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 후기] 철학수업 - 1부 삶과 자유 +3
요고마고
/ 2018-01-15
/ 조회 1,181
관련링크
본문
『삶을 위한 철학수업』 1부 삶과 자유 세미나 후기
1. 사건과 자유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진” 사건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사건과 사고에 대한 개념정리부터 시작되었다. 무엇을 사건 혹은 사고라고 말하는가에 대해 세미나 팀원들의 의견들이 오고갔다. 우선 사건과 사고는 ‘뜻밖에’라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의견에 대한 울림이 있었다. ‘뜻밖에’는 경험의 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건 없는 삶’을 지향해야할 행복한 삶으로 오해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경험 또한 오해하고 산다. 부피나 질량, 좀 더 자극적인 것 따위가 경험의 척도가 된다. 그 결과 표피적인 경험만이 난무하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경험 뒤에 찾아드는 공허감은 더 큰 스펙터클을 찾아 헤매이게 만든다. 그렇게 “뜻밖에”는 잊혀지고 있다. 스펙터클처럼 비용도 들지 않고 배워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한편 텍스트에서 말하는 사건과 사고에 대한 개념은 거칠게 말해 긍정과 부정의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이라는 단어조차 현실에서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는 의견이 있었다(예:형사사건). 텍스트대로 개념정리를 해본다면, 사고란 그 일을 ‘없었으면 좋았을’ 것으로 부정하는 것이고, 사건은 그 일로 인해 일어난 변화 자체를 내 삶으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것이다(지난 삶에 연연해하지 않고).
결국 사건이든 사고든,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험의 당사자는 최종적으로 ‘긍정함’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무언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사로잡히지 않은 나머지’를 자연스레 차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존의 ‘가능성’ 혹은 ‘기회’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자기 자신에게 가장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2. 긍정과 자유
‘주어진 삶에 순응한다는 것 VS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차이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변화를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은 얼핏 생각하기에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특히 몸이 아프게 되거나 돈을 잃거나 사고로 한쪽 팔을 못 쓰게 되었을 때, 그 말은 비전도 없고 발전도 없는 힘 빠지는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어쩐지 억울함마저 들기도 한다.
아픈 몸이 건강한 몸이 되는 것, 백만원 벌다가 천만원 벌게 되는 것, 한쪽 팔을 잃었는데 이를 대신할 의수를 쓸 수 있게 되는 것. 그 일 자체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그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이 텍스트에서 말하는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건강하지 않은 채로 살라는 것도, 적은 수입으로만 살라는 것도, 한쪽 팔만으로 살라는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은 능력의 유무와도 상관없다. 이것은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은 이러저러한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나라는 존재를 용인해주는 것이다. 몸이 아프게 되는 것도, 아픈 몸이 건강해지는 것도 모두 어떠한 조건이 셋팅된 장(場)이다. 그 마당에서 나라는 존재를 펼쳐내는 것, 그것이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하였다.
3. 고통과 자유
통념적으로 말하는 고통과 이번 텍스트에서 말하는 고통의 차이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보았다.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말했듯이 인간들은 가능한 고통을 없애야하는 것으로 여길 뿐이다.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고통, 웬만하면 겪고 싶지 않다!는 내면의 진실 말이다. 하필이면 왜 나야? 뭐 이런 것 말이다. -_-;;
그러나 한 생명의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생존의 필수조건이 되기도 한다. 아프다는 것은 몸이 의식에게 보내는 신호다. 그것은 생존에 ‘부적절한 신체상태나 신체활동을 정정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발제문에 제시되어 있듯이, 니체는 고통을 통해 “위대한 건강”이라는 철학을 낳았다. 그가 말하는 위대한 건강이란 2장의 긍정과 자유와도 연관되어 있다. 즉 나의 신체가 처한 어떠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자”에게 고통은 “삶의 심오한 스승”이자 “지혜로운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라고 말한다.
3장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또 한 가지는 강자와 약자에 대한 개념이다. 통념과 달리, 강자는 “넘어서는 자”이고 약자는 “회피하는 자”로 정의되고 있다. 통념적으로 강자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태도’가 기준이 된다. 즉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서의 강자는 ‘나에 대한 태도’가 기준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극복하는 자를 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4. 기쁨과 자유
이 챕터에서는 도덕과 윤리의 차이점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었다. 초중고교 과정을 거치며 겪었던 도덕과 윤리라는 과목을 떠올려 보았다. 맙소사. 그것은 점수를 충당하기 위한 과목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윤리는 암기과목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_-;; 플라톤,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같은 철학자들은 내 머릿속에서 완전 납작하고 무미건조하게 압축되어 굴러다니고 있던 쓸모를 찾지 못한(차마 그 세 글자는 말 못하겠다;;) 조각들이었다. 이제 와서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그 기준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도덕이고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윤리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이 또한 확신은 없다.
발제자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한 기쁨과 슬픔을 통해 윤리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기쁨이란 힘의 증가상태이고 슬픔이란 힘의 감소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윤리에서의 좋음과 나쁨을 구분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어떤 것의 좋고 나쁨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대부분 이와 반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탈도 많고.
결국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윤리가 시작된다는 같은 맥락의 의견도 제시되었다. 발제자는 이 챕터를 마무리하면서 ‘웃음’이라는 형식 자체의 힘이 갖는 의미가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5. 꿈과 자유
꿈조차 ‘가두어진’ 꿈을 꿀 수밖에 없는 현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라는 인간은 결국 아는 만큼 보고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것처럼, 꿈 또한 그럴 것이라는 점에서 착찹한 마음이 들었다. 나의 한계를 넘어선 꿈은 불가능할까? 한계라는 것은 다르게 말해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안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흐려지게 될 때 경계의 넘어섬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내가 확신하는 것들, 그것이 흐려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것을 존재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더없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시도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의 선택만이 남았다.
댓글목록
올리비아님의 댓글
올리비아현실에 꿈을 가둔다는 말이 저에게 어느때 보다 마음에 와 닿는 시기 입니다. 공부 하면 할수록 . 더 어려워요 . ^^;;;
연두님의 댓글
연두
멋진 후기네요, 요고마고. 세미나에 함께 하고 싶은 충동이 마구 일어나요. ㅎㅎ
더불어 이진경 선생님의 텍스트도 궁금해집니다.
'뜻밖에'라는 경험의 꽃, 그로 인한 열매로 우리는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알고 있던 것들이 흐릿해질 때 경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된다는 말도 깊히 와 닿아요.
알고 있는 것들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알지 못하는)것들을 보지 못하는지!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세미나의 핵심개념이 잘 요약된 후기입니다. 후기만으로도 훌륭한 복습이 될 것 같습니다.
긍정과 자유에 대해서 좀더 추가하자면, 니체나 스피노자에게
삶은 그 자체로서 긍정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부정의 개념이 없습니다.
삶이 그 자체로 긍정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도 그것만으로는 고정된 가치(본질)를 갖지 않는다는 거지요.
모든 것은 내가 그 것을 어떻게 '의지하는가'에 따라, 나에게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책에서 사고로 장애를 얻었으나 삶의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 사례를 보았지요.
반대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우연의 파편을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재료로 만드는 것은 나의 역량이며,
이렇게 내가 그것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게 될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