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발제] 0년 - 3장 복수
토라진
/ 201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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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수]
복수에 대한 열망은 섹스나 음식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인간적인 욕망이다. 인류에게는 다른 인류의 고통을 통해 즐길 수 있는 지나친 자유가 있고, 가끔은 의지를 가지고 최악의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 복수의 잔혹성을 설명할 방법이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보복이 막연히 행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복과 복수에는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나치 독일의 운테르멘셴(열등 인간)취급을 받은 러시아인들이 폭력적인 양상을 쉽게 드러냈던 것은 그들이 당한 수치와 수모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독일 민간인들이 누리고 있는 상대적 풍요에 크게 분노했다. 결국 독일에서 소련의 행동을 특별히 잔혹하게 만들었던 것은 인종적 분노, 계급적 질투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들은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독일 여성에 대한 성폭행, 특히 거세된 ‘지배 민족’의 옛 전사 앞에서 무제한의 부를 보유한 듯 보이는 독일 여성을 성폭행 하는 것은 무시당한 운테르멘셴이 다시 남자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러한 복수의 여러 형태들은 1945년 전후로 들끓게 되었는데, 이러한 흐름은 한 개인이 주도한다고 발생하지 않는다. 복수 역시 리더십과 조직화를 요하며 공식적인 독려 또한 필요한 것이었다. 공식적인 규제의 미비와 권력층의 묵인은 복수의 불길은 더욱 크게 불타오르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프랑스 : 광풍의 숙청
프랑스에서 여성들은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이 적과 협력한 혐의는 대부분이 섹스였다. 이는 어떤 법률에 그거해도 범죄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사례들을 다루기 위해 1944년 프랑스는 새로운 법안을 만들었다. 점령자와의 동침은 비애국적인 행위로 모든 시민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이었다. 매춘 협력자들은 비애국적일 뿐 아니라 부르주아 가정의 도덕에 대한 위협이었다. 여기에 경제적 측면에 대한 질투와 정당한 분노가 더해지면서 분노는 더욱 커졌다.
독일놈 여자를 고발하는 데 가장 열성적이 사람들이라고 해서 전시에 걸출하게 용기 있는 행동을 했던 자들도 아니었다. 복수는 때로 과감히 떨쳐 일어나지 못했던 데 대한 죄책감을 덮는 일종의 방편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치의 폭압에서 살아남은 10퍼센트의 유대인은 고향에 돌아와서도 환영받지 못했다.(129쪽 사례) 폴란드에서 유대인들은 부자라는 인식 때문에 폴란드에게 쫓겨났다. 독일 점령기에 고통 받았던 폴란드인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고통 받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풀려고 했다. 이후 소련 군대가 점령했을 때는 공산주의자의 대부분이 유대인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유대인들을 숨겨 주었던 사람들마저 약탈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유대인의 재산을 약탈해서 생긴 부로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기도 했는데, 유대인 약탈은 어떤 면에서는 거대한 사회 혁명의 일부였다. 이런 유형의 보복은 폴란드 관료사회와 경찰 내 강력한 기회주의자들의 암묵적이면서도 적극적인 방조 없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폴란드인들이 가한 보복의 성격
1918년 실레지아는 폴란드, 독일간의 주도권 문제로 분쟁 지역으로 남게 되었던 곳이었다. 폴란드, 독일의 주도권을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독일이 다수표를 얻었다. 이 투표가 결정 나기 전후로 보복은 폭력의 형태로 반복되었다. 독일인들의 폭력 못지않게 폴란드인들의 집단 보복은 문헌에 남아있지 않을 뿐 못지않은 것이었다. 무고한 독일인들이 고발당해 끔찍한 고통을 받았다. 폴란드어를 하지 못하면 실레지아에 살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소유물의 판매도 금지 당했다. 그 중 무장조직에 의한 폭력은 최악이었다. 가장 악랄한 무장조직 인사 중 일부는 독일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확실한 복수가 하나의 중요한 이유이긴 했지만 역시 물질적이면서 계급적인 질투는 피에 대한 욕망을 더욱 부추겼다. 교사나 교수, 사업가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이 인기 있는 목표물이었다.
이러한 비슷한 일들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인들의 독일인들에 대한 보복 행위에서도 나타났다. 1945년 여름은 계급적으로나 인종적인 측면에서 복수의 시기였다. 그리고 상층부의 장려(체코 대통령의 선언문, 재산권 박탈에 대한 법령의 공포, 특별인민재판 등)로 그들의 죄의식은 흐릿해져갔다. 폴란드 무장조직의 체코 버전인 혁명 수비대의 폭력은 국가의 최고위급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와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폭력을 당한 경우도 빈번했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여배우 마르가레테 셸은 단지 세련되었다는 이유로 수모를 당했다.
유대인의 비범한 자제력
복수의 비범한 자제력을 보여준 개별적인 사례들이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조직적으로 ’눈에는 눈‘ 법칙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이는 욕망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1944년에 결성된 유대인 여단은 개인의 무책임한 행위가 모든 이의 보복을 실패로 이끌거라며 보복의 자제를 명령했다. 여단은 ‘틸하츠 티지 게셴프텐’(‘내 엉덩이를 핥아라’라는 뜻)라는 보복 단체를 만들어 이를 실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보복을 행한,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코브너 같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146~147쪽).
유대인들의 복수는 정치적 지지가 없었기 때문에 결코 실행되지 못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인종적, 종교적 충돌로 갈등을 일으킬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적은 독일인이 아니었다.
복수의 대상은 자신들에게 폭력을 가했던 나치나 식민 지배 국가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와 나치 부역자들이 서로의 적이었으며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주의자가 서로를 저격했다. 이 과정에서 점령군과 정부의 권력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이러한 갈등과 긴장을 악용했다. 독일이 없었다면 프랑스 정부의 반동적인 귀족들이 권력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며, 크로아티아의 살인적인 안테 파벨리치와 파시스트 우스타샤(우익단체)도 실권을 쥘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마오가 권력을 잡게 된 이유 역시 일본의 폭력적 지배 덕분이었다.
일본은 국민당의 한 파벌과 한 패가 되기도 하고 다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내 내전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서구 연합국들은 자신의 편에 서서 싸웠던 병력을 무단해체하고 탄압했을 뿐 아니라 부역자 출신의 일부 엘리트들이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소련은 동구권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이용했다.
분명했던 적과의 일시적인 동맹은 외부가 아닌 국내의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의 파시스트 보복 과정은 참혹한 것이었다. 공산당이 즉결심판으로 보복을 단행했다면 레지스탕스들은 무법적 폭력과 약탈을 일삼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복수는 혁명을 위한 보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품고 있었다. 공산주의 파르티잔들은 숙청을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필수불가결한 투쟁으로 간주했다. 한 때 파르티잔을 지지했던 연합군 당국은 파르티잔에 의한 혁명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파르티잔을 신속히 무장해제하려 했다. 하지만 파르티잔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이 이곳을 포기하는 데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그리스에서도 일어났다. 그리스인민해방전성과 해방군은 농촌 지역에 일종의 게릴라 국가를 세웠고, 인민재판을 통해 혁명의 모든 적을 처리했다. 이후 우파에 의한 보복에 대한 재보복으로 이루어지면서 내전은 3년간 이어졌다.
종전은 해방이 아니다 : 동인도제도, 인도차이나, 말레아 반도의 복마전
1945년 아시아인들의 복수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에게 직접 향한 것은 아니었다. 복수는 일본 점령 이전의 다양한 부역자들을 겨냥하고 있거나 서구 식민 강대국에 붙어 특권을 가졌거나 부유하다고 간주될 때 – 아시아의 유대인이라 불리는 중국인들 –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복수의 형태가 진행된 데에는 일본이 피식민국 사람들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악용해 반서구, 반중 감정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전시에 말레이 반도의 반일 저항 세력 상당수는 중국에서 왔다. 말레이 공산당 역시 대부분이 중국계였다. 전후의 말레이 공산당이 조직한 반일 군대는 일본인에게 부역한 지역민에게 신속한 보복을 개시했는데, 보복 대상 대부분이 인도계나 말리이계였다. 이후 영국 정부에 의해 중국인들이 말레이계와 동등한 시민권을 인정받게 되자 결국 말레이계는 중국계를 반격하게 시작했다. 반격을 주도한 것은 갱단 보스인 키야이 살레흐가 이끈 ‘사빌라 레드밴드’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연합군은 이전의 일본군 경비대를 이용해 인도네시아인들의 저항을 막았다. 이후 일본이 항복하고 물러나게 되었지만 새로 설립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인 수카르노를 비롯해 권력 인사들은 일본과 손을 잡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수카르노의 독립 선언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파시스트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본의 음모로 간주했다. 결국 수카르노는 전시 일본이 벌인 강제동원을 지지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와 함께 일본이 이끄는 십대 중심의 청년조직 프무다는 중국인이나 유라시아인, 인도계 또는 네덜란드 편에 섰던 다른 소수민족들에 대한 무차별한 보복을 시작했다.
이는 또 다른 피의 보복을 불러왔다. 프무다 전사가 영국군을 총으로 쏜 사건 이후 영국군의 응징이 이루어졌고 네덜란드에서는 암살단을 파견해 민간인 수천 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인도네시아 장악을 방지하는 명목으로 인도네시아 군부는 쿠데타로 수카르노를 축출했으며 전국 규모의 공산주의자 숙청으로 이루어졌다. 정권을 잡은 수하르토는 일본 군대에서 훈련받고 제국주의 사상을 주입받은 인물로 1945년 네덜란드에 대항해 싸우며 32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프랑스인의 피를 마셔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일본 점령기에도 비시 정권(프랑스 정권)의 행정적인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1945년 해방 이후 베트남의 호치민은 프랑스 지배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알제리에서도 프랑스에 대항해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무슬림들은 나치로 분류되어 진압되었는데(알제리 전투 –173~174쪽), 이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독립요구가 일본의 파시즘 음모라고 불린 것과 같은 셈이었다.
9월 20일 하노이에서는 프랑스가 베트남 지배권을 되찾으려는 음모를 짜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베트남인 수천 명이 프랑스인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력의 폭발은 호찌민의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던 순간의 하노이에서 터졌다. 몇몇의 프랑스 군인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기술적인 문제로 연설이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 프랑스가 방송을 막았다는 의심으로 확대되었다. 베트남인들은 닥치는 대로 프랑스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식민주의 연대의식을 가진 영국이 프랑스를 도와 공공기관에 베트남인들을 쫒아내고 프랑스인들이 재무장하도록 도왔다. 이에 힘을 얻은 프랑스인들의 보복이 다시 시작되었다. 바통을 이어받아 베트남인들의 재보복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프랑스 민간인들이 폭행을 당했으며 베트남인들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 일본인들과 싸우는 셈이 되었다. 이후에도 피가 피를 부르는 복수전은 1949년 남부 베트남이 사이공을 수도로 정해 독립하기 전까지, 북부 베트남에서는 1954년 호찌민과 동료 공산주의자들이 하노이를 수도로 하여 사회주의공화국 통치자로 인정받기 전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