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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공백 후기] 고정희 시인 +2
토라진 / 2018-01-21 / 조회 1,688 

본문

이번 주에는 고정희 시인의 유고 시집인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중 세 편의 시를 읽고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주로 8090 시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발과 저항, 종교적인 자기 성찰에 대한 주제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시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녀의 시가 담고 있는 여성적 언어의 힘이었습니다.

 

∞ 매춘과 ××매춘 읽기

 

 

 가장 먼저 읽어 보았던 ‘밥과 자본주의 몸 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의 시에서 화자는 부모 없이 떠돌게 된 홍등가의 여인입니다. 타령조로 한풀이하듯 쏟아 내는 말들은 솔직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런 처절함은 동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여성의 신체 감각을 통해 세상의 탐욕과 부정들이 드러나면서 오히려 이에 맞서 싸우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그 힘은 모진 세월과 핍박을 이겨내고 스스로 만들어낸, ‘밥’으로 상징되는 생활의 근육입니다. 화자는 그 근육의 힘으로 허튼 것들을 몰아냅니다.  
.......
 이런저런 물건들이 
 그 잘난 좇대가리 하나씩 들고 
 구멍밥 고파 찾아오는 곳이 홍등가여
 그러니까 홍등가는 구멍밥 식당가다, 이거여
 그것도 다 정부관청 팔아먹는 장사처럼 
 정직한 밥장사가 또 어니 있으며 
 씹할 때처럼 확실한 인간이 또 있어?
......(중략)
어찌하여 구멍 밥 먹는 놈은 거룩하고 
구멍밥 주는 년은 걸보가 되는 거여?
까마귀 뱃바닥 같은 소리 하지를 말어.
구멍 팔아 밥을 사는 팔자 중에 
저 혼 파는 여자 아무도 없어
구멍밥 장사는 비정한 노동이야
물건 대주고 밥을 얻는 비정한 노동이야
......(중략)
허튼정치 허튼 돈줄 권력매춘이요
허튼기업 허튼축제 양심매춘이요
허튼국방 허튼행정 총칼매춘이요
허튼평화 허튼우방 매국매춘이요
허튼개방 허튼숙청 지조매춘이라
......(중략)
이제부터 인생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삶 삽질하는 힘이라 말해둬
이제부터 목숨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넋 몰아내는 칼이라 말해둬
대쪽 같은 사람들아 
금쪽 같은 사람들아
각자 목숨에 달린 허튼밥줄 가려내!
각자 연혁에 얽힌 허튼돈줄 잘라내!
진짜밥 진짜사랑 뉘 아니 그릴쏜가
허튼밥줄 끊고 나면 눈이 뜨일거야

 

 

 

 이 시를 읽다보면 여성의 매춘 행위가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의미로 확장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혼을 팔고 양심을 파는 부정한 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비난받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저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자 앞에서 (타자적)약자가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약자 앞에서 (주체적)강자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정당성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또한 시인은 홍등가의 여인이라는 소수자를 화자로 택하면서 여인의 몸과 영혼을 자신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관조의 태도를 취하거나 스스로에 대한 성찰로 현실을 미화하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판소리 한마당의 형식을 취한 것은 이런 시인의 진정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판소리의 질펀한 해학과 풍자 속에 깃든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한 성토와 고발은 억눌려 있던 영혼들에게 해방을 맛보게 합니다. 이 시가 다소 거칠고 정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울림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백’의 발명 또는 발견 

 


 고정희 시인은 언어를 권력으로 쥐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여성 작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의 시가 거칠게 몰아붙이는 여장부의 언어로 무장했다면 이 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자신이 발명해낸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있다면 점에서 새로운 언어를 발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었던 세계를 되찾는 과정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름 없이 사라져간 여성(소수자)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누가 붙여준 이름일까요? 과연 여성들은 그 이름을 원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들이 기억되길 원했던 것은 그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던 것일까요? 이런 물음들을 던지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 제시하고 있는 ‘여백’입니다. 
 이 여백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대가 흐르고 자연과 인공의 세계가 넘나드는, 한계와 고난이 있는 동시에 기대와 가능성이 꿈틀대고 있는, 그리고 거짓과 진실의 경계에서 누군가의 손을 맞잡아도 어색하기 않은, 원래부터 있던, 우리의 원시세계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들뢰즈가 말한 ‘기관 없는 신체’일 수도, (희음님이 설명해주신 해설에 따르면) 데리가가 말한 ‘히멘’(처녀막이라는 뜻의 ‘사이’의 언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노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전문

 

 

∞귀향 – 소멸과 환생

 

 시인은 이처럼 현실과 존재의 문제에 천착하는 동시에 영원과 평화의 세계에 대한 꿈을 놓지 못했습니다. <외경읽기 귀향의 노래>에서는 시인의 이런 바람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온 몸에 잔뜩 들어간 힘 때문에 한순간 너무 지쳐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의 짐짝 위에 
아직 겨울 찬비가 줄기차구나
저기가 내 그리운 귀착지, 
머나먼 여정을 달려온 나의 말이여
마중 나온 북한산이 다가와 
이제 무릇 날개를 접으라 한다
......

 

 

 하지만 시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삶의 열정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과 만나는 모든 것들에게서 시인은 다시 힘을 얻고 다시 말(馬)에 몸을 싣고 말(言)로 달려 나가려고 합니다.  

 

 

.......
도도한 저녁 숲에 상수리나무들이 젖고 있구나
내 자손만대도 젖고 있구나
여기가 내 사무치는 귀향지, 
방울소리 설렁대는 나의 말이여
동행하는 안산이 나더러 
이제 그만 상처를 싸매라 한다
.......(중략)

 

 

나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속에서 넘치는 말을 받아 
눈그늘 깊게 하는 술 한 동이 빚을 수 있을까
향내 진진한 술 한 잔 받쳐 들고 
나는 너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너무 지쳐서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을 갖습니다. 동시에 속에서 넘치는 말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국 죽은 뒤에도 시인은 스스로 빚어낸 시로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다가가말을 걸고 싶어 합니다.
 지리산에 홀로 산행을 갔다가 실족사 했다는 시인의 마지막은 어쩌면 시인의 인생에서 예견된 가장 찬란한 해피엔딩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험한 산길 위에 한발 한발 발을 디디며 귀향의 꿈을 꾸었을 시인은 세상으로 떨어지는 몸으로 단말마의 마지막 싯구를 완성했을 것입니다.      

 

 

∞ ‘시 공백 세미나’ 먹종이

 

 

 이제 고정희 시인을 떠올릴 때면, 외로운 광야 위에 스스로 발명해낸 언어로 소리 내어 고함치고 있는, 때로는 웃으며 또 가끔은 울며 어딘가로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그리게 될 것 같습니다. 경계 없는 광야에서 늘 경계를 찾아 그곳에서 싸움을 준비하며 스스로를 단련했을 수행자. 
 하지만 그녀에게 이 땅이 허락은 것은 시인의 삶이었으며 그녀는 그 삶을 온전히 불태우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공간을 초월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경험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뜨거운 ‘시 공백’ 세미나였습니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시를 읽어주시는 토라진 님의 목소리가 눈 내리는 오늘 특히나 더 잘 어울립니다.
자신의 한 책의 서문에서 '정확하게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던 신형철도 생각나고요. 뜬금없게도 말입니다.
이 후기에서 시적 언어와 정확하게 공명하고 사랑하는 토라진 님이 보여서인 듯합니다.
혹은 우리의 먹종이 같은, 흐리지만 정확한 한 방향으로 흘러가던 시간이 생각나기도 한 때문인지도요...^^

"우리는 보통 ‘이름 없이 사라져간 여성(소수자)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누가 붙여준 이름일까요? 과연 여성들은 그 이름을 원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들이 기억되길 원했던 것은 그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던 것일까요? 이런 물음들을 던지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 제시하고 있는 ‘여백’입니다."

그날 이런 화두를 던져 주신 토라진 님 덕분에 소수자를 기억하는 방식에도
남성적인 방식과 여성적인 방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우리가 사유의 바깥이라고 부르던 일, 바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던 일은
정말 그쪽이 무엇인가의 바깥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깥처럼 보이기 때문이었어요.
안쪽의 체계에 붙들려 있거나 그 안쪽이라는 체계가 우리에게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이었어요.
실제로 그 일은 고정희 식으로 본다면 그 무엇의 처음을 맞닥뜨리고 그 무엇으로 돌아가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었어요.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고정희가 말하는 여백이 바로 그 '처음'이라는 열린 공백의 자리일 겁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는 태초적 공간! 
지난 시간은 그 열 없는, 그러나 그 어느 자리보다 뜨거운 공간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댓글의 댓글

늘 손을 휘저으며 흐릿한 말들과 감상들을 어찌할 줄 몰라 헤매고 있을 때,
명확하고 선명한 말들로 헤매는 길 위에 이정표를 만들어 주시는 희음님.
댓글에서도 여전히 후기보다 더욱 풍부하고 정확한 언어들로 공명을 일으켜주시네요~~
검은 종이 아래에 있는 뒤안길들을 연필로 힘을 합쳐 꾹꾹 눌러가며
새로운 여백에 같은 듯 다른 글들과 그림들을 완성해나가는 기분입니다. 

늘 바깥처럼 보이는 가장 중심의 원시림은
아마도 끊임없이 번져나가고 있을 것입니다.
비록 보이지 않고,
신기루처럼 금방 사라져버리곤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은 고정희 시인의 시를 다시 읊조리며 잠이 들어야겠습니다.
아마도 깊은 꿈 속 원시림에서 저는 발가벗고 춤을 추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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