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후기] 무덤 ::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일의 어려움에 대하여 0307 +5
삼월
/ 2018-03-08
/ 조회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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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나는 이번 시간에 읽고 이야기 나눈 대부분의 글들이 좋았다. 풍자와 해학이 있고, 날카로운 표현들이 있고, 속내를 드러내 공감하게 만드는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루쉰의 이번 글들에는 싸움이 있다. 그 싸움은 혁명가인 척 하다 변절해서 과거의 동료들을 공격하는 이와의 싸움이다. 그리고 자꾸만 옛사람들의 가증스런 사상을 공부해 좋은 사람인 척 하려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루쉰을 스쳐가는 장자와 니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상 《무덤》의 마지막 글인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를 보면, ‘물에 빠진 개’를 때려야 하는 이유가 상세하게 설명된다. ‘물에 빠진 개’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혹은 잘못을 한 뒤 매를 맞고 물에 빠졌다. 물에 빠진 개가 허우적댈 때, 사람들은 측은하게 여긴다. 개는 동정을 구걸하고, 바로 이때 사람들은 의협심에 빠져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 좋은 사람은 다음날 다시 개에게 물린다. 이것이 당시 루쉰이 처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질문해 볼 수 있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일이 이렇게 길고 상세한 이유를 들어 논증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인가? 그렇다. 어려운 일이다. 사람을 보고 짖어대는 사나운 개를 때리는 일은 쉽다. 정당방위에 해당하므로 정당성 충족은 물론,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하여 개에게 대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일은 어렵다. 발을 들었다가도 멈칫 하게 되고, 잔인하고 편협한 사람이라 욕을 먹을까 걱정도 된다.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관대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듣는다. 그 개가 다음날 사람을 물어 죽인다고 하여도.
사람들은 늘 싸움에서 선과 악의 대결을 상정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선량한 피해자와 악독한 가해자의 구도는 이렇게 나타난다. 그러나 명백히 따져보자면, 선량한 피해자와 악독한 가해자는 거의 없다. 고만고만한 피해자와 고만고만한 가해자가 있을 뿐이다. 고만고만한 싸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그 싸움의 끝이 모두 무덤이라는 사실을 루쉰은 분명하게 알았다. 모든 것은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하고 있다. 그 지나감 속에서 싸움의 이유가, 명분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어차피 결국엔 모두 죽으니 싸움이란 쓸데없고,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매한가지니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자는 말을 루쉰이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루쉰은 끝나지 않는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몇 개의 무덤들을 만들며 나아가고 있다. 그 무덤은 자신이 싸워온 흔적, 자신이 죽인 것들의 무덤이다. ‘아프지도 않는데, 신음하고 있다’며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면직시킨 장스자오에게 루쉰은 분명히 말한다. 아프지 않다면, 신음할 필요가 없다. 아프기 때문에 신음을 하는 것이다. 싸워야 할 일이 있다면 싸워야 한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물에 빠진 개’도 때려야 한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 같은 건 버려야 한다. 자신이 욕하는 옛사람들의 가증스런 사상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아야 하고, 자신 역시 전복되어야 할 무엇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싸움을 해 나가는 길에 마치 이정표처럼 여러 무덤들을 남긴다. 그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 바로 자신의 무덤이다.
댓글목록
김현님의 댓글
김현
루쉰 세미나 자료 보며 물에 빠진 개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이런 이야기였군요.
너무 매력적입니다. ㅜㅅㅜ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고만고만한 싸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이 고만고만한 삶 속에서 어떻게 분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되묻게 되네요. 루쉰의 글을 반복해서 읽고 다시 고민하고, 질문하고... 그렇습니다. ^^
연두님의 댓글
연두
와, 루쉰 정말 매혹적.
싸워야 할 일이 있다면 싸워야 하고,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것과 같이 해야 하는 거군요.
자신 역시 전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고, 자신이 죽인 것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은
정말 니체를 떠올리게 되는 부분이네요.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그렇게 싸움을 해 나가는 길에 이정표처럼 여러 무덤을 남긴다."
무덤을 남기고, 다시 그 위를 사람들이 지나가게 하여 평평하게 만들고, 또 다시 무덤을 만들고......
내 안에 이정표로 삼을 무덤들은 어디에 있었는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루신에게 그 이정표는 어쩌면 가장 비루하고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바라보는 냉혹한 자각에서,
그로부터 발현되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 학생이 와서 내 책을 사고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내 손에 내려놓았는데, 그 돈에는 여전히 체온이 묻어 있었다.
이 체온은 곧바로 내 마음에 낙인을 찍어 놓아 지금도 글을 쓰려고 할때면 항상 내가 이러한 청년들을 독살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어 머뭇거리며 붓을 대지 못한다." (414)
이 구절에서 뭉클해졌던 것은 낮게 몸을 낮추고 전해진 체온을 아프게 느꼈을 루신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체온'에 대한 감각은 결국에는 무덤으로 나아갈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Me Too 운동의 혁명적 흐름들 속에서 이러한 미세하지만 확실한 감각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거칠게 감각하거나 무감각한 상태에서 은폐되는 폭력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루신이 이러한 무감각한 마비의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깨어나 맞닥드린 현실이 지옥일지라도 맨 정신으로 적과 싸워야 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에 빠진 개'는 우리를 다시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무감각과 무관심, 무지와 복종'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에 빠진 개라도 두들겨 패야 하는 게 아니라,
물에 빠져 있으니 두들겨 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연두님의 댓글
연두
가장 비루하고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바라보는 냉혹한 자각이라니...
루쉰을 읽는 데에는 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