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후기] 무덤, 썩지 못하는 운명의 비극 +2
기픈옹달
/ 2018-02-08
/ 조회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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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세미나 전후의 상태가 많이 다릅니다. 세미나를 시작하기 전에는 뭐하러 이런 고생을 하나, 이걸 읽어서 뭐하나 등등 온갖 잡생각과 귀차니즘 등이 마구 뒤섞여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세미나를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이를 갈무리해두고 글로 써놓아야지 하면서도 엉뚱하게 다른 일로 시간을 허비하곤 합니다.
세미나를 코앞에 두고 빈 손으로 맞을 수는 없어, 원문에서 두 부분을 뽑고 짧은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에 붙입니다.
세미나 시간에는 여러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당시 20세기 중국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에서 루쉰의 글에 나타나는 독특한 태도라든가 등등. 개인적으로 세미나 시간에 다룬 세 편의 낡은 글을 재미없게 읽으시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철학, 과학, 문명에 대한 루쉰의 고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동시대 동아시아인들의 사유와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0세기초 사상사나 당시의 분위기를 잘 알 수 있으면 좋을텐데... 세미나 시간에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워낙 많은 일이 있어 쉽지는 않습니다.
세미나는 앞으로 루쉰이라는 인물의 사상적 여정을 따라 가보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1907년에서 시작해서, 20년대의 글까지 읽겠지요. 그 가운데 어떤 변화가 감지될지, 루쉰의 것이라 부를만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가 우리의 숙제겠습니다. 세미나를 앞두고는 이런저런 잡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으나, 세미나를 마치고는 슬그머니 욕심이 생기는군요. 더 잘 읽고, 이야기하고 이해하고 싶은 인물입니다. 어떤 충만함이라 할 무엇이 그득그득 채워지는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값싼 술마냥 쉬이 취하게 만드는 인물도 아닙니다. 은근히 끌어당기는 그 매력에 한걸음 더 들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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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썩지 못하는 운명의 비극
其次,自然因為還有人要看,但尤其是因為又有人憎惡著我的文章。說話說到有人厭惡,比起毫無動靜來,還是一种幸福。天下不舒服的人們多著,而有些人們卻一心一意在造專給自己舒服的世界。這是不能如此便宜的,也給他們放一點可惡的東西在眼前,使他有時小不舒服,知道原來自己的世界也不容易十分美滿。蒼蠅的飛鳴,是不知道人們在憎惡他的;我卻明知道,然而只要能飛鳴就偏要飛鳴。
그 다음은, 물론 보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 글을 증오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말을 하는데 그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혀 반응이 없는 것보다 그래도 행복한 일이다. 세상에는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들이 많지만, 오로지 스스로 마음 편한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그저 편한 대로 놓아둘 수 없는 일이어서, 그들에게 약간은 가증스러운 것을 보여 주어 그들에게 때때로 조금은 불편을 느끼게 하고, 원래 자신의 세계도 아주 원만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려 한다. 파리는 날며 소리 내지만 사람들이 그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 점을 나는 잘 알고 있지만, 날며 소리 낼 수만 있다면 기어코 날며 소리 내려 한다.
此外,在我自己,還有一點小意義,就是這總算是生活的一部分的痕跡。所以雖然明知道過去已經過去,神魂是無法追躡的,但總不能那么決絕,還想將糟粕收斂起來,造成一座小小的新墳,一面是埋藏,一面也是留戀。至于不遠的踏成平地,那是不想管,也無從管了。
이 밖에 나 스스로에게도 하찮은 의미가 조금은 있다. 그것은 바로 아무래도 생활의 일부 흔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비록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정신은 되밟을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모질게 끊어 버리지 못하고 찌꺼기들을 주워 모아 자그마한 새 무덤을 하나 만들어 한편으로 묻어 두고 한편으로 아쉬워하려 한다. 머지 않다 사람들이 밟아 평지가 되더라도 그야 상관하고 싶지 않으며 상관할 수도 없다.
<루쉰전집 무덤:제기>
<무덤: 제기> 가운데 가장 눈이 가는 표현은 ‘새 무덤新墳’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그가 한때 꿈꾸었던 신생新生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질문도 떠오른다. 무덤이라면 그냥 무덤일 것이지 ‘새 무덤’이란 또 무엇인가. 일단 이 문제는 <제기>와 그 뒤에 실린 글의 시간 차이에서 발견해야 할듯싶다. <제기>, 그러니까 <무덤>이라는 책을 엮으며 이 글을 쓴 것은 1926년, 그는 샤먼에 있었다. 이 글을 쓸 때 그의 나이는 46. 이른바 <광인일기>로 출사표를 던진 지 약 10년이 지난 시간이다. 한편 <무덤> 앞부분에 실린 글은 1907년 일본에서 쓴 글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27. 잘 알려진 대로 루쉰은 일본에서 의학을 배웠으며 동시에 문예 운동에 뜻을 품었다.
<외침> 서문에서 그는 젊은 시절 친구들과 함께 문예잡지를 내놓으려 했다고 밝혔다. 그 책의 이름은 <신생新生> 그러나 그 잡지는 채 태어나지도 못하고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후원자는 사라졌고, 함께 꿈을 나누던 이들도 흩어졌다. <신생>의 비극적인 죽음이라 해야 할까? 이렇게 보면 ‘새 무덤’이란 ‘새 삶(新生)’이 되지 못한 그 무엇에 바치는 말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무덤이란 삶보다 분명한 것이다. 루쉰의 글에서 무덤의 비유는 자주 등장한다. 그는 무덤 만이 자신 삶의 분명한 최종 목적지라고 말하기는 하나, 그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무덤이란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무엇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그렇기에 그는 낡은 글을, 20년이 지난 글을 묶어 <무덤>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놓을 생각을 했을 것이다.
20년이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보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시간이다. 그 이유 때문인지 <무덤> 앞부분에 실린 글은 후대의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후대의 루쉰은 그렇게 긴 글을 쓰지도 않았고, 서양의 문화며 역사, 철학 따위를 장황하게 늘어놓지도 않았다. 젊은 시절 자신의 글을 묶어 세상에 내놓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흔적을 <무덤>이라 이름 붙여 기념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자연스러운 질문이 따라붙는다. 다만 <제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루쉰의 글이 가진 불편함은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정인군자 따위와의 싸움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었다. 고약하게도 그는 그의 글이 여전히 불편하기를 원하고, 그럴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는 20년이나 지났지만, 그 간 신해혁명이 일어나 세상이 바뀌었고 그 전후로 양무운동이니 신문화운동이니 하는 것들이 불길같이 일어났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생>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지만, ‘새로운 삶’도 요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루쉰이 너무 멀리 내다보았기 때문일까? 그가 말하듯, 역사는 일직선으로 곧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헤매다 나아가곤 하지 않나. 무던히도 흔들리는 시대를 살았기에 뚜렷한 진보를 보지 못하고, ‘삶/탄생’(生)을 만나지 못하고 있기에 그런건 아닐까.
적어도 루쉰의 당대에는 여전히 무덤 밖에 보이지 않는 시기였다고 해야겠다. 그는 베이징을 떠나 몸을 피했으며, 시대의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 자신의 글과 그 스스로가 한 시대의 유물로 썩어 없어지기를 바랐으나 그런 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는 <무덤>을 통해 썩어 사라짐을 꿈꾸었지만 거꾸로 그 무덤이란 여전히 썩어 사라지지 못하는 얄궂은 운명을 보여줄 뿐이었다.
루쉰의 시대에 여러 인물이 있었다. 그의 글에 언뜻 비치는 당대 인물의 흔적이 있다. 옌푸의 <천연론>이나 캉유웨이의 <대동서> 따위가 대표적인 것일텐데, 역설적이게도 이 둘의 글은 이미 무덤 속에 잘 묻혀 얼마간 썩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들 역시 시대의 문제를 고민했고, 답을 찾았으나 지금 보면 20세기 초에 유효했던 당대의 무게만큼 무겁지는 않다. 과거의 유물을 아끼는 소수에게나 의미가 있을 테다.
얼핏 보면 <무덤> 앞부분의 글 역시 그렇게 보인다. 1920년대 중반, 루쉰의 시대에 여전히 시끄러운 파리 소리(蒼蠅的飛鳴)였다고 지금도 시끄러울 리는 없다. 다만 이 글에 번뜩이는 루쉰 고유의 특징을 곱씹어 볼 일이다. <문화편향론>에 보이는 태도가 그렇다. 이 글은 당대 중국을 휘어잡았던 여러 주장들을 근본적으로 따져보고 있다. 군사와 경제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목소리, 한편으로는 입헌과 의회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루쉰은 근본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문화란 하나의 편향에서 나오는 역사적 산물인 이상 이를 하나의 절대 가치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주장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중국인’ 루쉰의 현주소를 만난다. 그는 막연한 진보를 믿지 않았다. <문화편향론>에 보이는 그의 역사관은 전통적인 중국의 것이라 보아야 한다. 지나치면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있다는 주장은 <주역>의 순환적 발전론을 떠오르게 한다. 세계의 발전은 결코 직선적이지 않다. 굽이치며 왕복하는 흐름, 편향 속에 진보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한편 서양의 것이라 하여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그는 여전히 ‘중국인’이다. 그렇다고 그가 전통이나 과거에서 무엇을 찾아내려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중국인’이란 전통에 닿아 있다기보다는 또 다른 문명의 도전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민감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존'과 ‘완고’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그는 슈티르너,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니체를 언급하며 물질보다는 정신이 대중보다는 개인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의 개인이 가진 정신, 개성이라 부를 만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아마 여기서 시대의 추세나 시대의 가치와는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단독자의 삶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초인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루쉰은 ‘초인’이라 부르기에는 희망과 확신이 부족하다. 생의 의지가 넘치기는커녕, 문득문득 무덤의 그림자가 비친다. 여기에는 ‘유럽인’을 꿈꾸었던 니체는 볼 수 없던 ‘중국인’의 현주소가 있지 않을까. 찬란한 문명과 스스로를 바로 잇지 못하는, 세계의 변방에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고 거기서 출발해야 하는 운명이 그의 발목을 붙잡은 건 아닐까 질문해 보는 거다.
중국을 노리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또한 낡은 전통을 타파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은 활활 불타오르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질문을 그에게도 되돌려볼 필요가 있다.
대개 오늘날 이루어놓은 것을 보면, 이전 사람들이 남겨 놓은 것을 계승하지 않은 것을 하나도 없기에 문명은 반드시 시대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며, 또 이전 시대의 대조류에 저항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문명 역시 편향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루쉰전집 무덤:문화편향론>
문제는 ‘편향’이 아니라 오늘의 ‘편향’과 그의 ‘편향’이 어떻게 공명하는가 어긋나는가 하는 것 따위일테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다시 한번 읽어보니 다급하게 쓴 짧은 글이라고 하기엔, 글 내용이 무척 세심하고 제목도 울림이 큽니다.
'무덤'이라는 제목이 책을 읽는 도중에도, 세미나를 할 때도 여러 번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고 다시 보게 됩니다.
자신이 쓴 글을 엮어 '새 무덤'이라 칭하는 루쉰, 곧 사람들이 밟아 평지가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루쉰.
문득 맑스가 기계를 '죽은 노동'이라 칭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의 노동이 만들어낸 가치로 태어난 기계. 그러나 기계는 누군가 사용하고 정비하지 않으면 곧 못 쓰게 됩니다.
그렇게 '산 노동'인 인간은 자기 생명을 깎아 다시 '죽은 노동'인 기계를 살아갈 수 있게 만듭니다.
'무덤'에 비유된 루쉰의 글에서, 누군가 사용하고 정비해주지 않으면 망가지고 마는 기계의 모습을 봅니다.
'산 노동'인 우리가 공부를 통해 루쉰의 무덤을 들여다보고, 여러 번 오가며 밟아 평평하게 만들 수 있겠지요.
그렇게 힘찬 각오로 다시 시작하는 루쉰세미나네요.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또 루쉰의 글을 읽는구나 실감하게 되는 순간은 서문에서였지요.
자신의 가증스러움을 통해 적들의 좋은 세상에 얼마간의 결함을 남겨주고 싶다는 루쉰다운 포부.
어간유를 먹으며 매진하겠다는 그 포부에 흠뻑 빠져버렸습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ㅎㅎ '어간유'의 매력이란.. ^^
루쉰의 글이 끌어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계속 덧붙여 말하고 싶게 만들지요. 다르게 말하면 생각으로 이끈다 해도 좋겠습니다. 맑스의 이야기는 재미있네요.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이라 더 흥미롭게 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가며 루쉰의 '무덤'을 생각하건데, 그가 말하는 무덤이란 제의, 기념이나 기억 따위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임시적으로 쌓아둔 무더기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사라지지 못하고, 썩지도 못하며, 죽음도 삶도 아닌 존재로 남아 있는건 아닐까. 루쉰의 다른 글을 읽어보면 더 하고 싶은 말이 늘어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