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집』 (「KS군에게 답함」~후기 )
손미경
/ 2018-10-30
/ 조회 1,061
관련링크
본문
『화개집』 (「KS군에게 답함」~후기 )
루쉰 세미나 손미경 2018.10.31.
들어가는 말
1925년은 중국현대사에서 중국 혁명의 새로운 질서가 태동한 역동적인 해
1925.3.12. 쑨원 사망으로 국민당 우파가 득세하여 국공합작이 위기를 맞음
1925.5.30. 5.30 운동은 노동자 계급이 중국혁명의 주체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집 단으로 성장한 것을 보여주는 사건
1925.5.7 베이징중국여자사범대학 (이하 여사대 ) 사건이 본격 시작
1924년 가을 베이징 여사대 학생들은 교장 양인위에 반대하는 시위
1925년 1월 학생대표는 교육부를 찾아가 양인위 교장 취임을 철해 해줄 것을 요구
4월 교육총장 장스자오는 ‘학풍정돈’을 내세워 양인위에 대한 지지 표명
5월 7일 양인위는 명사초청 강연회를 하려고 했으나 연단에 오른 그녀를 학생들이 야유를 퍼부어 물러가게 함. 그날 오후 양인위는 西安 호텔에 몇 명의 교원을 소집 하여 학생들에 대한 대처 방안을 논의
1925.5.9. 평의회 이름으로 여사대 자치회 임원 6명을 제적
1925.8.10. 장스자오가 여사대를 해산하라고 명령
1925.8.18. 이에 반발한 베이징 평의회는 회의를 소집하여 교육부와 관계를 단절 한다는 의안 을 통과시키고 독립 선포
1925.8.19. 무장경찰이 여사대 해산
1925.11.30. 여사대가 스푸마 거리의 원래 학교로 돌아옴
1925.12.14. 교육계 공리 유지회 (천시잉, 완스제, 옌수탕 등)를 조직하여 여자대학을 후원 하고 여사대 부활을 반대
5.30 운동을 계기로 5.4 운동을 정점으로 한 신문화운동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이를 주도했던 지식인들도 분화하여 다양한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 그룹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공산당 기관지 化하여 정치적 색깔이 짙어진 기존의 『신청년』을 대신하여 새로운 잡지를 간행하여 당시의 문화운동을 이끌었다. 대표적인 잡지가 『위쓰』(1924.11월 창간)와 『현대평론』(1924.12월 창간) 이다. 이 두 잡지는 기본적으로 반제, 반봉건 및 반군벌의 성격을 띠면서도 사인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보여준다.
-본문‘『화개집』에 대하여’-
1925년의 루쉰은 출판 문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위쓰』의 창간 및 편집에도 깊이 간여 하였고 『징바오』와 『국민신보』에서 발행하는 잡지에도 적극 간여 하였다.
『징바오』 : 1918.10월 창간. 언론 자유를 위해 베이양 군벌 정권과 맞서는 진보적 성향의 신 문. 부간으로 「민중문예주간」(1924.12 창간)과 『망위안』(1925.4. 창간)을 창간.
루쉰은 『망위안』의 편집을 맡았다.
『국민신보』 : 1925.8월 창간. 국민당 좌파가 발행한 혁명적 경향의 신문
부간으로 『국민신보부간(12월 창간)』 있으며 루쉰이 주편을 맡았다.
벽에 부딪혀 깨지더라도
베이징 여사대 사건을 통해 1925년 시작된 현대평론파들과 시작된 논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으며 『화개집』은 이 사건을 계기로 쓰여진 글들의 모음이다.
이때의 글은 현재 진행 중인 특정한 사안 혹은 특정한 인물과 대척적인 지점에서 비판적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는 잡문이라고 한다. 시의성과 전투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평가 된다.
『화개집』에 수록된 글 속에서 루쉰이 다루었던 현실의 사안이 쑨원의 죽음, 5.30 운동, 베이징 여사대의 소요사태, 국수주의 등 그와 겨루었던 비판의 대상은 군벌과 제국주의 그리고 현대평론파의 ‘정인군자’와 기회주의적인 지식인....... 어느 해인들 비판과 반격, 공격이 없었겠는가만, 유독 1925년은 루쉰이 논적들을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루쉰을 논적으로 삼았던 해였다. - ‘『화개집』에 대하여’ 중에서-
루쉰은 “하느님인 양 현상 너머로 초연한 채 대단히 공평한 척” 하고 “힘 있는 자에게 빌붙어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고 여기고서 횡설 수설 입을 놀리는 회색의 인간들” -「KS군에게 답함」-에 맞서 그들의 수법인 뜬소문 내기, 그리고 뒤집어씌우기, 견강부회하는 ‘다수’와 ‘공리’의 속임수에 맞짱 뜨고 있다.
여사대 사태에서 보듯이 그들은 양인위 시대에는 다수가 소수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다수’를 ‘군중의 전제’라고 하더니 지금은 여자대학 학생(다수인)이 여사대(소수인)의 원래 캠퍼스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며 분쟁이 일어났을 때는 소수가 다수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
앞서 언급한 이들은 남의 권력을 믿고 못된 짓을 하는 무리로 사실 짐승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고 똑같은 사람 얼굴을 하고 있어서 실제로는 분간할 길이 없어 오직 암흑 속에 ‘귀신이 둘러친 담’처럼 존재한다. 그러므로 루쉰은 이들과 부딪혀 내가 깨지지 않으면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길이 없었을 터 피아가 선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싸우는 것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받들어 올리는 것과 파내는 것
중국 상등인이 사는 방법은 ‘밀치기’와 ‘발차기’ 그런데 그들이 강자를 만나 위협을 느꼈을 때 취하는 것은 억누르거나 받들어 올리기 이다.
억누르기에는 낡은 습관과 도덕, 官의 힘을 이용하기. 이런 것으로도 어려우면 그들은 받들어 올린다. 사실 받들어 올리는 행위는 대게 害를 면하려는 것인데 받들어 올려지는 것들은 열에 아홉은 좋은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더욱 커다란 불안에 빠지게 되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받들어 올리면서 일시적 안일을 꾀하고 있다.
루쉰은 중국인이 고생을 사서 하는 근원은 받들어 올리는 데에 있으므로, 그 고리를 끊고 스스로 복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즉 파내는 데에 있다고 한다.
결코 한담이 아니다
천시잉이 「한담」을 통해 발표한 글들은 자신이 뜬소문을 유포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남이 뜬소문을 유포했다고 중상하거나, 젊은이들이 미숙한 작품을 서둘러 발표하는 것은 ‘流産’이라 빗대어 조롱하는 그야말로 억누르기 내용들이다. 그들은 기성의 형세에 대해서는 두루뭉술 넘어가면서도 갓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완전무결을 요구한다.
그런 것이 유산이라면 루쉰 자신의 글 또한 생계를 위해 쥐어짜낸 것이며 천시앙의 기준으로는 낙태에 해당될 것이라 한다.
앉은 채로 평안을 기다리고 전진을 기다리는 것. 이게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이렇게 해서는 끝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을 희망하면서 나아가는 일은 화롯가에 둘러 앉아 차를 끓이는 정인군자들의 한담의 소재가 아님을 일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