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공백 후기] 고정희 시인 +2
토라진
/ 2018-01-21
/ 조회 1,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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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고정희 시인의 유고 시집인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중 세 편의 시를 읽고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주로 8090 시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발과 저항, 종교적인 자기 성찰에 대한 주제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시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녀의 시가 담고 있는 여성적 언어의 힘이었습니다.
∞ 매춘과 ××매춘 읽기
∞‘여백’의 발명 또는 발견
∞귀향 – 소멸과 환생
시인은 이처럼 현실과 존재의 문제에 천착하는 동시에 영원과 평화의 세계에 대한 꿈을 놓지 못했습니다. <외경읽기 귀향의 노래>에서는 시인의 이런 바람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온 몸에 잔뜩 들어간 힘 때문에 한순간 너무 지쳐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삶의 열정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과 만나는 모든 것들에게서 시인은 다시 힘을 얻고 다시 말(馬)에 몸을 싣고 말(言)로 달려 나가려고 합니다.
∞ ‘시 공백 세미나’ 먹종이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시를 읽어주시는 토라진 님의 목소리가 눈 내리는 오늘 특히나 더 잘 어울립니다.
자신의 한 책의 서문에서 '정확하게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던 신형철도 생각나고요. 뜬금없게도 말입니다.
이 후기에서 시적 언어와 정확하게 공명하고 사랑하는 토라진 님이 보여서인 듯합니다.
혹은 우리의 먹종이 같은, 흐리지만 정확한 한 방향으로 흘러가던 시간이 생각나기도 한 때문인지도요...^^
"우리는 보통 ‘이름 없이 사라져간 여성(소수자)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누가 붙여준 이름일까요? 과연 여성들은 그 이름을 원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들이 기억되길 원했던 것은 그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던 것일까요? 이런 물음들을 던지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 제시하고 있는 ‘여백’입니다."
그날 이런 화두를 던져 주신 토라진 님 덕분에 소수자를 기억하는 방식에도
남성적인 방식과 여성적인 방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우리가 사유의 바깥이라고 부르던 일, 바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던 일은
정말 그쪽이 무엇인가의 바깥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깥처럼 보이기 때문이었어요.
안쪽의 체계에 붙들려 있거나 그 안쪽이라는 체계가 우리에게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이었어요.
실제로 그 일은 고정희 식으로 본다면 그 무엇의 처음을 맞닥뜨리고 그 무엇으로 돌아가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었어요.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고정희가 말하는 여백이 바로 그 '처음'이라는 열린 공백의 자리일 겁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는 태초적 공간!
지난 시간은 그 열 없는, 그러나 그 어느 자리보다 뜨거운 공간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늘 손을 휘저으며 흐릿한 말들과 감상들을 어찌할 줄 몰라 헤매고 있을 때,
명확하고 선명한 말들로 헤매는 길 위에 이정표를 만들어 주시는 희음님.
댓글에서도 여전히 후기보다 더욱 풍부하고 정확한 언어들로 공명을 일으켜주시네요~~
검은 종이 아래에 있는 뒤안길들을 연필로 힘을 합쳐 꾹꾹 눌러가며
새로운 여백에 같은 듯 다른 글들과 그림들을 완성해나가는 기분입니다.
늘 바깥처럼 보이는 가장 중심의 원시림은
아마도 끊임없이 번져나가고 있을 것입니다.
비록 보이지 않고,
신기루처럼 금방 사라져버리곤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은 고정희 시인의 시를 다시 읊조리며 잠이 들어야겠습니다.
아마도 깊은 꿈 속 원시림에서 저는 발가벗고 춤을 추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