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발제] 0년 - 4. 귀향 +2
쏭코
/ 201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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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귀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난민 규모가 대단히 충격적인 수치를 기록한 것은 실리적,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무분별하게 집행된 의도적 결과물이 ‘난민’이었기 때문이다. 노예노동 프로그램과 인구 교환, ‘인종청소’, 독일과 일본이라는 지배 민족의 레벤스라움을 찾기 위한 이주, 내전 발발, 전체 주민의 절멸을 위한 추방이나 망명 등이 원인이었다. 주범은 유럽에선 독일인이었지만, 소련과 그 주변 지역의 스탈린 정책도 히틀러 정책만큼이나 살인적이었다.
나치 강제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자신들만 고통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야했다. 네델란드인들도 굶주렸고 자전거와 같은 뭔가를 잃었다. 유대인들은 너무 많은 주장을 하지 말고 너무 공세적으로 굴지 말라고 요구받았다. 유대인들은 제자리가 어딘지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감사한 마음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놀라울 것도 없이 대부분의 유대인 생존자들은 침묵의 길을 택했다. 먼저, 1940년 네델란드에서 살던 유대인 15만 명의 75퍼센트가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에 침묵했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유대인이 5000명밖에 안된다는 사실에도 침묵했다. 끝없는 기차 행렬로 유대인 후송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네델란드 관료들과 경찰, 법조인들이 나치 살인자들에게 베푼 도움에도 침묵했다.
드골주의자의 전쟁포로 무시
프랑스 드골 정부는 야만적인 보복전이 휩쓸고 간 뒤에 국민 대부분이 독일의 적에 대항해 용감하게 저항했다고 간주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깊이 새겨진 균열을 메우려 했다. 하지만 귀환한 전쟁포로들은 당시로선 필수적이었을 ‘가식적인 태도’로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회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1940년 올이 다 드러나는 낡은 옛 군복에 초라한 행색으로 귀환하는 전쟁포로들을 환영하는 축하행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들에게는 패배의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 혈통이 아니라 겁쟁이여야만 했고, 가장 오염된 사람들이어야만 했다. 그런 까닭에 전쟁포로들이 돌아왔을 때 냉대나 침묵 속 무시, 아니면 기껏해야 겸연쩍어하는 듯한 대접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암시장 깡패가 된 가미가제 특공대
프랑스군 전쟁포로에게 귀향이 힘든 일이었다면, 독일과 일본군 전쟁포로는 더욱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독일과 일본 전쟁포로는 국가적 패배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을 텐데 동족의 경멸과 증오까지 감당해야 했다. 재앙을 초래한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나쁜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으며, 오만한 전사로 국가 위에 군림하더니 비굴한 패자로 돌아왔다는 경멸과 증오였다. 독일에서는 나치가 전적인 비판을 받았다. 일본식 나치 버전이 없었던 일본에서는 모든 비극에 대한 비판이 ‘군국주의자들’에게 향했고, 이는 군부와 관련된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있었다.
일본 작가 사카구치 안고는 가미가제 특공대(돗코다이)가 “오늘날 이미 암시장의 깡패들이 됐다”고 적었다. 이런 위신 추락과 국가적 망상으로부터 깨달은 집단 자각은 천황을 위해 죽으러 갔다가 수치스럽게 살아 돌아온 군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곧장 이어졌다.
전쟁 막바지에도 군 창고에는 여전히 식량과 무기에서부터 담요와 의복까지, 빈곤한 주민들에겐 필수품이었던 것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군 선임장교와 공모한 민간인, 때로 전시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내력이 있는 폭력배들까지 합세해 대규모로 조직화된 약탈이 이어지면서 군 창고는 텅텅 비었다. 약탈 물건들은 천천히 암시장으로 스며들었고, 일반 사람들이 살 수 없을 만큼 가격이 올랐다.
군사적 실패로 남성성이 무력화되고 사기가 저하된 군인들은 집에 돌아온 뒤에도 파괴된 집과 헝클어진 결혼생활로 또 한 번 타격을 받았다. 전쟁 직후 독일과 일본의 영화 및 저서에서 가장 흔한 주제는 집으로 돌아온 군인과, 외로움 해소나 생존을 위해 애인을 두었던 아내와의 불화였다.
독일인과 일본인들은 영웅적 이상에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전쟁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무엇도 하지 않으려 했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가장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절대 없애려 하지 않았고, 이는 국가와 국민이 다시 한번 영웅처럼 살 수 있다는 무분별한 군사적 모험주의를 개시하려는 치명적인 성향으로 이어졌다.
‘유럽의 하수 처리장’ 대참사: 오스트리아 케른텐
귀향을 원치 않았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1945년의 아름다운 봄, 그림 같은 시골 교회와 마을들이 들어서 있는 이 축복받은 풍경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격적인 뭔가가 있었다. 드라우 계곡은 급조한 캠프와 판자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에는 전직 군인뿐 아니라 부녀자와 어린아이, 그들이 타고 온 말과 소달구지, 하다못해 낙타까지 포함해 수만 명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코사크족과 슬로베니아 농부, 세르비아 체트니크, 일부 왕당파, 파시스트도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양쪽에 다 걸친 사람들이었다. 우스타샤 출신의 크로아티아인도 있었고,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 다양한 유럽국가에서 온 전쟁포로 출신, 산악지대 판잣집에 몸을 숨긴 나치 대량 학살 책임자도 있었다. 런던의 유명한 출판업자가 된 나이절 니컬슨의 표현을 빌리면, 커른텐은 “유럽의 하수처리장”이었다.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케른텐은 유럽에서 인도적, 문화적 대참사를 야기했던 인종적 민족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근대 정치사의 민낯이라는 점에서 대량 이주에 따른 불행이 일어나기에 딱 맞는 곳이었다.
5월 14일 크로아티아군 20만명이 민간인 50만 명과 함께 영국군이 지키고있는 전선으로 왔고 영국군은 이들의 오스트리아 입국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받아들일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이 묶인 상태에서 굶주림에 시달렸고 오랜 설득 끝에 결국 크로아티아인들은 티토주의자들(영국군들을 ‘티츠’라고 불렀다)에게 항복하는 데 합의했다. 이렇게 항복하면 남자들은 전쟁포로로 대우받고, 여자들은 크로아티아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5월 15~16일 크로아티아 군인과 관료 1만여 명이 유고슬라비아 국경지대에서 총을 맞았고, 시체들은 구덩이에 버려졌다. 5월 17일 ‘죽음의 행렬’이 슬로베니아 마리보르로 향하는 드라바 강을 따라 시작되었다. 이런 달리기 ‘행군’을 견뎌내지 못한 자는 칼을 맞거나, 맞아죽거나, 총살당한 뒤 길가나 구덩이에 버려졌다. 세르비아인과 슬로베니아인들도 고체베의 아름다운 숲에서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영국군은 이탈리아행이라고 속여 이들을 기차에 태우고는 유고슬라비아로 보냈고, 이들은 공산주의자의 포로로 그곳에 도착했다.
영국은 필요하다면 때론 속임수로, 때론 강제로 러시아인과 반공 인사들을 적들에게 넘겼다. 그러고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백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 편에서 싸웠다며 반역자로 몰아세우면서 이 정책을 정당화했다.
코사크인의 사례는 더 복잡하다. 이들은 나치 소련 침공이 과거의 코사크 영토를 다시 찾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독일은 독일 편에서 싸운다면 이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소련에서 싸웠고,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퇴각해야 했다. 퇴각할 때는 민간 피난민 수천명과 함께였다.코사크인들은 이탈리아 알프스 지방에 ‘코사키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고, 영국군이 도착하자 소련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적이고, 영국은 적이 아니라고 선언하면서, 코사키아를 포기하고 케른텐의 목가적인 계곡으로 넘어왔다.
모든 정파는 자국의 목적에 맞기만 하면 독일 침략자를 포함한 외부 강대국들과 언제든지 거래를 했다. 결국 친구인지 적인지는 힘의 논리가 결정했다.
1944년 9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영국은 소련 국민이 “원하든 원치 않든”모두 러시아로 돌려보내겠다고 소련측에 약속했고 이 정책은 1945년 얄타 회담에서 공식 확인되었다.
많은 러시아인이 강제로 독일 군복을 입어야 했고, 독일에 노예나 하류층 노동자로 끌려간 여자와 아이들은 절대 군복을 입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상당수 코사크인들은 한 번도 소련 국민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본국 송환’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이든이나 소련 지도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영국군은 아프리카에 파병되어 가거나,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아시아로 보내질 거라는 코사크인의 망상을 교묘하게 조장했다. 그리고 코사크인들이 지휘관만 없으면 영국군 명령에 크게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5월 말 코사크인 장교 1500명은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저녁에는 가족들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몰래 소련 군대에 인도되었다. 곧바로 처형되지 않은 코사크인들은 굴라크로 보내졌고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또 다른 코사크인 캠프에서는 기차에 타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수천명이, 정교회 예복을 완전히 갖춰 입은 성직자들이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거대한 군중 안쪽에는 무릎 꿇고 서로 팔장을 낀 여자와 아이들이 자리 잡았다, 원의 가장자리에는 젊은 남자들이 섰다. 원형의 대형은 종교적 상징과 검은 깃발, 대형 십자가 제단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군인들도 기도하는 사람들을 공격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 였다. 하지만 영국군은 그들을 공격했다. 일부는 아이들과 함께 강에 몸을 던졌고, 일부는 캠프 밖에 있던 소나무에 목을 맸다. 하지만 남아 있던 코사크인 대부분은 작은 창문 하나에 변기용 바구니 하나만 있는 우마차에 몸을 실었다. 코사크인들은 혁명과 순수 민족 국가라는 이상에 따라 행동했다가 사멸되었다.
동유럽의 독일인 추방과 히틀러 프로젝트
포츠담에서 만난 트루먼, 처질, 스탈린은 전후 질서를 재편하였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에 남아 있는 독일 사람들과 관련된 요소들을 독일로 이송하기로 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정책에서 대규모 인구 이동과 추방, 국경선 변경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처칠은 내심 다른 선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무슬림은 터키로,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터키인은 그리스로 옮기기로 합의한 1923년의 로잔 조약이었다. 이제 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동부 폴란드에 거주하는 폴란드인을 한때 독일 영토였지만 독일인이 떠나면서 텅 비게 된 실레지아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인도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1100만 명을 고향에서 쫒아낸 것이었다. 결국 이주 기차를 탄 사람들은 과적된 화물열차, 서로 몸이 겹쳐질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음식과 물, 화장실도 없이 온갖 날씨에 노출된 상태로 며칠간 갇혀 있어야 했다. 나이를 막론하고 여성들은 머리를 식히는 오락 차원에서 술 취한 군인들에게 성폭행당하기 십상이었다. 집을 잃고 모든 권리를 잃은 사람의 공포감은 다른 사람에겐, 그 사람에게 뭐든 저질러도 된다는 면허증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헝가리인이나 독일인에게 일어나고 있는 비극은 유대인에게 일어난 비극에 견줄 만했다. 강제 송환 과정에서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소련 군대와 폴란드인, 체코인들에게 마구잡이로 성폭행 대상이 됐던 독일 여성들은 스스로를 독일어로 ‘프라이빌트’ 즉, ‘쉬운 먹잇감’이라고 칭했다. 어떤 권리도 없이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쉽게 목표물이 되었다. 실레지아는 1945년 여름 ‘야생의 서부’로 알려졌다. 독일령에서는 단치히로 불렸던 폴란드 그단스크의 신임 행정부 지역 행정관은 이를 ‘골드 러시’라고 불렀다.
1945년 체계적으로 파괴된 것은 많은 사람이 함께 누려왔던 독일 문화였다. 거리와 상점 간판이 다시 걸렸고, 장소도 이름이 바뀌었고, 독일 도서관은 약탈당했으며, 기념비는 철거되었다. 독일어 자체가 제거돼야 할 대상이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독일을 증오하는 국가와 민족들은 21세기 초반 10년간 인종적 순수성과 국민주의를 내세우면서 집권했던 히틀러의 프로젝트를 완성한 셈이었다.
유대인 난민, “우리는 어디에도 없다”
1945년 여름과 가을, 유대인 생존자들이 독일 난민 캠프에 남아 있었던 것은 독일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었다. 유대인을 모두 살해하려고 했던 독일에 있는 편이 리투아니아나 폴란드같이 원래 살던 나라에 가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미군과 영국군이 경비하는 난민 캠프에서는 최소한 박해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생존자에게 고향은 상상 속의 고향이었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향은 파괴되었다. “우리는 지금 바이에른에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어디에도 없다.”
유대인과 비유대계가 섞여 있고, 여기에 관료주의 특유의 혼란과 무관심 때문에 난민 캠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했다. 생존자들을 돕기 위해 팔레스타인(향후-이스라일 지역)에서 독일로 건너온 유대인들조차도 충격을 숨기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 영웅 이야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은 최악의 수난자였던 유대인들 이었다. 영웅화 시도는 이미 전시에 팔레스타인의 유대계 신문에서 행한 적이 있다.(219p) 전쟁 직후에도 영웅적 표현으로 유대인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유대인들을 고무, 격려하면서 고향을 꿈꾸게 하는 시오니즘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성지(팔레스타인을 의미한다)의 유대인과 디아스포라(다른나라에 거주하는 유대인, 또는 유대인 거주지) 간 연결고리는 미약했다. 젊은 시오니스트 그룹은 전시는 물론 전후에도 캠프에서 유대인 생존자들을 재빨리 키부츠로 조직화하면서 연결고리를 구축했다.
그들은 홀로코스트를 도구화 하였고(223p) 새로운 영웅담을 만들어냈다. 1917년 아서 제임스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국가’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영국은 밸푸어 선언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팔레스타인의 비유대계 공동체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해를 끼치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내용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 인구 70만 명의 91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 국가 건설은 큰 문제가 될 것이었다. 영국 외무부의 동정을 더 받았던 아랍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너무 많은 유대인이 정착하는 게 허용되면 무장봉기할 것이었다.
몇 년이 더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시오니스트들은 방법을 찾았다.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됐고(1948),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안식처를 찾았다. 소련과 미국은 물론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죄책감인지, 아니면 모든 민족은 자신만의 국가를 가질 수 있다는 19세기의 개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많은 유대인을 위해서 이스라엘 국가만이 유일하게 설득력 있는 선택이라는 인식 때문인제 이스라엘 건국에 동정적이었다. 이든이 코사크인에 대해 언급한 것이 유럽의 유대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우리는 그들이 여기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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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실험실님의 댓글
우리실험실
[ 자료 업로드시 텍스트 잘림현상에 대한 대처 ]
한글.워드문서를 복사해서 홈페이지에 붙여넣을 때, 가끔 텍스트가 부분만 나타나는 잘림현상이 생깁니다.
그것은 한글.워드문서에서 웹문서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한글.워드문서의 속성(밑줄, 볼드, 크기)들이 웹문서의 html태그로 변환되어 용량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한글.워드문서의 텍스트를 복사해서 -- 메모장에 붙였다가 다시 복사해서 -- 홈페이지에 올리면,
원본문서의 속성들이 지워지면서 텍스트 잘림현상이 해소됩니다.
쏭코님의 댓글
쏭코넵! 메모장에 붙였다가 다시 복사해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