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발제] 0125 :: 성의 역사3_4장 육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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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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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세미나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
제 4장 육체
20180125 목 연두
의학은 공익의 실천으로서 널리 인정받았으며, 또한 수사학과 철학에 근접한 상위의 문화형태로서 인정받았다. 의학은 병이 났을 때 요구되는 단순한 처치술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양생술의 형태로 자발적이고 합리적인 행동구조를 제시해야 했다. 그러나 의사가 환자의 생활을 지배하여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간섭하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양생술에 관한 문헌은 사람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실천의 근본원칙들 중 하나를 알 수 있다. "도움이 될 만한 말들"을 일찍부터 배워서 자주 반복하고 정기적으로 숙고함으로써 항시 수중에 둘 수 있게 그 말들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줌으로써 일상생활의 영구적 뼈대를 이루는 "건강의 실천"은 합리적 생활을 가능케 한다. 건강의 실천은 환경요인에 대한 의학적 인식을 내포한다. 즉 개체와 그를 둘러싼 환경 사이에는 온갖 간섭이 그물망이 있어서 여러 가지 배치, 사건, 변화가 신체에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에 대한 지속적이고 상세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진다. 세심한 관리가 되려면 다양한 환경요인과 자기 자신에게 기울여야 할 주의 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환경, 장소, 그리고 시기에 대한 이같은 염려는 '자신의 현재 상태와 행동에 대한 끊임없는 주의'를 요구한다. 대체로 고대 이후의 영양학에 관련된 모든 주제는 놀랄 만큼 연속적으로 남아 있다. 일반적 원칙들은 그대로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상세하고 정교해지고, 강화되었다. 신체, 건강, 환경, 상황에 대한 염려가 강화되는 전체적 틀 속에서 의학은 성적 쾌락의 문제를 제기한다.
1. 갈레누스
1) 아프로디지아에 대한 갈레누스의 분석은 죽음, 불멸, 그리고 생식 간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주제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 <음부의 유용성에 관하여>에 의하면 모든 철학적 전통처럼 그도 양성 분리의 필요성, 이성 간의 강렬한 끌림, 생식의 가능성이 "영원성의 결여"에 뿌리를 둔다고 보았다. 그는 조물주의 작품 한 가운데 있는, 목표한 불멸성과 물질의 부패성이라는 피할 수 없는 불일치를 지적한다. 자연계를 세운 로고스는 도시국가의 창건자가 처한 상황 속에도 어느 정도 들어있다. 그는 생물의 번식을 둘러싼 조물주의 교묘한 술책을 주목한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불가피한 부패를 극복한다. 바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격렬한 흥분-욕망의 '자극'인-의 매커니즘을 발명한 것이다.
2) 성행위에 관한 갈레누스의 생리학은 전통적 특징을 여전히 지닌다. 그러나 그의 분석은 성행위의 메커니즘을 유기체 전체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성행위를 개인의 건강, 나아가 생명 자체와 연관시키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이중의 결과를 담고 있다. 또한 그 메커니즘을 연속적이고 촘촘한 생리학의 그물망 속에 끼워 넣으면서도 고도의 잠재적 위험성을 부과한다.
이는 욕망과 쾌락의 생리학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잘 드러난다. 갈레누스는 그토록 강렬한 쾌락이 성행위의 동기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는 욕망과 쾌락은 해부학적 배열과 신체적 과정의 직접적 결과라고 본다. 신체와 그 고유한 메커니즘 속에 과도할 정도로 강렬하게 쾌락을 새겨넣는 일련의 모든 해부학적 배치와 신체적 정돈때문에 그것은 저항하기 속수무책일 정도로 "억누르기 힘든 것"이다.
쾌락이 국부적인 곳에 고정되어 형성될 지라도, 성행위의 요소와 결과들에 의해 몸 전체가 연루된다. 성행위는 정액과 프네우마를 내보낼 때 신체의 대역학에 작용한다. 사정이라는 소모가 계속된다면 "몸 전체가 생명력을 빼앗긴 상태"가 된다.
3) 그는 성행위와 간질, 경련현상을 유사관계, 상사관계, 인과관계의 망으로 이해하고 있다. 성행위는 메커니즘상 경련들의 대계보에 속한다. 그는 경련이 여타의 자발적 동작과 같은 성격을 띤다고 분석한다. 다만 경련은 의지가 아니라 어떤 수동적 결과로 나타나고, 성행위 때 나타나는 근육수축도 그러하다. 그리고 간질 발작과 경련성 발작은 서로 인과관계가 있다. 그는 적절한 시기를 무시하고 성적 쾌락에 몸을 맡기면 점차로 몸이 고갈되고 신경의 긴장이 강화되어 발작형 병들이 유발된다고 경고한다.
푸코는 갈레누스의 이론 속에서 아프로지디아가 세 가지 차원 속에 자리잡는다고 본다. 우선 아프로디지아는 조물주의 섭리의 체계, 즉 창조의 지혜가 죽음 속에서 부딪힌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의 권능을 구조하러 오는 바로 그 지점에서 구상되고 배치된다. 다음으로 아프로디지아는 해부학적으로 정확하게 자리잡으며, 그것이 프네우마의 전체 구조 속에서 끌어내는 결과로 인해 신체와의 복잡하고 부단한 상관관계 속에 위치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질병 전체와 유사관계 속에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푸코는 갈레누스의 분석이 통해 생식의 우주학으로부터 경련성 사정의 병리학에 이르는 아주 뚜렷한 흐름을 보여준다 생각한다.
2. 성적 쾌락은 좋은가 나쁜가?
1, 2세기의 의학서적들은 성적 쾌락의 양면성, 상반된 두 가지 가치평가를 모두 기술하고 있다. 씨, 곧 정액은 좋은 것이다. 정액은 생명 속 가장 강한 것을 모아 전달함으로써 죽음을 모면하게 해 주고, 따라서 그것이 수컷에게 우월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성행위는 본능에 속하므로 나쁜 것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성행위는 그 전개 속에서 그 귀중한 정액과 그것이 집결시킨 모든 생명력을 빠져나가게 하는 행위이므로 내재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질병과 유사하게 전개된다. 그것이 바로 성적 쾌락의 역설이다. 1, 2세기 의사들은 그러한 양면성에 대해 과거보다 더 발전되고 복잡하며 더 체계적인 병리학을 기술하였다.
1) 성적 활동 자체에 대한 병리학은 격렬한 무의식적 긴장, 고갈될 정도의 무한정한 소모 주위에서 구성된다. 한쪽에는 지속적 흥분병이 있을 수 있다. 아레테는 병적 성욕항진증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면서 그 질환이 성교에 대한 일종의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라고 했다. 갈레누스의 경우는 그것을 발기의 메커니즘에 입각해 이해한다. 여자들의 경우가 언급되기도 했다. 여자들의 경우 그것은 히스테리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된다.
병리학의 또 다른 극에는 무한한 소모가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고노레라 부른다. 아레테는 고노레를 전반적 쇠약과 조로, 신체의 여성화라는 세 가지 결과를 낳는 것으로 생명의 근원을 고갈시키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남성의 숫기를 잃게 하므로 수치스럽고, 죽음이 불가피하며, 그 후손에게도 위험하다.
2) 성행위는 1, 2세기의 의학에 의해 병리학 고유 영역을 넘어서 복잡한 병원학의 교차로에 위치한다. 한편으로 적절한 성행위에는 다양한 요인, 즉 개인의 기질이나 기후, 시기, 음식의 종류/질/양 등이 모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너무 과하거나 너무 적은 것을 피하고, 건강에 의심스러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프로디지아가 유기체 전체에 끼치는 영향이 광범위하고 상당하기 때문이다. 갈레누스는 정체된 체액이 야기하는 히스테리와 같은 해로운 영향력을 거미, 전갈 등의 독의 영향력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다.
3) 성적 활동은 병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치료를 가능케 하는 양면성이 있다. 그러나 성적 활동이 두 가지 중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측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개인적 기질 뿐 아니라 특별한 상황, 신체의 잠정적 상태에 달린 일이다. 루푸스는 병 때문에 여윈 수많은 사람들이 성행위를 함으로써 회복되었다고 기록한다. 갈레누스 역시 성 관계에는 몸과 마음을 필요하는 많은 효과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갈레누스는 주체가 처한 조건에 따라서 성 관계가 가져올 수 있는 역효과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성행위의 이런 긍정적 혹은 부정적 효과를 둘러싸고 몇몇 구체적 문제에 대한 여러 논쟁이 전개되었다. 관심이 되었던 문제들은 몽정, 사춘기가 되면 사라지는 어린이의 경련 등이었다.
4)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 금욕에 긍정적 효과를 부여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의사들이 금욕의 결과로 야기될 수 있는 장애들을 지적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몇몇 개별사항의 결과로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남자들의 정액은 생명을 구성하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기에 오래 전부터 육상선수들의 엄격한 금욕에 긍정적 효과를 부여했었다. 아레테는 정액이라는 이 "활력을 주는 체액"의 유익한 효과를 기술한다. "본래 가장 강했던 사람들이 아크라시아로 인해 가장 허약한 사람들보다도 더 허약해지며, 가장 허약한 사람들도 엔크라테이아에 의해 가장 강한 사람들보다도 더 강해진다." 반면 여자들의 경우에는 금욕의 가치가 덜 인정받는데, 그것은 여자는 사회적으로나 생리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위해 마련된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푸코는 물론 성적 금욕이 사회적 의무도, 악도 아니었음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의학적, 철학적 사고에 의해서 이미 명시화되었던 논지들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굴절을 주목하고 있다. 즉 성적 활동이 낳는 결과의 모호성(양면성)에 대한 주장, 유기체 전체를 통해서 성적 활동에 인정된 상관관계들의 확장, 유기체 자체의 취약함과 그것의 병리학적 힘에 대한 강조, 양성 모두에게 금욕행위에 대한 가치부여 등이 그것들이다. 성행위는 예전엔 무의식적 격렬함과 막대한 소모라는 측면에서 위험한 것으로 인지되었으나 이제는 차라리 인간의 몸과 그 기능 작용에 전반적 허약함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개인의 생활관리에서 아프로디지아의 양생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3. 쾌락의 관리법
따라서 성행위는 극도로 주의 깊은 관리법에 따라야 한다. 이 관리법은 행위의 정당하고 받아들일 만하며 자연스러운 형태를 규정하려는 규제체제와는 아주 다르다. 금지되는 유형이나 행동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 관리법들은 '규범적'이지 않고 '양보적'이다. 그것은 성행위를 가장 덜 방해하는 조건들, 성행위가 평형의 총체에 가장 덜 영향을 주는 조건들을 결정하는 데 많은 주의를 요하는 상황적 관리법이다. 그 조건들이란 출산에 유용한 시간, 주체의 연령, 시기, 개인의 체질이라는 네 가지 변수이다.
1) 아프로디지아의 관리법과 출산. 수태의 문란함은 자손에게 흔적을 남긴다. 출산이라는 궁극의 목적 내에서 성행위가 많은 배려와 세심한 준비를 요구한다는 것은 제정시대의 의학요법에서 한결같이 발견되는 원칙이다.
이것은 장기간의 준비와 단기적 준비를 모두 포함한다. 소라누스는 이와 같은 것을 충고하며 중요한 것은 "개인이 완전한 건강을 누리는 시기"를 선택하는 데 있고, 이는 생리적 이유와 더불어 도덕적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수태가 좋은 조건에서 이루어지고 자손이 가능한 모든 자질을 갖기 위해서는 성행위 자체가 모든 문란함과 도취를 피하는 현명하고 조용한 행위가 되어야함도 지적한다. 자손의 준비라는 원칙과 존재이유를 가진 아프로디지아에 관한 온갖 관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수태를 위해서만 성관계를 행해야 한다는 계율적 차원이 아니라 자손을 염려하는 사람에게 유용한 충고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번식자의 자식에 대한 책무이자 스스로에 대한 책무라는 형식을 띤다. 갈레누스는 자신을 중요시하지 않는 인간들은 자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소크라테스의 자기 배려의 주제를 되풀이한다.
2) 주체의 연령. 아프로디지아의 활용은 너무 늦게까지 계속되어서도 안 되고 너무 일찍 시작되어서도 안 된다. 늙었을 때 실행하는 성관계는 육체를 쇠진하게 한다. 그러나 너무 젊을 때 갖는 성관계는 성장을 중지시키고, 성인의 징후들이 발달하는 것을 교란한다. 아테네는 "너무 이르고 과도한 성 관계만큼 영혼과 육체의 발달을 저해하는 것은 없다."고 경고한다. 많은 의사들은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자연이 정해놓은 때에 합의하지만 일정한 금욕의 시기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3) 알맞은 때. 성행위의 카이로스는 많은 토론의 대상이 된다. 적절한 계절, 하루 중 적절한 시간 외부 환경에 대한 고려 속에서 논의된다. 이것은 종교적 동기 뿐 아니라 운동, 식사, 소화 등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런데 아이를 갖기를 원한다면 그 때 권장되는 식이요법은 남녀에 따라 달라진다.
4) 개인적 체질. 루푸스는 성교에 적합한 체질은 "다소 뜨겁고 습한"체질이라고 한다. 아프로디지아에 필요한 고온다습성을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운동과 적절한 식사와 같은 복잡하고도 지속적인 양생술이 필요하다. 성적 활동을 위하여, 그리고 성적 활동이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어떤 생활양식에 복종해야만 한다.
4. 영혼의 작업
성적 쾌락을 위해 제기되는 관리법은 육체와 영혼에 모두 관여한다. 의사들은 영혼이 육체를 기본적 필요들을 넘어서 욕망하게 하고,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분별 있는 영혼은 두 가지 역할을 갖는다. 영혼은 육체에 고유한 본성과 경향, 육체가 처해 있는 상태와 정황에 의해 규정되는 관리법을 정해주어야 한다. 아테네는 영혼이 행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노고를 훌륭한 육체요법의 조건으로 분명하게 정의한다. "성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관리법이다. 즉 자신의 충동을 가라앉히도록 노력하고,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힘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1) 의학요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의 제거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을 거스른다. 육체와 영혼의 상호관계 속에 욕망의 관리법이 자리 잡게 되는데 그 속에서 욕망의 움직임은 가능한 한 정확하게 조정되고 합치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상호관계가 깨질 때 위험해진다. 육체가 혼자서 흥분하는데, 영혼 안에 이에 대응할 만한 것이 없을 때 육체는 일종의 순수한 격앙에 빠진다. 이것은 루푸스가 정신착란이나 간질을 예고하는 징후들로 언급하는 "충동들"이다. 역으로 영혼이 육체의 욕망의 형태와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지나침을 루푸스와 갈레누스는 독사(doxa)로 부른다. 이 때 영혼은 근거 없고 공허한 표상들에 사로잡힌다. 영혼 안에 욕망의 상응물이 없는데 육체가 흥분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영혼도 육체가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넘어서면 안 된다. 전자의 경우는 병의 치료요법이 문제가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도덕요법이 문제시된다.
루푸스는 "영혼을 굴복시키고 그것을 육체에 복속시켜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혼이 육체의 청원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전통적 테마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스토아주의의 영향력을 염두에 두고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육체에 복종한다는 것은 이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독사는 자연적 이성을 넘어 지나친 욕망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 이같은 이유로 합리적 의학요법에서는 동물의 예가 행동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동물들이 성교에 끌리는 것과 배설을 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점이 없다. 그러므로 의학요법은 일종의 에피투미아의 동물화를 제안한다. 그것은 영혼의 욕망이 육체의 욕구에 가능한 한 엄격하게 종속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배설물의 생리학을 본보기로 삼는 욕망의 윤리학, 또 영혼이 독사에서 정화되어 유기체적 배설의 엄격한 체계에만 관심을 돌리는 이상적 지점으로서의 경험을 의미한다.
2) 이로부터 판타지아(phantasiai)에 대한 의사들의 일반적 불신이 기원하는데 이는 그들이 제안하는 치료법에 한결같이 반복된다. 영혼에 육체적 욕구와 상관없는 공허한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판타지아들은 여러 유형을 지니고 있다. 꿈, 극장 공연, 독서, 노래, 음악, 춤 등이 암시하는 이미지들을 들 수 있다. 아프로디지아를 상상하고 회상하는 데에서뿐만 아니라 바라보는 데도 역시 위험이 있다. 카이로스와 관련하여 빛을 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염려에 있다. 판타지아의 문제는 애정문학에서 매우 많이 논의되었다. '시선'은 정념의 가장 확실한 전달수단으로, 정념이 가슴 속에 파고들고 유지되는 것도 시선에 의해서였다. 시선, 빛, 이미지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훌륭한 성행위의 조건이자 관건으로서 내적 또는 외적 판타지아와의 싸움은 고대 말기 이후의 성 윤리에서 항구적으로 부각되는 측면 중 하나이다.
3) 이제 쾌락의 문제가 남는다. 쾌락을 없애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합리적 관리를 위해서는 쾌락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쾌락을 행위에 수반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해서도, 성행위의 이유나 목적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동물들의 경우엔 독사의 부재가 자연스런 절도를 보장해 준다. 아프로디지아는 배설이라는 고유한 필요성에 따라 신체의 상태가 요구하는 것에 응하는 것이다. "정숙한 사람은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만 성적 쾌락을 행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갈레누스가 디오게네스적 행위에서 끌어내는 교훈이다. 디오게네스는 그를 귀찮게 했던 체액에서 스스로 해방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수음과 자위는 드물지만 매우 긍정적으로 다루어진다. 즉, 수음은 철학적 교훈으로서의 가치와 필요한 치료책으로서의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자연에 부합하는 청빈함의 행위이다. 그러나 기독교 수도원 제도 이후의 서양 문헌에서는 수음은 망상들의 위험들과 결부된 채 남아 있다.
요약 및 결론
1) 성적 행동의 관리법의 상대적 중요성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이것의 중요성은 영양섭취나 식이요법 등의 관리법들의 중요성에 비교하면 제한적이다. 성의 양생술보다 영양섭취의 양생술에 더 많은 자리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스/로마 의학 전체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므로 성과 성의 관리법에 대한 관심이 음식물 처방의 엄격함보다 뚜렷이 우세해지는 때가 바로 유럽 사회의 윤리사에서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다. 로마 시대에는 성적 쾌락의 관리법이 상대적으로 한정된 자리를 차지하면서 중대한 식이요법과 이웃해 있었고, 게다가 쾌락 자체는 도덕적 사유와 사회적 관례 속에서 먹고 마시는 관능에 결부되어 있었다. (향연 vs. 철학적 향연)
2) 이러한 의학적 관리법에서 우리는 성행위에 대한 일종의 병리학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병리학화는 훨씬 후에 성 행동이 병적 일탈을 가져오는 것으로 인정되면서 서구사회에서 일어났던 병리학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고대의 의학은 성행위를, 유기체의 동요로 인하여 매 순간 영향받고 장애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영역 속으로, 그래서 생행위가 끊임없이 직, 간접적으로 다양한 직병들을 초래할 수 있는 영역 속으로 편입시킨다. "크레시스 아프로디지온"의 의학은 성행동의 병리적 형태들의 범위를 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성행위의 근원에 수동성의 요소가 드러나도록 했다. 성행위는 어떤 병이 아니라 그로부터 끊임없이 다양한 질병이 발생할 수 있는 영원한 질병의 발생지이다.
3) 따라서 이러한 의학은 성적 활동에 극도의 경계를 요구한다. 주체는 자신이 따라야만 할 규칙들을 지속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기 내부의 모호한 욕망을 추적할 것이 아니라 아무런 위험이나 손실 없이 적절하게 쾌락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용하게 마련인 복잡하고 수많은 조건들을 알아볼 수 있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을 '진리'의 담론에 붙들어 두어야 한다. 담론은 주체에게 성행위의 본질과 관련하여 성행위를 어떻게 하는 것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고 엄밀하게 그 본질에 순응하는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캉길렘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치유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의학적 활동 안에서의 건강한 상태"이며, 의사가 아니라 "건강이 환자를 치유"하며, 일반적으로 "기술적 생산물의 책임은 장인이 아니라 기술에 귀착되며, 기술, 그것은 자연적 로고스의 비반성적 목적성"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아프로디지아의 관리법, 의학이 제안하는 아프로디지아의 분배체제는 사고에 존재하는 아프로디지아의 본성의 형태, 행동에 지속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아프로디지아의 실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4) 이러한 섭생법적인 충고와 이후 기독교 도덕과 의학적 사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계율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희소성을 지향하는 엄격한 절체의 원칙, 성행위의 문란으로 야기될 수 있는 개인적 불행이나 집단적 병에 대한 강박관념, 욕망에 대한 엄격한 통제 및 판타지아에 대한 싸움, 쾌락을 성 관계의 목적으로 삼는 태도의 폐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여기에는 분명 연속성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적 특질에만 주목하면, 기독교와 근대 서양의 것으로 생각되는 성 윤리가 적어도 몇 가지 본질적 원칙에서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절정기에 확립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인상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유형에 연관된, 따라서 주체가 자신에 대해 갖는 경험 내로 계율들을 통합하는 형태에 연관된 근본적 차이점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