 텍스트의 내용을 결정하는 본질은, 특정 작가의 독창성이 아니라 실은 그러한 담론의 실체적 존재나 그 무게이다.'(174)
곳곳에서 푸코의 그림자가 발견되는 것 같은데, 여기서 특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도 이 부분을 보면서 <성의 역사>에서 봐 왔던 '성' 같은 게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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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의존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사랑님이 언급해주신 것과 같이, 성매매에 대한 연구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경험적이거나, 혹은 텍스트에 의존한 연구가 될 수 있는 여지가 많고, 그런만큼, 본질과 멀어질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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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이 이렇게 학문 속에서 담론 속에서 동일자의 인식 속에서 확장되어 가는 가운데,
유럽이 자신들의 우월한 문화를 전파해주러 왔는데, 그 가운데 저항하려는 동양이 발생할 때,
4장의 제목처럼, 오리엔탈리즘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로는 분명, 그들은 동양과 경험적으로 조우하지만, 텍스트 속에서 확고해지고 박제된(주로 학문이나 소설 등에 의한) 동양만이 동양인 셈이지요. 그들의 동양이란, 너무나 확고해진 나머지, 그들의 인식과 다른 동양에 대해, '이것은 동양이 아닌 것'과 같은 인지부조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명명된 동양 속에서, 담론의 힘에 의해, 동양인은 유럽인도 아니지만, 동양인도 아니게 되며 소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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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후기를 통해 저는 회장님이 되었는데..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겠습니다. ㅎㅎㅎ
저도 셈나 끝나고 마련한 자리에서 정말 즐거웠고요, 각자의 문제의식을 통해, 세미나가 더욱 풍성해지고 열기를 띠는 거 같아 기쁩니다. 임마님의 비판적 읽기 역시 세미나에 활기를 더하고요.
후기 고맙습니다! ^ㅅ^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지난 세미나에서 가장 흥로웠던 것은 '동양의 침묵과 '오리엔탈리즘 담론'의 관계입니다.
서양이 동양을 유린하는 가운데, 동양이 침묵했던 이면에는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있었습니다.
'우월한 서양 - 열등한 동양'이라는 오리엔탈리즘 담론은, 서양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열등한 신체'를 침묵하게 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수요집회가 벌써 26년에 이르지만,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까지 50년 동안 침묵 속에 있었습니다.
'화냥년, 부끄러운 역사'라는 위안부 담론은, 피해자들을 민족의 수치로 만들었고 '수치스런 신체'를 50년간 침묵하게 했습니다.
대한광복회, 독립유공자들은 위안부를 민족의 수치로 간주하고, 광복의 역사, 독립의 역사에서 삭제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MeeToo의 피해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까지에는 8년, 10년 혹은 그 이상 침묵의 시간이 존재했습니다.
"네 탓도 있다. 너만 유별나게 그러냐?"는 성폭행 담론은, 피해자 책임으로 몰고가 '정숙하지 못한 신체'를 침묵하게 했습니다.
가해자 권력과 대중적 담론의 암묵적 협력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안으로 향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담론은 살아움직이는 구성체로서 현실을 창조해냅니다.
문제는 이들 신체로 하여금 목소리를 앗아가고 침묵하게 했던 '담론의 배치'입니다.
이제 이들이 침묵을 깨고 말하게 된 것은 '담론의 배치'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말할 수 없는 존재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지배담론과 대결하여 대항담론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담론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권력의지'가 되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