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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제] 0년 :: 2장 기아 0118(목)
유택 / 2018-01-16 / 조회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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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기아 Hunger                                                        역사세미나 1 18일 유택

 

1945 5월 영국 공군과 미군 폭격기가 네덜란드 상공에 밀가루 포대와 초콜릿, 마가린, 콘비프, 달걀가루, 담배, 커피, 껌 등이 가득 담긴 상자를 떨어뜨렸다. 영국군은 만나 작전이라 했고, 미군은 대식가 작전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에게 이런 식량은 단순한 감사 이상의 것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굶주리고 있었다. 반면 도시에는 잘 차려입은 고객들에게 정성 들인 식사와 다양한 음료를 제공하는레스토랑이 여전히 존재했다. “또 다른 극단적인 양상을 아는한 네덜란드인은 분개하면서 빠르게 대꾸했다. 그 극단은 암시장이었다.

 

대부분의 유럽 대륙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기아 사태에는 뭔가 좀 특별한 점이 있었다. 네덜란드는 의도적인 집단 형벌로 기아 사태가 발생한 유일한 서구 유럽 국가였다. 슬라브족이 이런 의도적 형벌을 받기는 했지만, 서구 유럽은 대상이 아니었다.

 

기아의 또 다른 문제는 갑자기 너무 많은 음식을 먹거나 잘못된 음식을 먹으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굶주림은 해방된 나라든 패전국이든 관계없이 전 세계 도처에서 발생했다. 모든 사업이 무너졌고,정상적인 경제가 작동을 멈췄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말고도 하늘에서 식량을 떨어뜨려야 하는 곳은 많았다.최악의 기아 사례는 수용소에서 일어났다.

 

영국은 1943년 벵골에서 이런 대규모 기아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 영국군 군의관들은 벵골 기아 혼합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공급했고, 아미노산을 코로 연결된 튜브로 공급하거나 주사하는 방법도 실험되었지만, 이 두 방법 모두 캠프에서는 실패했다. 많은 사람이 생존한 것은 영국 의사들과 의대생,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의사들의 비상한 노력 덕분이었다. 수많은 시험과 실패 끝에 그들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영양식 혼합물을 찾아냈다.

 

라마단 식단과 먹거리 암시장

 

영국에서의 삶은 네덜란드, 이탈리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독일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안락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에드먼드 윌슨은 일반적인 자기 방식대로 영국인들의 태도를 설명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자 모든 게 갑자기 얼마나 공허하고 메스꺼우며 무의미해졌는가! 적을 우리 마음에서 몰아낸 이후 우리에게는 궁핍하고 수치스러운 삶만이 남았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파괴로 향해 갔고, 우리는 스스로의 폐허 속에서 기댈 만한 그 무엇도 만들 수 없었다.”

 

프랑스의 상황은 훨씬 더 나빴다. 조달청 장관 폴 라마디에는 무슬림 단식에서 이름을 따와 라마단이라 불렸고, 빈약한 하루 배급식량에는 라마단 식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프랑스인들은 뭐든 편리한 생활을 가져다주는 암시장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고, 프랑스 농부들은 전국 도처에 있는 암시장에서 부자가 되자 더는 농산물을 정가로 판매하지 않았다. 한편 적어도 프랑스의 대부분 지역은 여전히 물질적으로 온전한 편이었다. 스펜더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는 보이지 않는 폐허였다. 독일처럼 프랑스도 “0에서부터 재건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느낌이 공기에 퍼져 있다 해도 벽들은 여전히 세워져 있고, 카페는 커피가 없는데도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그리고 항상 암시장이 있었다.” 로마도 파리처럼 물리적으로는 여전히 멀쩡했다. 팔레르모나 나폴리 같은 도시는 그렇지 않았다. 심각하게 파괴된 부다페스트는 두 달 이상 소련군 치하에 있었다. 1945 2월 소련 적군에 의해 해방된 뒤에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뒤따랐다.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브레멘, 드레스덴, 그리고 1945년 폭격 계획에 추가되면서 파괴된 뷔르츠부르크나 포르츠하임 같은 지방 소도시들은 검게 그을린 잔해 무더기였고, 여전히 죽음의 악취로 가득했다. 전후 초기 몇 개월간 이들 지역을 찾은 방문자들이 처음 마주한 건 괴기스러운 침묵이었다. 스티븐 스펜더는 쾰른을 방문했다. “도시의 폐허는 거주민들의 내적 폐허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도시의 상처를 치유하는 삶을 사는 대신, 숨겨진 음식을 찾아 폐허 더미를 헤집고 성당 인근의 암시장에서 생업을 이어가며 사체를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생산적인 거래가 아닌 파괴의 거래다.” 히로시마는 물론 도쿄나 오사카의 상황은 더 나빴을 것이다. 미 해군 중위였던 셔우드 모런은 이렇게 편지에 썼다. “내가 목격한 첫 번째 전쟁 피해지인 도쿄는 참혹하고 엉망진창이라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침묵이지. 경적 소리도, 고함도, 덜그럭거리는 소리도 나질 않아. 우리가 혐오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어떤 것도 없다네. 도쿄, 그리고 모든 일본인에게 재앙은 과거이지만, 모두가 지독한 침묵만은 공유하고 있네.”

 

패전국에서 기아와 전염병의 가능성은 상당히 현실적인 문제였다. 일본인은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굶주려 있었다. 전쟁 이후의 인간이 겪은 고통의 규모는 너무 거대하고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비교가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일본과 독일에서 식량 위기를 가중시킨 것은 1945년의 심각한 흉작이었다. 10월 일본 재정부 장관은 미국 기자들에게 즉각적인 식량 수입 없이는 일본인 수천만 명이 다가올 겨울에 아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독일에서도 재앙적인 예측이 나왔따. 그러나 이는 과장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점령지에서 약탈해온 식량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해도, 독일에서의 삶은 충분히 나빴다. 독일과 일본 지역의 희생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제연합구제부흥사업국 같은 국제 구호 조직에 기금을 대라고 미국 의회를 설득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세금을 더 쓰거나, 영국에서 배급을 줄여 과거의 적에게 식량을 공급하자는 견해는 도모하기 쉬운 정책이 아니었다.

 

야수를 먹여 살리라고?

 

도덕적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측면에서 뭔가를 해야 했다. 독일과 일본의 완전한 붕괴는 연합국에는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었고, 민주적 질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후 질서 재건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영국의 친노동당 신문 <데일리 미러>는 간단명료한 제목으로 구호 문제를 다뤘다. “야수를 먹여 살리라고?” 신문은 독일인이나 고향에서 쫓겨난 독일 난민들에게 연민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이 상황을 해결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동정심 때문이 아니다문제는 이것이다. “유럽이 수렁에 빠져들수록 다시 끌어올리는 데는 시간이 더 많이 들 것이다. 점령 기간도 더 길어질 것이다.”

 

국제주의자적 이상을 가진 국제연합구제부흥사업국이 공산주의에 동정적이라는 의심을 받을지라도, 소련과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발 빠른 행동이 필요해졌기 때문에 국제연합구제부흥사업국의 역할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었다. “기아와 빈곤, 질병 등은 불안과 공산주의의 망령을 양산할 것이다. 굶주린 사람들은 반그리스도 철학과 전능한 국가(공산주의를 말한다)를 신격화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다.” 그리하여 많은 조치가 취해졌다.

 

노동자의 필요량은 하루 1500칼로리 내외였다. 성인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 식량은 일반적으로 1200칼로리 정도다. 사실 1945년에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은 그 절반만 얻어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전후 첫해에 독일인과 일본인을 재앙으로부터 구한 것은 군 배급 식량이었다.

 

연합국의 원조를 받는데도 유럽과 일본 사람 대부분은 거대한 범죄 조직망인 암시장에 의존해야 했다. 화폐경제는 많은 지역에서 주된 통화가 담배로 이뤄지는 물물교환으로 대체 되었다. 점령군 입장에서도 저항하기 힘든 기회였다. 담배로 거의 모든 것을 살 수 있었다.

 

일본 제국 군대에서 제대한 군인들도 한국과 타이완계 조직폭력배나 일본 하위계층의 건달, 그리고 파괴된 사회의 부랑아들처럼 암시장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냈다. 당시 여자는 판판이 되고, 남자는 암시장 짐꾼이 된다라는 속담도 있었다. 일본 암시장 물건 대부분은 연합군 군속들이 일본 조직폭력배들에게 판매한 것이었다. 미군은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하라며 모든 기계와 건축 자재들을 포함해 남은 물자들을 일본 정부에 인도했다. 약탈 물자를 포함해 이 중 상당수가 사라졌는데, 이 물자 덕에 일부 전범을 비롯한 많은 일본 관료는 부자가 되었다.

 

독일과 일본은 문화, 정치, 역사적인 면에서 명백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유사한 조건 아래서 행해진 인간 행동이라는 점에서 독일과 일본은 공통점이 매우 많다. 인간의 고난을 착취하는 범죄화된 경제의 결과는 사회적 연대의 붕괴였다. 유대인, 3국 국적자, 외국인을 유달리 지독한 범죄자로 보는 것은 단순한 편견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인간 특성은 혹독한 환경 조건에서 더 악화되었고, 연합군이 외국인에게 특혜를 준다는 인식이 공유되면서 더욱 날카로워졌다. 난민 캠프 유대인은 물론이고 호화롭거나 편안하게 사는 유대인이 거의 없었는데, 여기에는 일면의 진실도 있었다. 사실은 연합군 장교들도 반유대주의나 인종주의를 극복한 상태는 아니었다. 유대인 같은 이방인에게 혐의를 두는 행위는 독일, 일본이 다른 나라에 했던 만행을 직시하는 걸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당시 넓게 퍼져 있던 감정의 일면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암시장 경제는 점자 규제된 경제로 바뀌었다. 하지만 당시 무법 시대가 낳은 장기 후유증의 타격은 매우 컸고, 특히 독일과 일본에서 그랬다. 전후 경제 몰락과 뒤이은 암시장은 옛 계급 구분의 거대한 파괴자였다. 대가족을 가진 여성들은 음식과 바꾸기 의해 집안 가보를 들고 시골길을 터덜터덜 걸어가야 했다. 가난한 농부들은 갑자기 현금 부자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한때 엄청 값비싼 아름다운 전통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진흙투성이 논을 걸어가는 광경을 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몰락한 귀족 가문 여성은 많은 경우, 양심적이지 않은 신흥 벼락부자와 결혼하라고 강요 받았다. 그러나 전후 혼돈은 기득권 경쟁자들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기업을 일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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