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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후기] 위험한 책 3부 :: 0122(월) +3
널깊 / 2018-01-23 / 조회 1,389 

본문

<1월 22일 니체 세미나 후기>

  이번 세미나는 저번 시간에 미처 다루지 못했던 15장 ‘위버멘쉬를 가르친다’와 관련하여 위버멘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작했다.

 

 먼저 위버멘쉬는 ‘움직임’의 개념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고정되어있는 하나의 정체성(명사적 의미)이 아닌 무수히 많은 정체성들로 항상 변신해가는, 곧 ‘넘어서기’라는 동사적 의미를 가진다. 한편 디오니소스와 관련해, ‘생성으로 움직이는 세상 원리 자체’인 디오니소스의 경지가 진정한 위버멘쉬의 경지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에 대한 ‘의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의욕한다’(영웅)의 단계라면 디오니소스는 그 위에 자리한 ‘나는 존재한다’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 존재 자체로만 살아가는 것. 어떠한 의욕도, 지향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존재 자체가 삶이 되는 것. 그것이 도덕과 같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어린아이의 천진함이고 위버멘쉬인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니체가 약자와 비교하며 지향해야할 지점으로 제시했던 ‘강자’라는 개념과 위버멘쉬는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물음도 제기됐다.

  위에서 말했듯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존재이다. 인간에서 위버멘쉬로의 넘어섬은 철저한 인간적임의 철저한 ‘몰락’을 요구한다. 한편 강자는 자기의 ‘도덕’을 갖는 자라고 설명되어왔다. 강자는 외부가 아닌 자기를 기준으로 하는 자기도덕의 주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도덕’이란 말이 갖는 인간적 한계에 주목한다면 강자는 위버멘쉬보다 ‘인간적인’존재라는 점에서 위버멘쉬와 동일하게 생각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위버멘쉬는 도덕의 영역을 넘어선 경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에 대해 니체의 강자와 약자 개념과 위버멘쉬 개념은 다른 차원에 있는 문제이므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생각도 제시됐다.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위버멘쉬는 동사적 개념으로, 우리가 삶에 대해 가져야 할 전반적 마음가짐과 관련되어있다면(매순간 ‘변신하기’) 강자의 개념은 니체가 제시하는 삶에 대한 ‘구체적인 윤리’인 것 같다. 어떻게 사는 삶이 ‘약자’가 되지 않는 삶인지에 대해 ‘강자’라는 구체적 유형을 제시함으로써 니체적 윤리를 전달했던 건 아닐까. 순간 순간의 삶에서 ‘강자’의 유형으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위버멘쉬가 동사적인 의미임을 생각하며 항상 새로운 창조와 생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 ‘평등’이라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니체는 모두가 따라야 하는 보편적 도덕을 정립해 모든 것은 그 도덕 앞에 평등하다고 이야기하는 ‘독거미’의 정의(justice)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보편적 가치의 정립과 그것의 평등한 적용에는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폭군적 열망”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원한의 감정’이 내재되어 있다. 이 ‘원한의 감정’은 자기 덕을 기준 삼지 않고 타인의 덕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덕을 규정하려는 ‘약자의 정신’과 연관된다. 이런 이유에서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이라는 가치는 니체에게 있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평등’이라는 가치가 절대적으로 나쁜 건 아니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겠다. 세미나에서도 이야기가 나왔듯, 근대정신 속의 껍데기뿐인 ‘평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평등’이라는 가치자체가 나쁜 걸까? 이런 물음에 대해 세미나에서는 보편적 가치, 기존의 가치에 속하는 요소들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사자의 단계’이며 그런 무조건적 부정을 넘어서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책에서 고병권 선생님은 “우리는 어떤 덕을 평등하게 적용하기 전에 왜 덕이 같아야 하는지부터 생각해야 되는 것 아닐까?”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평등’과 같은 통념적 가치들에 대한 비판보다는 개인 각각의 상황과 기준을 무시하고 규정되는 보편적 도덕에 대한 물음과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기준, 자신의 ‘좋음’과 ‘나쁨’에 맞추어 자기도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이야기 주제는 ‘영원회귀’이다.

  난쟁이의 원형으로서의 시간과 차라투스트라의 원형으로서의 영원회귀는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됐다. 난쟁이의 원형으로서의 시간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면 차라투스트라의 영원회귀 순간이 계속 반복된다는 의미에서 난쟁이의 그것과 같지만 그 순간순간마다 ‘차이’가 발생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난쟁이에게 원형으로서의 시간은 그저 반복이고 따라서 피로감에 빠져 어떤 창조나 생성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차라투스트라의 원형으로서의 영원회귀는 매 순간이 차이를 갖는, 따라서 적극적 창조와 생성의 대상임을 확인시켜주는 긍정의 정신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 ‘원형’이 ‘원’이 아니라 ‘점’을 의미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가 선형으로 시간을 파악하는 것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하다는 것이 당연하게끔 만들며, 이러한 고정관념을 부수기 위해 니체는 원형으로서의 시간을 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정말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 순간에 콕 찍는 점처럼 우리의 순간들도 그런 발랄한(?) 창조와 생성의 반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영원회귀와 관련한 이야기를 한 번 더 나눴는데, ‘제 7의 면’ 즉 혼돈과 우발성을 삶으로 가져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발적 사건은 미리 대처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삶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진정으로 차이를 만드는 건 우발과 혼돈이다. 예상할 수 있다면 그건 ‘놀이’가 될 수 없다. 이후 미리 예견할 수 없는 미래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우발성과 혼돈에 긍정에 있다는 이야기도 제시됐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대신에 말이다.

 

 그러던 중 빅뱅으로 우리가 생겨났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빅뱅이 발생하기 전 그 안에는 138억년이 그대로 존재했었다고 한다. 그 시간은 빅뱅이 발생함으로써 우주 내에 펼쳐지게 됐고 모든 존재는 그 우주 안에서 잠재성만 갖고 있다가 ‘우연적’으로 탄생한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그 과정에서 인간 존재는 몇 조분의 일의 확률로 우주에 태어난다.

  이후 이런 천문적 관점,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이 아주 작은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길 요구한 니체의 생각과도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중요히 여기고,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모든 도덕들과 의무들은 그것들 자체 내에 당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우연적 존재라는 사실이 그를 증명한다. 우리의 존재가 튼튼한 밑바탕을 가지고 ‘필연’으로서 설명되지 못함은 불안해야할 이유가 아니라 ‘창조’에 적극적이 되어야할 이유가 된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만들면 된다. 누가, 스스로가!

 

 다음으로 권력의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력의지란 ‘땅에서 새싹이 돋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처럼 권력의지는 모든 사물이 갖고 있는 ‘생존의 감각’(생명력)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는 무생물도 가지고 있는데 거대한 성당이 갖는 위엄이나, ‘스탕달 신드롬’처럼 위대한 명화 앞에서 압도당할 때가 예로써 제시됐다. 같은 이야기로 회사 건물 내에서 ‘파티션’의 배치가 갖는 사람의 심리에 대한 억압의 힘과 푸코가 다룬 바 있는 ‘판옵티콘’에 대한 이야기, 또 ‘유니폼’과 같은 것이 갖는 제제의 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이처럼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는 누구에게나 어느 사물에나 내재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권력의지들 사이에도 ‘위계’ 즉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은 보다 높은 권력의지를 갖는 것, 즉 ‘긍정의 권력의지’를 갖는 것이다.

 

 이번 세미나의 마무리는 ‘신이라는 인간적 질병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영원회귀를 발견했고, 그것을 통해 위버멘쉬라는 위대한 건강에 이르렀’던 차라투스트라를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계속해서 읽을 다음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보자는 제안으로 끝이 났다.

  세미나를 하면서 제시된 ‘밤’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게 남는다. 깜깜한 밤은 주변에서 늘 반짝이던 ‘가치의 빛’들을 다 꺼버린 상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밤의 시간을 거쳐 자신의 ‘어린아이’를 잉태할 수 있었다. 자기만의 가치를 정립하고 찾을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자기 내면의 목소리만 들리는 깜깜한 밤의 시간인 것이다. 그만큼 고독하고 또 외롭겠지만, 그 깜깜함에 용기 있게 뛰어들 수 있어야만 우리의 삶을 태양빛의 풍요로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게 아닐까. 그 어떠한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는, 창조의 빛만이 가득한 풍요로 말이다.

 

댓글목록

연두님의 댓글

연두

와, 후기 빛처럼 빠르고 정말 좋네요.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위버멘쉬는 아직 잘 잡히지 않는 개념이에요.
강자와 위버멘쉬의 관계에 관한 질문은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며 계속 붙들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위버멘쉬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도 세미나를 통해 더 확실해진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쉽게 이해하려고 두 개를 동치시키려고 한 듯.

밤이라는 시간의 이미지에 관해서 제가 얘기를 했었죠.
널깊님의 좋은 발제 덕분에 밤의 이미지가 저한테 도드라져서 그 때 얘기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림자, 정오의 시간, 걷는 법을 잊어버린 차라투스트라..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밤의 이미지가 선명해지는데,
아, 정말 이래서 세미나가 좋구나 다시 느꼈어요.

평등에 관한 문제는 바르샤님이 정말 적절하게 제기해 주셨는데, 저는 별로 생각을 안 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논의를 통과하다 보니, 그것은 너무 자명하게 좋은 것 같지만 강력한 이데아이며,
특히 원한의 감정을 평등만큼 크게 자극하는 가치는 없을 것 같아서 아차 싶었습니다.
불평등해도 괜찮다는 건 아니구요,
나에게 평등은 어떤 가치인가, 평등을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등을 넘어서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이 남네요.

널깊님의 반짝이는 언어를 세미나에서 만날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무척 아쉬워요.
서울을 '떠남'이 당연히 새로운 생성과 맞닿아 있겠죠. 그간 고마웠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1. 차라투스트라와 디오니소스의 웃음과 춤이 갖는 차이

차라투스트라가 위버멘쉬-영원회귀-긍정을 '의욕'하는 존재라면,
디오니소스는 '존재' 자체로서 위버멘쉬-영원회귀-긍정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욕'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가 그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의욕'(노력)하는 음악가-미술가들을 봅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진정한 예술가일 것입니다.

2. 위버멘쉬와 강자에 대하여

먼저, 위버멘쉬는 인간적 한계나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위버멘쉬란 넘어서는 자들로, 넘어섬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것을 정체성으로 갖는 자이며,
정체성을 극복하는 것만을 정체성으로 갖는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버멘쉬란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기'라는 동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하지요.

한편, 강자/약자는 힘의 의지(권력의지)와 연관된 개념입니다.
강자는 힘의 양적 차이와 관련하여 긍정하는 자이며, 힘의 질적 방향과 관련하여 능동적인 자입니다.
(반면 약자는 힘의 양적 차이와 관련하여 부정하는 자이며, 힘의 질적 방향과 관련하여 반동적인 자입니다.)

따라서 위버멘쉬와 강자는 이런 관계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강자(약자)가 우리가 삶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힘의 의지'를 행사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위버멘쉬는 내 안의 강자적 의지를 강화하고, 약자적 의지를 축소시키는 '방법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원문을 읽읍시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를 만나기 위한 기본적인 것들은 준비된 듯합니다.
<차라투스트라>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개념, 혹은 주제들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원문을 통해 우리의 문제의식들을 더 풍성하게 만들면 될 것입니다. ^^

소소님의 댓글

소소

이제 세미나의 반을 지나왔는데 저는 니체의 개념들이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건 왜 일까요? 하하
니체의 이야기들이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내 삶으로까지는 가져오지 못하는 것 같고, 마음속에서만 말들이 맴돕니다.
그래도 심기일전하여 세미나 완주를 목표로!

널깊님이 발제도 후기도 이렇게 척척 멋지게 올리는 거 보니 이제 '못 봄'이 더 아쉽네요...
짧았지만 함께해서 좋았고, 널깊님의 영롱한 목소리가 한동안은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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