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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 후기] 철학수업_2부 만남과 자유 :: 타자와 넘어섬에 대하여
오라클 / 2018-01-23 / 조회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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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만남과 자유 :: ‘타자와의 만남’이 나를 넘어서게 한다          

 

타자와 자유 > 스피노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양태(mode)’라고 부른다. 세상사란 모두 양태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다.  2부 만남과 자유는 “타자가 어떻게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타자가 나를 자유롭게 하려면 “나는 어떻게 타자와 만나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여기서 타자란 비-인간 양태인 사건이나 사물이 될 수도 있고, 인간 양태인 사랑-연인이나 우정-친구가 될 수도 있다. 

 

타자, 나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존재 > 나를 나로서 구성하는 정체성(감각ㆍ정서ㆍ정신 같은)은 동시에 나의 한계를 구성한다. 나의 정체성을 변형시키고 나의 정체성을 극복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나와 다른 감각ㆍ정서ㆍ정신을 가진 타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나와 동일한 감각ㆍ정서ㆍ정신을 가진 사람은 나의 외부 존재하는 또다른 나로서 ‘동일한 자’이며, 나와 다른 감각ㆍ정서ㆍ정신을 가진 존재만이 ‘타자’이다.

 

타자, 나를 넘어서게 하는 존재 > 이들 타자는 나의 단일한 정체성을 해체하여 수천의 자아를 향해 개방하도록 한다. 이런 방식으로 타자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이들 타자는 내 안의 타자성을 깨워 나의 정체성에 균열을 만드는 존재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는 내 안에 존재하는 외부, ‘내재하는 외부’이다. 내가 끊임없이 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만남이 필연적이다. “나는 항상 나로 머물러 있지만, 그것은 항상 다른 내가 되는 방식으로 그랬다.” 내가 다른 내가 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이다. 

 

매혹 - 수동성 – 신체성 > 타자(사물, 사랑-연인, 우정-친구)에 대한 매혹은 강력한 수동성을 특징이로 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외부적인 힘에 휘말려 끌려가는 것이다. 그것은 매혹이 신체로부터 일어나는 감각이며, 이성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체성(비이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매혹과 자유 :: ‘사물에 대한 매혹’이 나의 감각을 다르게 한다          

 

사물에 대한 매혹 > 사물에 대한 매혹이란 어떤 우연한 만남으로 사물에 사로잡히는 것이고, 그 사물에 이끌려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는 ‘사건’이다. 즉 사물에 대한 매혹이란 사물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미는 것이고, 내가 그 사물의 손길에 말려들어가는 것이다. 그 사물을 따라 우리는 다른 세계를 꿈꾸며 다른 세계를 구성한다. 사물에 매혹당하는 것은, 돈으로 표시되는 사물의 가치와 사물의 용도를 지우는 것이다. 즉 사물을 인간의 도구로 취급하는 ‘사물의 도구성’을 넘어, 사물로서의 사물과 만나는 ‘사물의 사물성’을 되살리는 것이다. 내가 아는 가치나 용도를 벗어나, 나의 시선 바깥에서 생각지 못했던 어떤 것으로서 사물이 다가오는 사건이다. 

 

사물과 인간중심주의 > 따라서 사물이란, 어떤 힘도 갖지 못한 채 인간의 목적성에 봉사하는 단순한 ‘도구’나, 어떤 의지도 갖지 못한 채 인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무력한 ‘피동성’이 아니다. 반대로 사물은 우리의 신체를 사로잡고 우리의 감각을 바꿔놓으며 다른 세계로 이끄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목적으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인간중심주의적 관념은 사물을 인간의 목적성 안에서 본다는 것이다. 이는 사물이 갖고 있는 힘과 생명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안목없는 이의 무능력’이다.

 

수동성과 자유(넘어섬) > 사물의 매혹에 사로잡혀 뜻하지 않는 세계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수동성’이 ‘자유’에 더 가까이 있다. 매혹당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안목이고 능력이며, 그 매혹을 따라갈 줄 아는 용기야말로 자유를 향해 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수동성’이란 내게 다가온 것을 통해 나의 벽, 나의 관념, 나의 감각을 넘는 어떤 ‘넘어섬’을 뜻한다. 자아의 감옥을 넘어서, ‘나’란 이름으로 구축된 성을 넘어서, 내가 알지 못하던 사물이나 사람, 혹은 다른 어떤 것의 세계로 비약하게 되는 사건을 뜻한다. 자유란 이 넘어섬을 뜻하는 것이며, 이 넘어섬을 통해 다가오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다. 

 

     사랑과 자유 :: ‘사랑에 대한 매혹’이 나를 넘어서게 한다          

 

사랑은 자아를 벗어나게 한다 > 평소에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좋아하고 내가 늘 하던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는 ‘나’의 주변을, ‘자아’의 주변을 위성처럼 맴돌고 있다. 사랑의 매혹은 나로 하여금 그 위성의 운동에서 이탈하여 뜻하지 않는 곳, 생각지 못한 곳으로 가게 한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하지 않던 짓을 하기 시작한다. 매혹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나를 벗어난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벗어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자아’이다. 사랑과 매혹의 수동성이란, 이 자아를 벗어나게 하는 ‘어쩔 수 없음’이다. 

 

사랑은 나를 넘어서는 사건 >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통해 다른 감각을 갖게 만들고, 다른 세계에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이고, 그것을 통해 나를 넘어서는 사건이다. 사랑이 하나의 사건인 것은, 사람이 떠나도 이미 예전의 나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다른 감각과 다른 세계가 내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잊혀지지 않는 사랑의 기억은 새로운 사랑을 저지하지만, 신체에 남겨진 사랑의 감각은 새로운 사랑의 모태가 된다.  

 

타자화하는 사랑, 자아화하는 사랑 > 2가지 유형의 사랑이 있다. 타자성에 휘말려 자아를 벗어나는 매혹의 사랑 vs 자아의 궤도를 확장하면서 타자를 끌어들이는 사랑. 전자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매혹되어 휘말려들어가는 사랑이고, 후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서 찾으며 다가가는 사랑이다. 전자는 자신의 감각과 취향이 바뀌는 사랑이고, 후자는 자신의 감각과 취향을 투영하며 기뻐하는 사랑이다. 전자는 자아를 맴돌던 궤도를 이탈하는 사랑이고, 후자는 타인마저 자아의 궤도 속으로 끌어들여 위성으로 만드는 사랑, 나의 이니셔티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자아를 완벽하게 넘어서게 될 때, 그는 매혹의 특이점에 다가가는데 성공한다. 이제 그는 어느 공간에서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우정과 자유 :: 나를 넘어서 ‘우정에 대한 공감’에 이른다          

 

친구를 만드는 능력 :: 공감능력 > 친구를 만드는 것은 일차적으로 공감하는 능력이다.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고 그의 입장에서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다. 나우시카는 통념이나 적대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우정은 자신이 있던 곳을 떠나 돌아올 수 없는 것으로 가게 한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소리가 들려.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래서 갈 수 있을 만큼 가보려는 것 뿐이야.” 

 

나를 넘어서 우정을 만든다 > 동료의 마음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고, 친구들과 공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멀리있는 자, 다른 세계에 속한 자의 마음을 아는 것이고, 적으로 다가온 자와 공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적대감 없이 ‘적’과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선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의 눈으로 그의 행위를 보아야 한다. 그와 함께 행동해야 한다. 그의 마음을 알고, 그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게 될 때, 그도 마음을 열게 된다. 나우시카는 거기에 자신을 건다.

 

친구와 스승 >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이탁오. 그저 친하게 지내고 자주 만나 어울린다고 친구인 게 아니다. 한번을 만나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하여 이전에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하는 이. 그리하여 좀더 좋은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이, 그게 진정 좋은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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