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후기] 0년 :: 1장 환호 0111(목) +3
삼월
/ 2018-01-15
/ 조회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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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년』의 저자 이안 부루마가 말하는 0년은 1945년을 말합니다.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세계는 폐허 위에 재건되었고, 새로운 정복자인 미국이 세계의 패권으로 등장했습니다. 냉전시대가 시작되고, 이때부터 유럽은 하나로 뭉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시는 끔찍한 세계대전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이상에서 비롯되었지만 여전히 강대국 중심으로 움직이는 평화에 대한 의지, 파시즘을 거부하지만 전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 역시 1945년의 이상과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안 부루마는 전쟁을 조금 다르게 바라봅니다. 전쟁을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전쟁을 겪은 인간 위주의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이안 부루마는 자기 아버지가 살았던 나라 네덜란드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일을 축하하며 벌이는 행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연합군이 독일군을 몰아낸 싸움에서 네덜란드는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도 종전일은 애국의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독일군을 몰아낸 미군과 캐나다군 역시 독일군처럼 정복자였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독일의 노동수용소에 있다가 풀려난 이안 부루마의 아버지는 종전일을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수용소의 사람들이 집으로 귀환하는 길은 수용소 생활만큼이나 평화롭지 못했으니까요.
이안 부루마가 이해하고 싶은 것은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겪은 인간의 상태입니다. 아버지의 전쟁경험 중 몇 가지를 그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히 전쟁 후에 아버지가 대학 동아리에서 신입생 환영회 행사 중 하나로 당했다는 수용소 놀이가 있습니다. 이안 부루마는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보여주는 잔인성과, 그 잔인성이 쉽게 용인되는 것에 놀랍니다. 세미나 시간에 여기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는데요. 그 이야기들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역사와는 다른 면에서 전쟁이나 인간을 바라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세미나원 모집 공지에 제가 ‘전쟁은 국가의 서사이기 이전에, 이름 없는 병사들과 여성들의 서사’라고 쓴 문장을 많이들 기억하고 계시더군요. 이안 부루마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병사들과 여성들의 모습을 세세히 기록하면서 전쟁이 어떻게 병사들과 여성들의 서사가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우리는 여성들을 전쟁의 피해자로만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여성들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전쟁을 통해 여성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합니다. 더 이상 국가와 남성의 지배와 보호 아래 살아갈 수 없게 된 여성들이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점령지 여성들과 점령군들의 경제적 원조를 포함한 교제를, 이안 부루마는 여성들의 삶에서 중요한 변화지점으로 바라봅니다.
전후에는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급증하기도 했습니다. 가족 재생산에 대한 욕구가 있었을 테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쾌락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이들이 성적 욕망 때문에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세미나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사실 전쟁의 경험만큼 우리에게 ‘인간’이라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무엇이었던 ‘인간’이 경험을 통해 어떤 실체로 느껴지는 순간 말입니다. 이안 부루마는 전후에 생존자들이 느꼈던 강렬한 번식의 의무감을 ‘쾌락이 아닌 멸종에 맞서는 저항행위’라고 표현했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패전국 남성들이 느끼는 열등감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점령군에게 성매매를 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고 독일 남성들은 명예를, 일본 남성들은 수치를 거론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여성들의 명예와 수치는 없습니다. 남성들의 명예와 수치뿐입니다. 이는 곧 전쟁에서 진 남성들의 열등감과 모욕으로 연결되며, 이 열등감이 다시 성적 패배감으로도 연결됩니다. 인종이나 혼혈에 대한 분노가 여기에 뒤섞입니다. 결국 모든 국가적 모욕감과 비도덕성에 대한 비난은 여성들에게 돌아갑니다. 도덕적 공황에 대한 우려는 전통적 도덕으로의 회귀, 보수적 반동이 탄생하는 기반이 됩니다. 그러나 전후 남성인구의 부족으로 여성에게 투표권이 허용되는 등 이미 세계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기존의 역사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인간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또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로 태어나게 한 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가 변화하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느 한 부분은 파괴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전쟁에 대해 새롭게 느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은 끔찍한 전쟁 이후에야 비로소 새롭게 인류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전쟁을 통해 태어난 이들이기도 합니다. 결코 떼어놓고 볼 수 없는 파괴와 생성의 힘을 전쟁을 통해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댓글목록
김현님의 댓글
김현
후기가 세미나 시간 말미 귀동냥을 했을 때만큼 흥미롭습니다.
제가 평소 접하고 생각하던 역사와는 다른 느낌이네요.
유택님의 댓글
유택전쟁이 또다른 시작/생성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안 부루마의 분석들이 인상 깊었어요. 아, 그렇게도 볼 수 있는거구나..!! 특히 여성들에 대한 것들, 그래서 첫 세미나때 '이안 부루마' 이 저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처음에 궁금했더랬어요. 결국 남자 작가 맞죠? 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의 투표권 획득... 여성 스스로 경제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나.. 그러면서 자국 남성을 거부하고 다른 세계에서 온 남성들과의 교제로 아예 '다른 삶'을 시작한다는 것들 등등. '역사'라는 이름이 주는 구태의연한 느낌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재미있고 충격적인 그 시대의 '실제 이야기들'이 이 역사세미나를 지루하지 않게 해줬어요. 전쟁은 파괴와 생성 두 가지 양면이 있다! 이럴수도 저럴수도!
연두님의 댓글
연두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 세미나에 못 가서 아쉬었더랬죠. 그 시간에 저는 링거를 맞고 있었...
전쟁을 겪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굴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기록하는 그의 기획이 예상보다 훨씬 더 흥미롭습니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생략되고, 추상화되어 매끈하게 드러나는 몇 문장 뒤에 숨어 있던 그 울퉁불퉁한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 속에서 욕망들이 드러나 보입니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은 것도 좋네요.
패전국이었던 일본과 독일에서
중요했던 것은 '남성의 명예', 문제가 된 것은 '여성의 비도덕성'이었다는 부분도 재밌었어요.
연합군들과 교제하는 여성들을 비난하는 남성들의 분노는 사실 질투와 시기였다고 이안 부루마는 말하죠.
전후 무질서 속에서 여성들은 참정권을 가진 인간이 되었습니다.
다음 이야기도 궁금하네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