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 발제] 철학수업 :: 0210(토) 4부 욕망과 자유
영민
/ 201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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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 2018-0210 <삶을 위한 철학수업> _4부 자유와 욕망
16) 욕망과 자유: 언제까지 우리는 ‘그들의 삶’을 살 것인가?
*스피노자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알고 있나요?”
“당신은 당신이 진정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나요?”
- 능력과 욕망에 대한 질문
왜 우리는 ‘나’의 능력이나 ‘나’의 욕망조차 잘 모르고 있는 것일까?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내가 ‘안다’는 것은 내 정신에 속하는 것인 데 반해 내 능력은 내 신체에 속한다. 신체는 정신과 속성을 달리하기에 내 정신은 내 신체가 무엇을 잘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생각하는 능력이나 감각적인 능력 같은 것은 신체보다는 정신에 가까이 있으니, 이것으론 답이 충분하지 않다.
- 해보지 않고선 모르는 것!
우리는 그토록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꼭 알아야 할 것조차 잘 모르고 산다. 이유는 어떤 것도 해보지 않고선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즉, 어떤 일을 정말 잘할 수 있을지, 좋아할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선, 특별한 재능이나 인연이 있는 게 아니면, 필경 고통이나 지루함을 수반하는 어려움의 문턱과 대면하고 그것을 넘어선 깊이까지 들어가보아야 한다.
*젊은 날의 방황이란, ‘잘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이런저런 일이나 활동 속에 들어가 자신의 능력을 실험해보고 인생을 걸 수 있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 ‘그들’이 말하는 삶
자기가 살고자 원하는 삶, 자신이 욕망하는 삶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삶일 것이다. 이때 욕망이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런 욕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 다들 말하는 것을 나의 욕망으로 삼는다. 이 경우 욕망은 나의 욕망일까 ‘그들’의 욕망일까?
- ‘이미 늦었어’의 시제는 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다면, 아직 자신의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사실은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되는 시기라도 결코 늦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고 그 시작과 함께 우리는 ‘나의 삶’을 비로소 시작하는 것.
17) 인정욕망과 자유: 날선 자존심과 ‘그저 웃는 자긍심’의 차이에 대하여
예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타인의 인정 구하지 말라)
달라이 라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남을 위해 하는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말고 하라)
- 인정욕망 (남의 인정을 구하는 욕망)
라캉: 인정욕망은 인간 욕망의 본질
‘나의 욕망’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사실상 엄마, 아버지, 사회 등 ‘타자’의 욕망이란 것이다. 인정욕망이 그 타자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삼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이라는 심층의 깊이에까지 침투한 타자의 욕망이다. 라캉이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각자의 인정욕망/탈피 경험
- 욕망의 주인과 노예
인정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 모두 노예다. 인정욕망의 노예고, 인정받으려 하는 자의 노예다. 인정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누구든 자신이 인정을 구하려는 누군가의 욕망에, 그 누군가가 갖고 있는 인정의 잣대에 포획되기 때문이다.
진정 주인이라면, 굳이 남의 인정을 받으려 할 이유가 없다. 남이 인정해주든 말든, 자신이 진정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게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냥 하면 되는 것이다.
- 인정욕망과 시선
인정욕망, 그것은 우리를 명령하기 이전에 복종하는 노예로, 명령없이도 복종하는 노예로 만든다. 나를 부리려는 자들의 시선을 욕망하며, 그 시선에 맞추어 사는 노예적 삶을 산출한다. 자유로운 삶이란 인정욕망의 짝인 그 시선에서 벗어날 때 시작된다.
*저자의 장애인 운동 참여 경험
- 자존심과 자긍심
자존심은 남들에게서 자신의 존중을 얻으려는 마음이다. 남들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강점을, 자랑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고, 그런 방식으로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것이다. 반면, 자긍심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긍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남이 아닌 자신의 시선, 자신의 척도에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고, 자긍심은 강한 자들이 스스로 갖고 있는 힘에 대한 긍정이다.
- 긍정의 긍정
진정한 긍정은 이중의 긍정(긍정의 긍정)이다. 첫 번째 긍정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긍정은 그렇게 자신이 긍정하여 선택한 삶으로 인해 야기되는 어떤 결과도 긍정하는 것이다.
18) 속도와 자유: 속도의 강박증과 춤추는 신체의 시간
- 상이할 속도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속도를 갖는다. 속도란 움직임의 속도고 살아 있음의 속도다. 움직임의 속도, 이는 단지 행동의 속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각뿐 아니라 생각도 속도를 갖는다.
- 속도와 타이밍
함께 산다는 것은 속도를 맞추어 사는 것이다. 각자의 신체와 영혼마다 각기 다른 속도가 있기에, 그것을 어느 하나에 일치시키려 한다면 ‘일치’는 자기 속도에 대한 억압이 된다.
속도를 맞춘다는 것은 리듬을 맞추는 것이다. 리듬은 박자와 달라서, 하나의 박자 안에서 상이한 속도의 움직임을 허용한다. 다른 속도를 갖는 것이 ‘하나처럼’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게 리듬이다.
- 변속능력
내 삶의 속도와 내가 사는 세상의 속도 간에는 대개 작지 않은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그 간극이 크면 불편함과 불화의 정도가 커지기 쉽다. 세상에서 요구하는 속도보다 내 삶의 속도가 느릴 때, 그래서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 때 특히 그렇다. ...물론 빠름을 악덕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것이 미덕인 것만은 아니듯이, 그것이 악덕인 것만도 아니다. 그때마다 필요한 속도가 있다. ...속도에서 중요한 것은 빠르기가 아니라 변속능력이다.
- 속도의 강박증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미친 가속의 체제다. 속도를 ‘빠름’의 정도로 간주하기에, 빠름이 미덕이 되고 빠름이 능력이 된 사회다. 이 미친 속도의 강박증을 말하면서, 자본을 말하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누락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속도의 미덕을 강박으로 바꾸고 속도에 사활을 거는 것을 외적인 강제로 만드는 것은 바로 자본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돈/인디언에게 ‘시간’)
그러나 이런 속도의 경쟁을 단지 세상이 내게 강요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잊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에 의해 시작되었든 간에, 지금 속도란 우리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 추구하는 미덕이란 점에서, 속도의 강박은 바로 우리 자신의 삶에, 우리 자신의 ‘내면’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세상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우리의 영혼도 미친 속도를 향해 치달리고 있는 것이다.
*내 영혼의 속도
‘자신의 속도’라는 게 있을 까? 자기 신체의 속도, 자기 영혼의 속도 같은 게?
19) 공부와 자유: 공부와 학인, 혹은 학생부군손오공신위
늙는다는 것은, 입력장치는 고장나고 출력장치만 작동하는 상태이다.
젊다는 것은 무언가가 끊임없이 입력되고 입력된 것을 처리하기 위해 뉴런들이 새로운 연결망을 만들고, 그에 따라 새로운 패턴의 출력이 언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프로세스를 ‘공부’라 하고,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학인’이라 부른다.
- ‘학생’은 무엇을 배우는가?
200년 전, 벼슬과는 거리가 멀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학생’이라고, 배우고 공부하는 자라고 간주했다. ...이런 글귀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삶이란 어떤 것이가이고, 정작 닦아야 할 것은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서양에서 철학은 무상한 삶 저편에 있는 불변의 진리를 찾기 시작하면서 삶에서 분리된 지식이 되었다. 삶의 저편에 있는 진리에 매일의 삶을 복속시키는 지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서구화된 교육을 통해 우리는 그런 지식을 배우는 학생이 되었다. 학생이란 평생을 지속해야 할 삶을 배우는 과정이 아니라, 본격적인 삶을 시작하려면 얼른 졸업해야 할 피곤한 청소년기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 공부와 향상심
공부는 중국어 쿵푸와 동일한 말로 사용된다. ‘쿵후’는 솜씨, 기예, 노력, 고심 등 앞서 공부라는 말에 포함된 의미를 대부분 동일하게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공부는 책을 읽고 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차라리 몸을 움직여 어떤 것을 만드는 재주나 솜씨를 익히는 것에 가깝다. 몸과 마음을 낮추는 하심의 훈련일 것이다.
공부는 학습보다 훨씬 어렵다. 항상 자신의 물음을 던지고, 자신의 감각과 생각으로 따져보고 몸에 붙여야 그 일부라도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기 어렵다’는 걸 이유로 배우고 알려는 노력을 냉소해선 안 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그대로 실행하며 사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렇진 못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며 산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공부하는 학인의 삶이고, 그렇게 애쓰는 마음을 흔히 향상심이라 한다. 우리는 ‘과정’을 사는 존재인 것이니까. ‘도’란 목적지가 아니라 바로 그 ‘과정’을 지칭하는 말이다.
*공부와 향상심에의 추구?
- 마음의 연마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지만, ‘뜻한 대로’ 몸을 움직여 원하는 것을 이루는 능력이나 기술에 머문다면, 그것은 아직 공부를 시작한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공부는 몸의 연마, 기술의 연마에서 마음의 연마로 넘어갈 때, 밖을 향하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 시작된다.
밖을 향해 있던 시선이 안을 향한다 함은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향해 돌리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몸은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향하게 된다.
- 도래할 삶
도래할 삶을 만드는 것은 이전의 삶에 기대어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는 난감한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습관이나 기억에 기대면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유지되는 동일성을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삶을 향해 이탈의 선을 그리면서 이전의 삶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방어하려는 자기 자신과 대결해야 한다. 그래서 공부는 생각보다 어렵다. 항상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기에. 학인이 넘어야 할 가장 어려운 고개,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의 삶이다.
20) 무아와 자유: 나 없는 자유의 유쾌한 웃음을 위하여
*머리 깍은 중음신
- 아상과 차이의 철학
차이의 철학이란 차이의 긍정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이것의 갖아 단순하고 통속적인 버전은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자기가 옳다는 믿음이 강하면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여기서도 아상은 차이를 인정할 수 없게 하는 장애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차이의 긍정이란, 나와 다른 어떤 것과의 만남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차이를, 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선 지금의 ‘나’에 대한 믿음, 지금의 나의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접어야 한다.
- 아상과 공동체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도 공동체란 여러 사람들이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주는 관계를 뜻한다. ...아상을 버리지 않는 한 공동체란 불가능 할 것이다.
*나를 낮추는 훈련
- 의지의 자유와 의지를 접는 자유
여러 가능성 앞에서든,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 자유라고들 믿는다. 이런 자유에는 김수영의 말대로 고독이, 피 냄새가 섞여 있다. 적대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이런 자유의 관념을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적대 속에서 형성된 그런 피 냄새 나는 자유의 관념은, 역으로 친구나 동지, 공동체처럼 적대 없는 관계 속에마저 대결과 투쟁, 반목과 적대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닐까?
적대 아닌 관계 속에서 자유란 피 냄새가 아니라 웃음소리와 함께 오는 것이다. 타인의 저항을 돌파하는 나의 강한 의지가 아니라 저 저항에도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는 믿음 속에서 아상을 내려놓는 지혜, 필요하다면, 이해할 수 없어도 나의 의지를 접을 줄 아는 용기와 함께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