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후기] 성의 역사 :: 0208 마지막 시간 후기 +4
삼월
/ 2018-02-11
/ 조회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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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힘겨웠던 <성의 역사> 읽기가 끝났다. 푸코에게서는 예상치 않은 위로를 받은 기분이다. 1권의 도입부가 떠올랐고, 푸코가 자신이 품었던 질문을 성실히 따라가려고 노력했음을 알게 되었다. 질문은 답을 찾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던 말대로 푸코는 끝까지 질문이 가진 힘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노력, 끈기, 용기와 같은 것들은 공감을 넘어 푸코라는 사람, 푸코가 말했던 철학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다시 고민해보게 했다. <성의 역사> 마지막 시간의 세미나는 무척 산만하고 짧게 끝났다. 힘들고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다시 오지 않을 그 시간이 안타깝다. 뒤늦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로 여기며, 이 후기를 적는다.
푸코가 <성의 역사> 3권의 마지막 부분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두 텍스트는 각각 소년에 대한 사랑과 여성에 대한 사랑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역사> 2권에서 고대 그리스시기를 다룰 때, 두 사랑은 완전히 구분된 영역에 속해있었다. 여성에 대한 사랑이나 부부 간의 문제는 가정관리술의 영역에 속했고, 소년에 대한 사랑은 연애술의 영역에 속했다. 그리스가 사실상 로마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 헬레니즘 시기부터 두 영역의 구분이 점차 흐려지고, 소년애에 대한 철학적 가치부여는 사실상 평가절하되기 시작한다. 기원후 로마시대에는 플루타르코스가 쓴 것처럼, 여성에 대한 사랑이 소년애에 비해 더 자연스러운 사랑이라는 주장들도 나타난다.
언뜻 보면 현재의 관념을 적용해 이 두 사랑의 구분을 동성애와 이성애라고 읽을 수 있다. 르네상스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런 식의 오독과 오해는 무수히 많았다. 푸코는 <성의 역사> 2권과 3권에서 고대의 텍스트들을 검토하면서, 그 사랑들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살펴보았다. 원래 연애술은 성인 남성과 소년 사이에 구애와 거절의 기술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것을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성애로 볼 수는 없다. 소년애 관계에서 소년은 여성을 대신하는 역할일 뿐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쾌락은 지양되어야 하고 소년은 쾌락을 느끼면 비난받는다. 그러나 소년은 고대 그리스에서 나중에 도시국가를 책임질 존재이므로, 성인 남성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평등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대칭성을 가진 이 관계는 나중에 로마문화에서 부부 혹은 이성관계의 결합을 묘사하는 말들로 변형된다.
결국 고대 그리스부터 로마까지 사랑의 형태를 동성애와 이성애로 나눈 적은 없었다. 소년애를 지지하던 로마의 철학자들은 부부관계의 필요성 또한 거부하지 않았다. 각각 소년에 대한 사랑과 여성에 대한 사랑을 옹호하기 위한 논증들은 철학적 세계관과 자신의 쾌락을 위한 싸움이었지, 성애의 두 형태 간 싸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루키아노스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텍스트에서 테옴네스트라는 청년이 보여준 반응이다. 그는 소년애가 쾌락을 제거하여 진리에 가까워진다는 고전적 논증을 비웃는다. 이런 반응은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온 소년애에 대한 철학적 가치를 무력하게 만든다. 동시에 소년애가 쾌락과 멀리 있다면 여성(특히 아내)에 대한 사랑은 쾌락을 통해 강화된다는 스토아학파 주장의 전제도 부정한다. 육체적 쾌락을 제거한 모든 사랑에 대한 논증은 취약하고, 진부하다는 점만 증명된 셈이다.
문제는 종교개혁 시기 신교와 구교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신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텍스트를 가져다 자신들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는 점이다. 특히 가족윤리를 확립하려는 주장은 스토아학파의 결혼에 대한 논리를 빌려왔다. 스토아학파에서 부부 간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소년애를 비난하는 주장들은 동성애 혐오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로마시대 부부 간 사랑의 모델은 고대 그리스 소년애에서 시작되었다. 문제는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쾌락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있다. 다시 논점은 <성의 역사> 1권에서 푸코가 성에 대한 억압가설을 비판한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푸코의 가정은 단순하다. 성은 억압되지 않았는데, 우리가 저항한다는 명분으로 성 해방을 요구하며 점점 과도한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마의 양생술과 자기 연마에 대한 푸코의 연구는 고대의 성적 절제가 강요된 금욕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파괴할 수도 있는 사랑이라는 강렬한 정념에 맞서, 우리는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절제를 필요로 한다. 금욕은 성관계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사랑을 위한 예비적 시련이며, 삶의 양식이다. 금욕이 스토아학파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차용한 기독교 도덕과 유사하다고 해서, 모든 금욕을 기독교 도덕의 결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스스로를 윤리적 주체로 구성해가려는 자기배려의 의지를 믿을 필요가 있다. 푸코가 말하는 윤리적 주체는 주어진 것이나 완성된 것이 아니라, 늘 구성해 나가야 할 역동적인 무엇이다. 또 우리 자신이 항상 변화 없이 머물러 있고자 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자신의 윤리에 부합한 무엇인가로 만들어나가려는 경향을 가진 존재임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나는 그 경향을 푸코가 말한 ‘실존의 미학’과 연결시키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가 말한 윤리적 ‘주체’는 푸코가 비판한 데카르트적 사유의 주체가 아닌 실존 자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서 정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덮쳐왔다. 특히 푸코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실존적인 동시에 윤리적 의미에서 푸코에게 받은 위로가 예상 외로 정말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푸코가 <성의 역사>를 쓰게 된 개인적인 계기가 무엇일까 떠올려 보았다. 표면적으로 동성애자로서 푸코가 겪는 방황과 혼란은 학생 시절에 끝난 것처럼 보인다. 교수가 된 푸코의 초기 연구 주제는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고 구분하면서 작동하는 권력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내면의 도덕규범과 자기 정체성 간의 충돌이 끊임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 도덕규범은 푸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다른 개인들의 것도 아니다. 푸코가 이천 년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 문헌들을 뒤져야만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윤리를 위해 자기 내면의 무엇과 싸워야 한다면, 그 내면의 무엇은 사실 우리 자신이 만든 게 아니다. 이천 년도 넘는 시간들이 그 규범들 속에 녹아 있다. 자신을 윤리적 주체로 구성하고 ‘실존의 미학’을 형성하는 그 지난한 싸움의 과정과 기술이 무엇인지 푸코는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충분히 보여주었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와 감사합니다. 세 권이 한큐에 정리되는 것 같아요.
저도 푸코가 말하는 주체는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되는 실존 자체라는 말에 밑줄 긋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유의 주체로 사루만의 눈처럼 확고한 주체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관계 속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주체!!
그런데 요 문제는 글로 문장으로 분명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실제로 이걸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작동시켜야 하는지 모르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매번 당황쓰 ;;
어쨌든 푸코는 나뿐 아니라 내가 만나는 모든 타인들이(본인이 설령 모르고 있을지라도)
'구성'되는 주체를 겪고 있음을 이해하게 합니다.
내겐 너무 소중한 타인들;;;
저는 오늘도 푸코를 만나면서 깊게 충전된 역동성과 힘을 생활의 기술로 승화시키고자
다음 푸코 책을 향해 달려갈 예정입니다 ㅎㅎㅎ
이렇게 <성의 역사>를 마무리했다니 믿어지지 않지만, 정말 알찬 옹골찬 기똥찬 세미나였음에
모든 세미나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유택님의 댓글
유택
이렇게 멋지게 총괄하는 삼월의 <성의 역사> 후기라니!
그리고 이 후기를 읽고 또 읽어봅니다.
길고 지난했던 그러나 도저히 따라가지 힘들 정도의 놀라운 문제제기로 일관했던,
놀란듯 뚫어지듯 뚱그런 두 눈으로 세계를 삶을 응시하던
우리의 멋진 푸코, 그리고 우리의 공부, 우리의 세미나.
실존의 미학, 구성되는 주체..
자기포기가 아닌 자기윤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묻기 보다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내가 한 것들로 나 자신을 구축하고 자기 변형을 해야 한다는 말
그간 읽어왔던 수많은 푸코의 말들을 종합해낼 순 없지만
뭔가 알듯말듯 허나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그의 매력...
그 느낌을 공유하며 한 시절을 보냈던
나의 스승이자 친구들이었던 푸코 세미나원들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대들이 있었기에 나는 푸코를 만날 수 있었다고.
그래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이 연사 소리높여 외칩니다~~ 아~~~ ^^
김현님의 댓글
김현
댓글이 늦었습니다.
푸코 세미나에 합류하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도전이기도 했고,
때로는 힘을 얻고, 때로는 진이 빠지며, 3권 까지 달려왔는데,
마지막 장을 다 읽지 못한 이유로 마음이 조금 무겁습니다.
그래도 함께 마지막을 했다는 데에서는 큰 위안과 힘을 얻습니다.
마지막 3권을 읽고는 이후 출판되지 못한 4권의 내용이 궁금하기도 하고
지난 '주체의 해석학' 이야기가 저도 많이 궁금합니다만,
결국에는 3권까지 달려오며, 그 한 주 한 주에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던,
푸코의 권력 효과에 대해서는 두고 두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저 역시, 혼자라면 결코 대부분을 읽지도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홀로 방황했을 것을 생각하면,
푸코 세미나에서 힘이 되어준 세미나원들에게 저도 너무 고마운 마음입니다.
저도 삼월님처럼, 오히려 세미나가 한 텀 마무리 된 시점에서,
외려 더 푸코를 이해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하고요. ㅎㅎ
그런 의미에서 감시와 처벌은 또 어떻게 읽힐지..!!!
지난 몇 개월 간, 고생해주신 반장님들과 세미나원분들 고맙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시와 처벌 시작하며 또 만나요!
올리비아님의 댓글
올리비아
푸코를 읽으면서 정말 제가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이 깨어지고 뒤흔들어 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세미나회원(?)분들 덕분에 많이 이해하고 정말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감사합니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