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발제] 성의 역사3 :: 6장 소년들 & 결론
삼월
/ 2018-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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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소년들
로마시대에 소년애는 갑자기 사라지거나, 평가절하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소년애에 관한 철학적 성찰은 활기를 잃었다. 소년애 관계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이 문제가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푸코는 이렇게 소년애가 ‘탈문제화’된 동기 중 하나를 로마문화와 관련시킨다. 로마의 좋은 가문 아이들은 가족법과 공법에 의해 잘 보호받았으므로, 이제 소년애의 대상은 자유민이 아닌 노예로 대체되었다. 교육이 제도화되면서 소년애에 교육적 유효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일도 어려워졌다. 이제 스승에게 요구되는 입장은 아버지의 위치이다. 또 로마시대에는 결혼과 부부 간 애정적 유대에 대해 더욱 높은 가치가 부여되었다. 이와 함께 ‘필리아’의 인격적 관계가 지니는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는 소년애에 대해 중요한 세 텍스트가 남아있다고 말한다. 사랑에 관한 플루타르코스의 대화, 루키아노스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보다 후기의 대화, 소크라테스적 사랑에 관한 티르의 막심의 네 논문이 그 세 텍스트이다. 셋 중 가장 덜 중요한 막심의 텍스트는, 남성들의 관계 내에서 두 종류의 사랑을 구분하고 있다. 아름답고 정당한 사랑과 그렇지 못한 사랑에 대한 비교이다. 그에 비해 플루타르코스와 루키아노스 추정본은 소년들과의 관계를 여성들과의 관계와 비교하고 있다. 두 구분은 가치와 미와 윤리적 우월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제기는 연애술을 변모시키는 다양한 결론에 이른다. 먼저 여성에 대한 사랑은 에로스의 영역과 관련된다. 문제제기는 동성과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자연적 대립에 근거한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한 윤리적 가치부여는 더 이상 육체적 쾌락의 제거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색에 관한 성찰이 전개되는 지점은 쾌락의 문제 주변이었으며, 그 성찰이 퇴보하는 지점도 쾌락의 문제에 관련된다는 사실은 푸코가 지적하는 모순이다. 결국 이후에 쾌락의 관계들을 통합하여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개인적 유대로서의 결혼이다. 소년애는 이후에도 비난받지 않고, 문학과 예술 안에서 표현된다. 다만 사랑의 가장 고귀한 형태라는 철학적 의미부여는 사라진다. 나아가 쾌락에 관련된 무능력은 소년애의 근본적 결핍으로 간주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소년애를 반대하게 한다. 사실 소년애에 철학적 가치부여를 했던 동기는 사랑과 아프로디지아의 활용 사이에 존재하는 어려움이었다. 이제 그 어려움이 소년애 내에서 자기연마와 철학적 질문들 대신에 하나의 취향, 관습, 선호만을 보게 만든다. 플루타르코스의 대화와 루키아노스 추정본은 소년애의 합법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소년애가 존재양식이라는 주제에서 쇠퇴해 가는 것을 증명한다.
1.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사랑에 관한 대화》는 결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바콘이라는 청년이 자신에게 구혼하는 여성과 결혼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 납치 등이 줄거리이다. 바콘에게 구애한 사람은 두 명, 에라스투스파의 피시아스와 연상의 한 과부이다. 토론은 소년애 지지자인 프로토제누스와 피시아스, 여성에 대한 사랑의 지지자인 안테미온과 다프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플루타르코스는 토론의 증인이지만, 나중엔 토론에 참여하여 대화를 사랑에 대한 일반적 이론으로 이끈다. 플루타르코스에게 선택의 여지는 소년애와 결혼 사이에 있다. 대화에서 특이한 점은 소년에게 구애하는 여성의 특징이다. 이 여성은 소년보다 나이가 많고, 사회적 신분이 높으며, 결혼 경험도 있다. 이 결혼은 바콘에게 최악의 결혼일 수 있지만, 이런 결혼마저 정당화할 때 토론에서 결혼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과부인 이 여성이 덕성스럽다는 사실 역시 하나의 모순이다.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고 살아온 여성이 수치심 없이 소년에게 구애하고 있다. 소년의 결혼을 돕는 역할을 맡았던 여성은 소년의 매력에 끌려 사랑하게 되고, 납치까지 하기에 이른다. 이런 행동은 명백히 전통적인 소년애 모델에서 성인 남성이 했던 행동들이다. 따라서 바콘에게 구애한 두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은 동일하다. 한쪽은 연애술의 영역이고, 한쪽은 가정관리술의 영역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차이는 오로지 남성과 여성이라는 사실 뿐이다. 플루타르코스의 대화 안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있다. 첫 번째 움직임은 청년이 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가 사랑의 두 형태에 대한 문제로 변하는 것이다. 두 번째 움직임은 남성과의 관계와 여성과의 관계에 동일한 윤리적 가능성을 부여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이 토론의 목표는 단일한 사랑의 개념을 만드는 데 있었다. 단일한 사랑의 개념은 남색의 가치들을 배격하지 않고 넓고 완전한 형태 안에 끼워 넣어, 여성들(정확히는 아내)과의 관계만이 그 형태들을 활용하게 할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의 대화는 결혼을 긍정하고 남색을 반대하는 스토아학파의 논문들과는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푸코는 여기서 고대 연애술의 중요한 변화에 대한 윤곽을 본다. ‘아프로디지아’의 연속적 영역과 이원적 구조를 가진 연애술의 외형은 전도된다. 이 변화는 사랑에 대한 일원적 개념 수립을 넘어 쾌락의 실천이 이성간의 결합으로 나타날 때 완결된다. 플루타르코스는 끈질기게 남자-여자, 남편-아내라는 모델 위에 일원적 연애술을 구성하려고 노력한다. 단일한 사랑의 개념 아래 남색은 사실상 평가절하 된다. 텍스트의 목적은 연애술의 단일화이다. 단일화는 비판적 토론, 일원적 이론의 정교화, 하나의 기본 개념의 사용에 의해 수용된다.
① 전통적 ‘이원론’에 대한 설명과 비판은 다음과 같다. 이원론을 옹호하는 것은 소년애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소년에 대한 사랑이 여인에 대한 사랑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주장의 근거는 소년애가 자연적 욕구를 넘어서는 높은 곳에 대한 지향이며, 쾌락을 초월해 사랑의 본질에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자연에 부합하고 모든 동물에 공통적인 여성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여성에 대한 사랑에서는 에로스의 가능성 자체를 배제해야 한다. 여성에 대한 사랑의 대변자 다프네는 여기서 남색의 위선을 고발한다. 소년애호가는 자신에게 철학자와 현자의 모습을 부여하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쾌락이다. 소년애에서 우애와 관능이 양립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여성들과의 관계에서도 관능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 나아가 소년애 관계에서 덕성스러운 소년에게 폭력을 겪게 하고 쾌락을 얻는다면, 여기서 최상의 사랑의 모델을 찾을 수는 없다. 소년애와 여성에 대한 사랑이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② 에로스를 찬양하는 대화의 중심부에서 찬양의 모든 요소는 남색의 전통적 연애술에 속한다. 여기서는 여성에 대한 사랑을 찬양하는 플루타르코스가 에로스를 칭송한다. 소년들에 대한 연애술이 단일한 사랑의 형태로 이용되며, 나아가 이 형태를 부부관계에도 적용시킨다. 플루타르코스는 전통적 연애술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로 꼽히는 덕과 우애의 문제에서도, 두 성이 동일한 성격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이제 에로스는 부부생활의 실천으로 전이되며, ‘소프로수네’를 요구한다. 여기서 플루타르코스는 법률에 복종하며 수치심과 공포심에 의해 부과되는 절제와 에로스의 결과인 절제를 대립시킨다. 부부 간에 자제, 신중함과 성실성을 가져오는 것은 에로스 자체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오랫동안 소년애 관계에서 필리아에 부여되었던 특성들을 부부의 쌍수성으로 전이시킨다. 이 특성들은 사랑의 모든 형태가 아니라 부부관계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된다.
③ 소년애 관계가 지닌 정통적 가치들이 사랑의 일반적 개념을 떠받치고 모델의 역할을 하더라도, 소년애는 결국 자격을 박탈당하고 권리를 상실하게 된다. 부부의 사랑에 비해 소년애는 불완전한 사랑이다. 플루타르코스가 소년애의 불완전성을 찾는 곳은, 이원적 연애술이 아프로디지아의 제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이다. 사랑에서 아프로디지아의 제거는 하나의 장애와 같다. 그렇다면 소년애가 아프로디지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플루타르코스는 소년애에 ‘카리스’가 결여되었음을 지적한다. ‘카리스’는 여성이 남성에게 기꺼이 인정하는 동의이다. 동의는 성관계를 상호적 호의 안에 통합시키고, 육체적 쾌락을 우애 안에 덧붙인다. 이때 성행위는 부부관계에 생명을 주는 모든 애정관계의 출발점이 된다. 소년애 관계가 수동성의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과 달리 부부는 사랑을 자기 규율의 근거로 삼고 에로스의 관점에서 각각 능동적 주체가 된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주장한다. 결국 쾌락의 상호성 문제로 인해 소년애는 자리를 잃게 된다.
2. 루키아노스 추정본
루키아노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랑》에서는 테옴네스트라는 청년이 등장하여 멈출 수 없는 사랑의 두 정념에 대해 불평한다. 루키아노스가 그에게, 소년들만을 사랑했던 남자와 여성들을 사랑했던 남자 사이의 대화를 들려준다. 이 중 남색에 대한 논증은 스토아적이고 오만하며 화려하다. 테옴네스트는 여기서 소년의 육체를 향한 손길에 빈정거림을 던진다. 놀랍게도 소년애를 옹호하는 이 대화는 에로스가 아닌 아프로디테와 관련이 있으며, 육체적 쾌락의 문제가 대화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테옴네스트의 근심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육체적 쾌락이며, 논쟁을 끝맺는 것 역시 육체적 쾌락이다. 푸코는 이 텍스트에서 논쟁 자체보다 제기된 질문들을 검토하려고 한다. 첫 부분에는 사랑의 본성과 기원, 세계의 질서 내에서 사랑의 근거에 대한 질문이 있으며, 뒷부분에는 각 사랑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쾌락이 어떤 것이며, 그 형태와 가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
① ‘여성들을 위한 논증’은 스토아주의적 세계관에 근거한다. 이들은 소년애를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폭력적·기만적 행동을 야기하며 인간존재의 목표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긴다. 여기에 소년애 지지자인 칼리크라티다스는 세계가 카오스로부터 형성되었다는 주장으로 맞선다. 이 원초적 무질서를 극복한 것은 에로스이며, 그는 소년애에서 애착과 결합을 통해 카오스를 이겨내는 유대의 힘을 인식한다. 소년애는 타락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많은 호기심과 지식을 향한 인류의 상승에 의해 여성과의 관계보다 나중에 생겨났다. 다시 말해 철학과 더불어 남색이 출현했다. 논증은 은연중에 이성 간 관계를 통한 생명의 전달과 교육에, 제자와 스승 간 이루어지는 기술과 지식의 전달을 대립시킨다.
스토아주의와 함께 플라톤적이거나 에피쿠로스적 요소들이 혼합된 이 진부한 논증은 두 논쟁자가 소년애호자인 동시에 결혼에 대한 스토아학파적 지지자였음을 보여준다. 결국 부부의 ‘특권적 결합’이라고 하는 것은 스토아적 성찰을 기반으로 한 어떤 관점에 의해 만들어졌다. 기독교는 결혼관계의 윤리학을 수립할 때 이 관점에서 많은 것을 빌려왔다. 여성에 대한 사랑과 소년애 사이의 토론은 문학적 논쟁 이상이지만, 이것은 우월성이나 각자의 표현 권리를 다투는 성욕의 두 형태 사이의 투쟁이 아니다. 논쟁은 자신의 쾌락을 양면화하는 두 방식 사이의 대립과, 그 틀에 수반되는 철학적 담론들의 대립을 보여준다.
② 다음은 쾌락의 문제. 여성에 대한 사랑을 옹호하는 칼리클레스는 스토아학파적 논증을 통해 부부 간 상호성을 바탕으로 한 애정공동체를 주장한다. 결혼과 육체적 쾌락은 밀접하다. 여성과의 관계를 ‘자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쾌락의 상호성이다. 이야기는 남성 간의 관계를 인정한다면 여성들 간의 관계 역시 인정해야 한다는 논의로까지 나아간다. 여기에 맞서 칼리크라티다스는 소년애의 핵심은 ‘카리스’가 아닌 ‘아레테’(덕성)임을 주장한다. 파트너 간 명예롭고 현명하며 절제된 쾌락과 관계에 필수적인 공동체를 보장하는 것이 이 덕성이다. 그는 여성의 육체가 가진 비밀과 모호한 능력들에 혐오와 두려움을 느낀다. 때문에 여성들의 쾌락에서 상호성은 허위이며, 소년들과의 쾌락은 진리라고 주장한다. 우애는 소년의 젊음을 지나 역할의 전도가 이루어지면, 더욱 깊은 유대를 보장한다. 놀랍게도 소년애 모델에서 나타나는 이 애정반환의 도식은 은근슬쩍 남성들 간의 우애를 부부의 유대와 근접시키고 있다.
논증은 소년애의 승리로 끝나지만 이는 육체적 쾌락을 교묘히 회피하는 전통적 도식에 부합한 승리이다. 여전히 결혼의 문제는 남아있으며, 철학자들에게만 주어진 소년애의 특권을 결혼의 보편성에 겹쳐놓은 절충적 결론이다. 그러나 논증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루키아노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테옴네스트가 보이는 반응이다. 테옴네스트는 육체적 쾌락이 제거된 소년애의 덕성을 믿지 않는다. 결국 이 텍스트가 보여주는 것은, 아프로디지아를 인정하지 않은 사랑에 관한 논증이 본질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이다.
3. 세로운 연애술
소년애에 대한 성찰이 불모성을 드러내는 순간 새로운 연애술의 몇몇 요소가 나타난다. 이 연애술은 철학적 텍스트 안에서 특권적 장소를 차지하지 않으며, 소년애에서 주제들을 빌려오지도 않는다. 애신 남녀관계에 관하여 전개되며 소설적 이야기들로 표현된다. 이 연애술의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성극異性極 관계의 존재, 순결성을 모범으로 삼는 금욕의 요구, 영적 결혼이라는 형태와 가치의 결합 내에서 순결의 성취와 보상. 물론 소년애는 여전히 문학에서 자주 언급되며, 긍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히 관심의 초점은 소녀와 소년의 관계로 옮겨갔다. 이 관계는 양자를 격렬하게 강타하여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충격으로 시작되고, 마지막 순간까지 결혼과 쾌락을 방해하는 기나긴 일련의 사건들로 이어진다. 대칭적으로 동일한 인내와 정절이 양쪽에게 요구된다. 여기서 동정은 단순히 금욕이 아닌 하나의 선택이고 삶의 양식이며, 자신에게 쏟는 배려의 형태이다. 동정은 모든 성관계에 반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결합을 위한 예비적 시련이며, 결합으로 인도하여 완성되도록 하는 움직임이다. 결국 이 연애술에서도 성적 쾌락의 억제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동정이 완벽한 결합의 주위에서 조직된다는 점에서 소년애와는 다르다.
결론
1,2세기 성적 활동과 성적 쾌락에 대한 모든 성찰은 엄격함의 주제가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소년애를 이론적으로 평가절하하는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보이지만, 푸코는 여기서 섣불리 기독교적 도덕의 초안을 확인하지는 말자고 이야기한다. 푸코는 집요하게 이 문제를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가 분리되는 지점에서 찾으려고 한다. 당시의 신학자들이 기독교에 유사한 사유들을 스토아학파에서 끌어 왔던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 로마 철학과 기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규제요소를 가진 도덕에 어떤 근거를 부여할 것인가에 있다. 도덕적 명령의 근거들은 어디에 있으며, 오랫동안 기독교와 결부되어 있었던 도덕을 기독교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한지를 아는 일이 필요하다.
성적 엄격성의 원칙은 로마제국 시대 철학에서 최초로 정의된 것은 아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서도 엄격한 정식들은 발견된다. 성행위는 오래전부터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그리스 철학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부부 간 정절을 권고해 왔다. 양생술과 가정관리술, 연애술은 모두 엄격한 도덕을 정교화하는 모티브들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로마시대에 삶의 기술은 발전되고 변형되었다. 양생술에서는 성행위를 악이나 질병과 관련지어 두려워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결혼에서는 부부의 유대와 쌍수적 관계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소년애와 관련하여, 금욕은 더 이상 사랑의 고귀한 정신적 가치가 되지 못하고 사랑의 결함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변모를 통해 자기배려의 삶의 기술은 발전했다.
자기연마 기술은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제어할 행위들을 강조하는 대신에, 성적 활동이 야기할 수 있는 질병들에 대한 취약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성적 활동을 더 자연적이고 이성적으로 보편적 형태에 복종시킬 필요성이 강조된다. 자신에 대한 통제력이 자기향유에 이를 수 있게 하는 모든 실천과 단련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해진다. 성도덕의 변모는 금지 형태의 강화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종속성과 독립성, 타인과의 관계, 자기 통제력 행사의 절차들, 자기 지배 수립 방식의 문제들 주위를 선회하는 삶의 기술이 발전된 결과이다. 이런 맥락에서 쾌락의 윤리는 모든 연애술에서 성행위의 가치와 난점들에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성행위의 양식은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 양식과 다르며, 후에 나타날 기독교 양식과도 다르다. 여기서 성행위는 그 자체로 악은 아니지만, 형태와 결과로 인해 악과 관련된다. 그것은 결혼 내에서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완성을 이룬다. 삶의 기술과 자기배려의 정교화는 기독교 도덕에서 정식화된 계율들과 유사해 보이지만 푸코는 계속해서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성의 역사>를 통해 살펴본 쾌락의 절제, 부부의 정절, 남성들 간의 관계에 관련된 규약의 요소들은 유사하게 기독교 도덕과 비슷한 형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때 그 요소들은 수정된 하나의 윤리와 자신을 성행위의 윤리적 주체로 구성하는 또 다른 방식에 관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