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후기] 0208(화) 실종자 3,4장 +2
김현
/ 2018-02-09
/ 조회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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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고독 3부작 중, 가장 먼저 씌였다는 <실종자>는 <성>이나 <소송>을 떠올려 보면, 확실히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덜 모호한 것도 다른 점이지만, <성>과 <소송>에서의 K들은 알 수 없는 상황으로 K 자신이 만들어가는 데에 반해, <실종자>의 카알은 상황 속에 떠밀려 가는 속에 상황의 눈치를 보며 고민만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답답한 동시에 공감이 간다는 웃픈 이야기도 나누었고요. ^_ㅠ
그런가 하면, 그렇게 짜여 가는 상황이 어딘가에 갇혀 있다가 잠시 해방되는 순간들의 반복 같다는 이야기도 했었지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카알은 독일에서, 그리고 외삼촌의 집에서, 이어서 폴룬더 씨의 집에서, 그리고 <성>에서 조수의 모티프가 되었을 것 같은 로빈슨과 들라마르쉬의 어떤 한 쌍에서 지속적으로 묘하게 억류된 듯한―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에도―상황에서의 벗어남과 동시에 다른 상황으로 옮아가는 모습, 그리고 공간적으로도 새로움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았던 아메리카라는 또 다른 감옥(?)으로의 이행이 마치 삶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 같다는 희음님의 말씀에 공감했습니다. 카알의 모습처럼, 해방의 순간은 그토록 찰나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렇게 카알은 해방의 순간을 맞이한 듯한, 그러나 실은, 외삼촌으로부터 쫓겨나 길바닥에 나 앉은 처지, 갈수록 소외에 던져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제목은 정작 ‘람제스로 향한 행군’이라는 토라진님의 지적도 굉장히 재미있는 아이러니로 다가왔습니다.
희음님은 벤야민의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에 대해서도 언급하시며 카알이 이 두 가지 폭력의 대상으로 느껴졌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특히, 별장에서 일어난 일, 그린 씨로부터의 통보와 클라라로부터의 어떤 폭력으로부터 그런 폭력의 대상화가 극명하게 드러났다고요.
그러고 보면, 카프카의 작품에서 여자의 존재는 계속 문제시되는 것 같은데, 당시 소설에서 이렇게 강력한 느낌의 여자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성이 바뀌었으면 성추행에 가까울 정도의 장면들이 펼쳐졌지요.. 토라진님은 이 모든 것이 카프카의 의도적 전복이라기보다 그의 세계 속에서 기존 질서가 모두 와해되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저에게도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다시 읽게 된 실종자는, 어딘지 카알의 자기중심성이 크게 눈에 띄었습니다. 어쩜 그렇게, 내쳐짐과 불행으로 비치는 듯한 우연의 연속이, 카알을 중심으로 그렇게 잘 짜여져 있을까요. 그런데 다른 분들도 비슷하게 생각하셨던 듯합니다. 토라진님은 다른 작품들에서는 돌발적이고 우연적이었던 데 반해, 이렇게 문장, 설정 등에 있어서 아귀가 안 맞는 게 없다고 하셨는데, 그런 면에서 작위적이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또 자연님은, 이런 면에서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도 보인다고 말씀해주셨지요. 예를 들어, 별장의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통로나 이상한 구조 등을 비추어 볼 때, 세계의 압력이 있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이 세계를 부정하는 데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리하여 이런 점에서 자기중심적이고, 연극적인 글쓰기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이야기도 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볼 때, 카알의 이런 연속적 내몰림이, 사실은 절대적 내몰림은 아니며, 자신이 내심 바라던 바였지만, 상황에 내몰렸다는 듯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서술의 추론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점점, 별장, 마을, 성 등으로 후속되는 작품들을 보면, 세계와 무대는 더욱 확장되는 듯하다고도요.
‘단 한 번 돌 하나가 비탈에서 굴러떨어졌을 뿐이다. 그것은 우연이거나 잘못 던진 것인지도 몰랐다.’
희음님이 발견한 이 문장은 어딘지 의미심장합니다. 토라진님이 말씀하신대로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아무런 비중 없이 등장한 인물의 슬랩스틱 같기도 하고, 언급하신 영화의 비탈 같기도 하면서, 그러나 자연님이 지적하셨듯,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 없게도 흘러가는 카알의 여정 같기도 합니다. 카알이 우연하게도 만나는 이상한 호의에 의해, 반 쯤 걸터 있는 듯한 관계에 의한 결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카알의 운명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앞으로도 그 비탈의 운명은 계속될 듯 합니다.
그러나 카알은, 매 순간의 비탈마다, 자연님의 말씀대로 별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 운명을 그대로 걸어갑니다. 벤야민의 무의성이 보인다고, 던져졌으니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그런 모습은, 카프카의 글쓰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목소리에 의해, 카프카는 이런 글들을 쓰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실종자에 대한 토라진님의 해석도 흥미로웠습니다. 폴룬더 씨의 집에 온 것을 후회하는 카알은, 환상으로, 다름이 아닌 외삼촌과의 가까운 사이를 상상합니다. 그의 환상 속에 있는 자신은 다분히 연극적이며, 그렇다면 현실의 자신도 연극적일텐데, 현실이나 환상(욕망) 모두에서 실재하는 본인은 사라진 것, 그것이 바로 실종자가 아닐까 하고요. (제가 다 담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댓글로 부탁드려요~)
승운님은, 발견하는 텍스트, 열려있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카프카의 <실종자>에 대한 소감을 말씀해주셨는데요, 그런가 하면, ‘무심한 듯 다정’하다고 하셨지요. 세미나 시간에 이야기 나눈 것처럼, 카프카 본인이 결국에는 무엇이든간에 타인이든, 자신이든, 사물이든, 무언가를 발견해내고야 마는 열정 때문에 그런 무심한 듯 다정함도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에게는 거의 1년 만의 카프카 세미나였는데, 오랜만에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읽히는 카프카를 만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아마도 문학 세미나의 즐거움은 역시 혼자 읽을 때에는 미처 만나지 못하는 어떤 모퉁이들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카프카의 말을 빌자면, ‘비탈’ 같기도 하네요. ^^
세미나 시간에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었는데, 후기로 다 담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러면서도 역시 카프카는 겨울이지, 하는 느낌도 있고요. 녹아가는 겨울 오전에 오랜만에 뵈어 반가웠습니다.
댓글목록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이렇게 술술 읽히는, 훌륭한 후기라니...
세미나 시간에 서로의 의견들이 겹쳐지고 보태지고 새롭게 생성되었던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꼼꼼하게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분명한 문장들로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로 요청하셨던,
카알이 별장에 온 것을 후회하며 삼촌에 대해 떠올리는 장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카알은 별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삼촌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삼촌의 침실에서 함께 대화하며 밤을 보내고 아침식사를 하고 싶어하죠. 그리고 삼촌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삼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이 환상을 만들어냈으며 카알은 그 환상 속에 머물고자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가 바라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가 있는 현실은 별장이며, 이곳을 당장 벗어날 방법이 없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카알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별장에도 삼촌 침실에도 카알은 없습니다. 결국 그는 '실종자'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면?' 이라는 상상을 자주 하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금방이라도 그렇게 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바라는 욕망이 절실할수록 상상이 구체적일수록 그 환상에서 벗어나기 힘들죠.
벗어나기 힘든 것은 현실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인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환상 속의 자신을 꿈꾸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카알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저는 그렇습니다.
카프카를 읽으며 자꾸 뒷목을 긁적거리게 되는 것은
이런 우리의 민낯을 보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님의 후기 덕분에 여러가지 논의점과 고민들이 좀 더 무게감을 갖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 같습니다.
다음의 카프카가 더더욱 기다려집니다. ~~^^
김현님의 댓글
김현
실종자를 읽었어도 늘 어째서 실종자인지 궁금해하곤 했는데,
토라진님의 해석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리고 자연님 말씀처럼, 혼자 읽을 때에는 그냥 넘겼던 것들이
세미나로 인해 더 풍부해지고 색이 입혀지는 느낌이에요.
세미나 시간에 모두 귀중한 말씀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