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발제] 위험한 책 3부 :: 0122(월)
널깊
/ 201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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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차라투스트라』의 구성과 스타일 :: 발제
1. 『차라투스트라』여행 가이드북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데 필요한 구체적 정보들을 전달하고 있는 장으로, 차라투스트라의 여정 속에 등장한 여러 요소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고도의 변화
높이 > 차라투스트라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기거한 동굴.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높다.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했던 높이에서 세상을 본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처럼 높은 곳에 있으므로 ‘지상의 악덕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동굴로 쉽게 기어오를 수 없다.
깊이 >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높은 곳 뿐 아니라 더없이 깊은 계곡과 물 속도 들어가 봐야 한다. 대지를 배경으로 할 때 높은 것이 하늘을 배경으로 할 때는 깊은 것임을 차라투스트라는 알았다. “산정과 심연은 하나다.”
반복, 그리고 차이 >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의 하산과 또 다시 높은 동굴로 돌아가는 등정을 1부, 2부, 3부, 4부에서 계속 반복한다. 그러나 하산과 등정의 반복이라는 형식 자체는 동일하지만 반복이 있을 때마다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차이가 나타난다. 그는 하산과 등정의 반복을 거칠 때마다 건강한 신체로 변신한다. 이는 곧 영원회귀의 ‘반복’과도 관련되어 있다.
◉ 계절
여름 > 천한 자들의 도덕에 역겨워하는 자들에 심한 갈증을 겪는 계절. 갈증을 해결해 줄 시원한 샘물은 저 높은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에 있다.
겨울 > ‘시장터의 파리떼’처럼 들끓는 왜소한 덕들을 모두 쫓아낸다. 한편으로는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듦으로써 ‘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정지해있다’는 오해를 불러온다.
봄 > 겨울에 생긴 오해를 박살내어주는 ‘봄바람’이 부는 계절. 봄바람은 ‘성난 뿔로 얼음을 깨부수는 난폭한 황소이며 파괴자’. 모든 신성한 것들의 거짓을 파헤쳐 태양 아래 놓는 계절.
가을 > 결실의 계절.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 자유로운 죽음을 선택하는 계절. 차라투스트라의 중요한 가르침 “제때 죽어라.”를 담고 있는 계절. 잘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잘 죽는 법도 배워야 한다. 때를 맞추어 떨어지는 것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젊음을 얻는 길이다.
◉ 하루 중 시간
헤겔의 황혼과 니체의 황혼 > 헤겔은 철학은 황혼에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생이 충분히 익어 떨어져갈 무렵, 철학자는 비로소 생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니체에게 황혼의 철학은 위험한 것이다. 생보다 죽음이 가까운 시점에서 생을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니체는 황혼을 낡은 것들이 사라져가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니체의 황혼은 고집스러웠던 낡은 신이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는 만큼 불확실하고 걱정스러운 시간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의 밤 > 차라투스트라는 불확실한 시간인 황혼 뒤에 찾아온 밤을 용기 내 맞았다. 그에 따르면 “밤은 오히려 밝고 조용했으며, 밤에 찾아온 것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고요한 시간인 만큼 밤에는 ‘사랑하는 자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밤을 여인이라고, 자신의 여주인이라고 부른다. 그는 밤과 은밀한 속삭임을 나눈다. 그리고 그 은밀한 속삭임은 곧 위대한 결실, ‘차라투스트라의 어린아이의 잉태’로 이어진다.
차라투스트라의 새벽과 아침 > 밤을 지난 새벽은 황혼과 대비를 이루는 시간이다. 그것은 곧 태양이 떠오를 것을 예고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스스로 자신의 어린아이로 태어날 준비를 한다. 마침내 차라투스트라가 위버멘쉬로 변신했음을 암시하는 신호가 나타나는 것은 아침이다. 아침이 되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성숙을 느끼면서 위버멘쉬의 시간인 정오를 맞이하려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정오 >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강연을 시작한 것은 오후였었다. 태양이 사라져가고 그림자가 길어질 때 사람들은 자신의 길어진 그림자를 자기보다 위대한 존재인 양, 신으로서 숭배하기도 했다. 위대한 정오는 신이라는 인간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시간으로 ‘위버멘쉬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오류가 사라지고 태양이 가장 많은 에너지를 베푸는 시간. 위버멘쉬가 되지 않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시간이다.
◉ 동물들
『차라투스트라』에 등장하는 많은 동물들은 각각 어떤 덕의 특성을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인간형을 표현하기도 한다.
독수리와 뱀 > 차라투스트라와 가장 깊이 연관된 동물들. 독수리는 높이 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지를 지닌 동물, 고독하면서도 강한 동물. 황혼의 부엉이가 반성하고 사색하는 새라면 아침의 독수리는 공격하고 행동하는 새이다. 뱀은 지혜의 상징. 땅을 기어가며 대지를 읽는다. 뱀의 원형 이미지는 영원회귀를 나타내기도 한다. 한편 차라투스트라의 환영 속 검고 무거운 뱀은 삶에 대한 긍정을 시험하는 끔찍한 고통을 의미한다. 또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가 우리 신체를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는 여러 충동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와 두더지 > 새는 법, 제도, 도덕, 관습 등과 같은 중력의 영으로부터의 탈주를 의미. 차라투스트라는 ‘중력의 영’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새의 천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새와 반대로 중력에 대한 철저한 예속을 상징하는 것은 난쟁이와 두더지. 난쟁이는 중력에 굴복해서 키가 자라지 않고 두더지도 중력 때문에 땅으로만 파고든다.
독거미 > 조심해야 할 동물. ‘원한의 정신’이라는 독으로 무장한 곤충. 자기 능력과 덕에 기초하지 않고 타자의 능력과 덕을 사악한 것으로 비난하는 방식으로 자기 덕을 기초지으려 했던 약자들의 정신 세계. 각각의 능력과 덕이 보여주는 다양성과 차이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따라야 하는 보편적 도덕을 정립하려는 ‘평등을 향한 의지’를 가슴 깊숙이 가지고 있다. ‘신 앞에 영혼의 평등,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이라는 독거미의 정의(justice)는 너무나 그럴듯해 많은 영혼들을 거미줄에 걸려 먹이가 되게 만든다. 다른 곳에서 니체는 객관성, 확실성을 내세워 사물과 사건의 고유한 생명력을 없애버리는 학자들을 거미에 비유한 적 있다.
2. 차라투스트라 - 질병과 치유의 체험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책의 내용이 그만큼 풍성하기 때문이다. 여러 방법 중 ‘질병과 건강’이라는 주제도 그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전제가 ‘위대한 건강’에 있다고 밝힌 적 있다. 여기서 ‘위대한 건강’은 ‘인간적인 것’들과의 결별과 그 것을 넘어서는 ‘위버멘쉬’를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에서 위버멘쉬로의 변신 과정을 담고 있는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추적하는 데 ‘질병과 건강’은 적절한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었던 차라투스트라는 어떻게 인간적 질병을 극복하고 위버멘쉬라는 위대한 건강을 얻게 되었을까?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는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 것일까?’
◉ 차라투스트라 지상으로 내려오다
차라투스트라의 꿀 >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동굴에서 얻은 것을 ‘꿀’에 비유했는데, 그가 동굴 바깥으로 나온 이유는 그 꿀을 나누어주기 위해서였다. 그 ‘꿀’처럼 달콤한 진리란 ‘신의 죽음’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제 1부는 ‘신의 죽음’이란 자신의 선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차라투스트라가 인간을 새로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으로 막을 연다. 그가 말하는 신의 죽음은 세계를 ‘이 세계’(이승)과 ‘저 세계’(저승)로 나누어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의 통념을 부수어 놓는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신과 진리가 산다는 ‘저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이 세계’의 삶이 평가절하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관심을 두어야 할 곳은 ‘저 세계’가 아닌 ‘이 세계’다. 이러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종교는 단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환상적 태양일 뿐’이라며 천상의 문제를 지상으로 끌어내리려 했던 맑스를 떠오르게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처방과 돌팔이 의사들 > 천상이 사라졌다면 의미의 기반은 대지가 되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대지에 충실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대지는 이미 ‘인간’이라는 심각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가 죽음의 설교자, 신체의 경멸자, 저편의 세계를 신봉하는 자들로 자세하게 분류한 ‘돌팔이 의사들’은 사람들을 치유한다고 나섰으나 오히려 심각하게 병을 더 옮기고 있었다. 돌팔이 의사들은 여러 가지 방법들로 사람들을 병들게 했는데,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기술은 삶에 죄를 이식하는 ‘이식술’이었다. 돌팔이 의사들의 이식 수술이 끝나면 인간들은 양심의 가책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물어뜯는 짐승으로 전락한다. 제1부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대지를 사랑하라’는 처방은 거의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건강한 의사만이 환자를 감염시키지 않고 건강하게 치유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 역시 완전한 건강의 소유자는 아니었기에, 그 또한 치료가 필요했다. 그는 사람들을 떠나 다시 고독 속으로 돌아갔다.
◉ 차라투스트라 권력의지를 말하다
차라투스트라의 두 번째 하산 > 그는 이제 단순히 ‘저편의 세계’가 사라졌다고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 세계’ 즉 대지에 충실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을 쌓았다. 그는 우리의 ‘능력’의 관점에서 세계를 다시 볼 것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평가하고 신의 감각으로 세계를 느껴왔지만 이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가치 평가,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 “창조. 그것은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제이며 삶을 경쾌하게 만드는 것이다” 창조와 생성, 이것이 ‘대지에 충실함’의 진정한 의미다. 대지에서는 생성과 소멸이 끝없이 반복된다. 대지 위의 죽음은 생에 대한 부인이 아닌 더 크고 다양한 생을 위한 예비 작업일 뿐이다. 대지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자기 위에서 자라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기독교나 플라톤주의 > '대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은 죄지은 자들, 불완전한 자들의 숙명이라고 부정.
차라투스트라 > ‘최상의 비유라고 한다면 불멸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생성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긍정.
차라투스트라의 ‘권력의지’ > 중요한 것은 이 세계에서의 우리 자신의 생성 능력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극적으로 의지하고, 평가하고, 창조하는 일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창조와 관련되어 ‘권력의지’라는 개념을 가르친다. ‘권력의지’에서 ‘권력’은 ‘정치적 강제력’ 혹은 물리학자들의 ‘힘’같은 걸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능력’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자라게 하는 대지의 능력,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능력.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그만큼의 힘을 발생시킨다. 이 힘이 제 능력을 실현하려하는 특정한 방향이 바로 ‘의지’이다. 이 의지는 모든 힘에 본질적으로 내재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의지를 종종 명령과 동일하게 사용하는데, 힘의 방향은 곧 그 힘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힘의 명령을 뜻하기 때문이다.
권력의지- 강자와 약자 > 차라투스트라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 특히 생명체들에서 권력의지를 발견한다. 생명체는 자기 주변에 있는 것들에 명령을 내리며, 주변을 굴복시켜 자기 삶을 구성한다. 그러한 명령의 과정은 자기 증식의 과정일 수도 있지만 자기 파괴의 과정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모험이자 일종의 주사위 놀이다. 하지만 강자들은 그것을 감행한다. 차라투스트라에게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강자로 착각하는 약자들이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따르는 덕의 주인이 아니다. 현대인들에게 덕은 주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이 따를 수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현대인들의 보편적 가치의 정립과 그것의 평등한 적용이라는 생각에는 자신과 다른 것, 즉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폭군적 열망”이 들어있다. 하지만 ‘좋음과 나쁨’의 기준은 각자의 상황과 목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이 따르는 덕이 자기에게 맞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들이 현대인들에게는 생략되어 있다. 자기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판단치 못하고 그것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저 도덕과 관습, 법과 제도에 맞춰 살아가는 일은 환자나 노예들이 사는 방식이다.
◉ 차라투스트라 반복 때문에 깊이 병들다
병에 걸린 차라투스트라 > 대지에 충실하는 것, 즉 창조와 생성을 계속한다는 것은 혹시 과거에 대한 원한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진정한 구원이라 부를 수 있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창조와 생성이 과거에 대한 부정과 원한을 통해서만 수행되는 것이라면 ‘이 세계’를 비난하면서 ‘저 세계’를 찾아 나선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과거에 대한 원한으로 만들어 낸 미래 또한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는 그것이 시간의 문제임을 알아챘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자는 지나간 시간을 부정하는 게 아닐까? 과거는 창조와 생성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거는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의지의 ‘적’으로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비탈에 서 있음을 발견한다. 위버멘쉬와 인간 사이에 있는 위험한 자신을.
환영 > 그런 그에게 실마리를 제공하는 환영이 나타난다. 환영 속 두 개의 길이 만나고 있는 성문에 대한 악마 ‘중력의 영’과의 대화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것들이 결국 영원히 되돌아올 운명을 가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두려웠다. 모든 것들이 반복된다면 과거의 모든 끔찍한 기억들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동일한 것의 반복’ 즉 새로운 창조와 생성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들은 이미 시도된 것이라는 중력의 영의 속삭임 앞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병은 더욱 심각해졌다.
◉ 차라투스트라 권력의지를 묻다
서로 다른 권력의지 사이의 위계 >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다루면서 권력의지에도 상이한 질이 있음을 암시했다. 똑같이 영원성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고정되고 불멸하는 욕망을 드러낸 것인지, 창조와 생성의 영원성을 욕망하는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르다. 또 무언가를 파괴하고 부인할 때조차도 부정과 원한에서 비롯된 것인지, 감사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르다. 관건은 차라투스트라가 ‘세계를 사랑하고 긍정하기 때문에 그것을 새로운 것으로 창조하는’ 긍정의 권력의지에 대해 배울 수 있느냐에 있다.
긍정의 권력의지 > 영원회귀와 관련한 두 번째 환영 속 목동은 입 속으로 들어온 뱀 대가리를 물어뜯었을 때 비로소 환하게 웃었으며 변신할 수 있었다. 이야기 속 뱀이 가하는 끔찍한 고통은 일종의 시험대다. 그 고통을 긍정하고 환하게 웃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여기서 진정한 긍정은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감한 실천을 요구한다. “물어뜯어라!” 물론 그 실천은 원한이나 부정이 아닌 사랑과 긍정에서 나와야 한다. 긍정은 따라서 삶에 대한 다른 감수성을 요구한다. 똑같은 것이 고통의 원인이 아닌 기쁨의 원인이어야 하므로 긍정은 신체의 변신을 요구한다. 손에 든 망치가 파괴의 도구가 될 지 창조의 도구가 될 지는 어떤 권력의지 아래서 수행되느냐에 달린 문제다.
주사위 놀이 > 주사위 놀이는 영원회귀의 상징이다. 이 주사위 놀이에서도 두 개의 권력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난쟁이의 주사위 놀이는 ‘던져봤자 헛수고, 그것은 다시 제자리로 오며 이전의 눈들이 반복’되는 피로에 휩싸인 부정의 권력의지 아래에서 수행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주사위 놀이에서 반복되는 것은 ‘던지기’일 뿐 동일한 ‘눈’이 아니다. 동일한 눈이 나왔다 해도 그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며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름의 돌아옴이 아니라 행위의 돌아옴이다. 즉 차라투스트라의 주사위 놀이는 긍정의 권력의지 아래에서 수행된다.
◉ 차라투스트라 반복으로 위대한 건강을 얻다
과거에 대한 해답 > 앞서 제시된 ‘창조와 생성은 과거에 대한 원한이 아닐까?’ 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물음 또한 주사위 놀이를 대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긍정의 모습은 니체의 다른 저작인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에서 더 잘 나타난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는 미래의 기획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 아마 차라투스트라는 ‘심판’이라는 말을 빼고는 동의할 것이다. 미래를 건설하려는 자는 과거를 심판하지 않고 사랑하면 된다. 과거 속에서 미래를 찾아내는 사람은 과거에 원한을 갖지 않는다.
영원회귀와 위대한 건강 >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결혼 반지에 비유했다. 그것은 사랑과 생식을 나타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미래를 낳는 것, 그것이 영원회귀다. 영원회귀란 지금의 나와 이별하면서 새로운 나를 만드는, 다시 말해서 수백 개의 나를 만드는 일이다. 이는 곧 하나의 건강 상태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수백 개의 건강을 갖는 것, 즉 ‘위대한 건강’을 의미하기도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이라는 인간적 질병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영원회귀를 발견했고, 그것을 통해 위버멘쉬라는 위대한 건강에 이르렀다.
3. 『차라투스트라』의 스타일
◉ 니체의 스타일
니체는 스타일 자체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에게 최고의 스타일이란 자기 감흥을 가장 잘 표현하고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자기를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니체는 자신이 수백 개 정체성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논문, 에세이, 시집, 희곡, 서평 등 작품마다 다 다른 스타일로 집필했다.
니체의 스타일에서 또다른 중요한 측면은 독자를 선택하는 기능이다. 오직 ‘들을 수 있는 귀’와 ‘읽을 수 있는 눈’만이 니체의 말을 듣고 니체의 글을 읽을 수 있다. 즉 니체의 스타일은 자신과 비슷한 파토스를 지닌 자들을 매혹시키고 자신이 싫어하는 저속한 무리들을 쫓아내는 기능을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스타일
『차라투스트라』는 하나의 장르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형식들을 차용하고 있다.
다양한 은유와 상징의 활용 > 지형의 높낮이, 건강과 질병, 여러 동물들의 이미지가 모두 활용된다. 그것은 정서작용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또 상징을 통한 정서의 표현은 생성(-되기)의 적극적인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독거미와 동일한 정서작용을 일으킨 사람은 순간적으로 독거미가 ‘된’ 사람이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모든 사물은 스스로 접근해 와서 스스로 비유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패러디의 활용 > 니체는 여러 텍스트들을 새로 배치함으로써 전혀 다른 효과를 낸다. (ex. 플라톤의 『국가』의 문장 패러디) 똑같은 문장이지만 다른 곳에 배치됨으로써 그것의 의미가 전혀 달라짐을 보여준다.
말들의 유희 > 니체는 자주 말들의 유희를 즐긴다. 몇 개의 철자만 바꾸어 발음은 비슷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른 말을 쓰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단어들을 연결해 엉뚱한 연상을 불러오기도 한다.
음악적 성격 > “『차라투스트라』의 전부는 음악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시적 형식을 많이 차용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말과 노래는 독자들의 정서를 유도하고 자극하는 가락과 사유를 가속화하는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이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주신찬가를 떠올리게 한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따르면 주신찬가를 부르는 사람들은 일상에서와는 전혀 다른 신체로의 변신을 경험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말과 노래 역시 독자들의 변신을 강하게 자극한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것은 독자에게 하나의 모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