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후기] 위험한 책 :: 2부 9~12장 +4
소소
/ 201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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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대성 – 반시대성 – 비시대성
시대성은 시대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니체의 변신단계에서 낙타의 시기로 비유할 수 있겠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성실하게 황량한 사막을 넘는 낙타는 그저 시대에 순응할 뿐이다. 사실 시대정신이 한 개인의 가치관 형성과 성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시대를 순응만 해서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기존의 낡은 가치를 적대하는 방식은 반시대성으로 사자의 시기와 그 성격이 닮았다. 그러나 ‘반시대’ 역시 시대의 가치에 대립하는 반사적인 반동으로 지나치게 시대적이며, ‘비시대’와 구분된다.
“네가 아직도 적대받는 한 너는 너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너의 시대가 너를 전혀 알아 볼 수 없어야 한다” [유고,
1882~1883/4] 본문 p214
니체가 “참된 철학자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비시대적이다” 라고 했듯이 같은 의미에서 시대를 뛰어 넘어 계속 회자되는 위대한 예술가들도 ‘시대성’이 아닌 ‘비시대성’으로 작품을 탄생시킨다. 예컨대, 고흐의 작품은 그가 살던 시대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아니 니체의 표현대로 그의 시대가 위대한 예술가 고흐를 알아보지 못했다. 고흐는 그 시대에 ‘이미’ 와 있었지만 그의 작품은 ‘아직’ 그 시대에 오지 않은 것이였다.
“나중에 작품이 건조해져 시대성이 사멸할때, 비로서 깊은 빛남과 좋은 향기를 얻게 된다.
그것이 자기 때를 발견할 때, 중요한 영원의 눈도 얻게 된다. [서광] 본문 p213
모든
예술가들은 비시대성으로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켰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자신만의
시대와 세계관을 확립하지는 않았다.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과 속성들을 수없이 모작하며 충분히 고찰하고 시대의
오류를 발견했을 것이다.
니체의 가치전도 방식도 두번에 걸쳐 진행된다고 한다. 한번은 기존의 통념을 대결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반시대적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한번은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미래성을 가져오는 것으로 비시대적이라 하겠다.
낙타의 시기 없이 사자의 시기가 오지 않듯 시대정신을 잘 알지 못하고 반시대적일 수는 없으며 또한 반시대를 포함하지 않고는 비시대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게 치열하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노력없이 미래는 창조되지 않는다.
니체의
비시대성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며 과거와 현재를 재창조하고 미래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시대 안에서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를 할 수 있을까? 또한 시간을 우리의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차라투스트라는 그 답을 창조와 생성이라고 말한다. 이미 일어났던 화석화 된 과거도
창조와 생성으로 재창조가 가능하며, 파편 같은 우연들 속에서 미래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을 운명으로 만드는 경험이
미래성을 가져오는 것이므로 비시대적이라 할 수 있다.
“창조하는 자로서, 수수께끼를 푸는 자로서, 그리고 우연을 구제하는 자로
나는 그들에게 미래를 창조할 것을,
그리고 이미 있었던 모든 것을 창조를
통하여 구제할 것을 가르쳤다”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본문 p217
우리는 흔히 과거는 이미 일어난 사건(그랬었다)이므로 우리의 의지를 개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조와 생성으로 과거의 사건은 그 의미와 성격이 달라질 수 있으며 우리의 의지가 개입 된 사건(그러기를 원했었다)으로 재창조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여전히 아픈 기억이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생성했다면 더이상 아픈 기억으로만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편 같은 촟불들이 모여 시대를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생성함으로써 미래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 또한 비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창조와 생성’
니체의 말대로 창조와 생성으로 과거와 현재를 재창조하고 시간을 넘나드는 사유를 할 수 있다면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지는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창조와 생성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학자들은 욕망없는 관조가 순수한 인식상태로 진리에 도달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는 욕망을 감추는 위선이며 욕망없음을 욕망하는 학자들의 아이러니로 보인다. 정신이라는 양말을 짜고 있는 학자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욕망없는 관조로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고.
“천진난만함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생식의 의지가 있는 곳에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뛰어 넘어 창조하려는 자, 이 사람이야말로 순수한 의지를 갖는 것이다.”
[순수한 인식에 대하여] 본문 p226
학자들의 욕망없는 관조는 정신을 신체와 분리하고 신체가 갖는 욕망이 배제 된 상태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욕망은 곧 생식의 의지다. 생식의 의지는 정신만으로는 실현 가능하지 않다. 신체의 감각을 통해 생식의 의지가 발휘되는 곳에 천진난만함이 있다. 이때 신체의 감각은 대상을 향한 의지와 애정,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아이가 재밌는 놀이를 할때 몸으로 웃는 것처럼…
곧 생식의 의지는 사랑이 담긴 욕망이며 신체의 감각을 통해 발휘된다. 그리고 그 곳에 비로서 창조와 생성이 발현된다.
결국, 문제는 사랑이고 생성이다. 본문 p226
사물에게 다가서고 싶다면 먼저 그것을 애무해야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본문 p228
욕망없는 관조가 어디 학자들만의 이야기겠는가? 사회는 도덕적 잣대로 개인의 욕망을 항상 억누를 것을 강요하며 무리에 순응하기를 요구하고, 종교에서 개인의 욕망은 늘 죄악시 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가 원하는 욕망이 무엇인지 조차 잃어 버렸는지 모른다. 신체는 정신의 도구로서 이미 이성화 상태로 결박되어 있다. 잃어버린 욕망을, 신체의 감각을 되찾고 사랑이 담긴 생식의 의지를 발휘해보자. 여기에는 본인의 주관적 가치만 있을 뿐, 어떤 객관적 진리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 곳에 천진난만함이 있고 새로운 가치가 생성된다. 이것이야말로 중력의 영이 삶을 자꾸 무겁고 진지하게 만들며 의미를 부여해 늪으로 끌어 당길 때마다 환하게 웃는 법이며 가벼게 춤추는 길이라 믿는다.
댓글목록
소소님의 댓글
소소
지난번 시간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전반적으로 요약한 게 아니고,
그 중 제가 관심있는 부분만 골라 제 생각들과 섞어 작성하다보니
표현이 서툴고 생각이 다른 분과 다를 수 있어요~~
아낌없이 댓글로 질타해 주시길! 다시 한번 후기 늦어 죄송해요.. 흑흑
연두님의 댓글
연두
깔끔한 후기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정리하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지...
소소님의 스타일이 돋보이네요.
1.
비시대성 관련해서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대성-반시대성-비시대성이 선형적 시간적 흐름 혹은 필연적 과정으로 보이는 것 같은데
그렇게 읽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반시대성과 비시대성을 대비하기 위해서 세미나 시간에 니체의 사자, 어린아이 시기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었죠.)
반시대를 포함하지 않고는 비시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니체의 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비시대성 자체에 주목하고 "참된 철학자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비시대적이다."라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시대 안에서 '비시대적'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니체는 그것을 시간상의 불일치와 관련시키며 답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는 시간에 대한 관점,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네요.
저에게는 '생성은 그 자체로 시간이다'이라는 말이 강력했습니다.
시간이란 외부적 환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활동과 강력하게 결부되어 있는 거죠.
'이미 와 있지만 오해되는 시간' 그것을 차라투스트라는 미래라고 하고,
고병권샘은 '오직 미래적인 것만이 현재를 돌파할 수 있다',
'미래로 떠나고 싶다면 지금 여기서 그 미래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2.
'사회는 도덕적 잣대로 개인의 욕망을 항상 억누를 것을 강요하며 무리에 순응하기를 요구하고,
종교에서 개인의 욕망은 늘 죄악시 되어 왔다.' 고 하셨는데 전 의견이 달라요.
사회가 항상 개인의 욕망을 억누를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는 부정의 태도에 가까운 것 아닌가 의심해 봐요.
어떤 욕망은 비난받기도 하고, 어떤 욕망은 부추김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심지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푸코는 사회에 과연 억압이 정말 존재하는가, 억압을 둘러싼 담론 이면의 욕망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니체는 니가 따르는 도덕의 주인이 과연 너인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하는 자기인, 정신/감각/정서 및 여러 힘들의 복합체인 큰 이성으로서의 신체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욕망은 여러 힘들과 관련되는 것 아닌가 싶은데, 더 이상은 저도 모르겠네요.
3.
12장 춤추고 웃는 법을 배워라
여긴 참 좋았는데 세미나 때 그냥 훅 넘어가서 한 번 더 짚어보려고 책을 들춰보았습니다.
악마는 엄숙하며, 심오하며, 장중하다죠. ㅎㅎ 우리에게 가벼워지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여기서도 웃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결국 웃는 자가 되려는 거겠죠.
(오라클님의 웃음이 귓가에 들립니다. 오호호호~~)
'자유롭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환하게 웃는 사람, 사뿐사뿐 걷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중력의 영은 시대의 중력장. 그것이 창조한 것은 강제, 율법, 필요와 귀결, 목적과 의지, 선과 악 등입니다.
중력의 정신에 맞설 때 이제 막 날개가 돋기 시작한 어린 새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부정을 통해서 도약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정과 거부는 무거운 자들의 정신.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벌써 세미나가 내일이네요. 다들 내일 뵈어요! 굿나잇!
소소님의 댓글
소소
연두님, 댓글 감사합니다! ^^
1. 시대성, 반시대성, 비시대성
이 부분은 이번 발제에 나오는 낙타, 사자, 아이에 시기를 읽으면서도 계속 무언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 계속 잔상이 남았습니다. 지난번 세미나 시간에 반시대를 포함하지 않고 비시대로 나아갈 수 없다고 언급 됐고 저도 동의가 되어 후기에 풀다 보니 시대성, 반시대성, 비시대성이 필연적 과정으로 되어버렸네요.. ㅜㅜ
연두님의 의견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반시대정신으로 비시대로 나아간다면 이 역시 시대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비시대성의 특성(시간상의 불일치)과 모순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비시대성이 반시대성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반시대성이 반드시 비시대로 이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창의적이라 할 수 있는 예술가들을 생각하다보니 반시대, 비시대가 필연적으로 귀결 돼버렸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 (이래서 책은 같이 읽어야 되나 싶습니다)
그러나 니체의 비시대성을 실제로 어떻게 삶으로 가져올 것인가 고민해 보면 쉬운 문제 같지는 않습니다.
반시대성으로 비시대성을 가져오려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창조와 생성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나마 쉬운 방법 같습니다. 하하
2. 표현이 서툴렀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욕망은 생식의 의지가 담긴 '큰 이성으로서의 신체'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욕망은 외부 (사회, 종교, 교육 도덕 등등)로 부터 조작되어 순수한 감각들을 잃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본문에서 학자들의 욕망없는 관조는 가장 주관적이고 솔직한 신체의 감각들을 배제하고 정신으로만 진리에 도달하려는 학자들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생각됐어요. 그래서 학자들의 욕망없는 관조에는 주관적 가치는 없고 객관적 진리만 있는 것이고요.
그러나 연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양한 관점에서 욕망을 드려다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니체의 생각들은 늘 잡힐 듯 잡히지 않네요.
이번 발제에 들어 있는 내용도 만만치 않은 주제들이라…
일주일 내내 몸과 마음이 복잡합니다. 하하
조금 이따 만나요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1. 시대 안에서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
문제설정이 돋보이는 멋진 후기입니다. ^^ 문제설정이 근사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것이지요!
"어떻게 우리는 시대 안에서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를 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시간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사실 니체를 포함하여 모든 철학의 문제설정은 '시대 안에서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설정은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대 안에서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가 '시간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하나의 방식이겠지요!
즉 시대 안에서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를 할 때, 비로소 시간은 우리의 의지 아래 놓이게 될테니까요!!
2. 시대성 - 반시대성 - 비시대성에 대하여
그밖에 [시대성 - 반시대성 - 비시대성]의 구분이 갖는 실천적 의미 정도만 확인하면 될 듯합니다.
흔히 시대와 대결하는 방식은 시대를 비판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대와 대결하는 참된 방식은 시대적 가치에 반대할 뿐 아니라,
시대적 가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가치생성이 가능할 때, 반시대성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 그치지 않을 것이고,
새로운 가치생성만이 반시대성을 '긍정을 위한 긍정'의 과정에 배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