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발제] 위험한 책 :: 2부 13~15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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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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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도박대"
"얼마간 지혜는 가능하겠지만, 일체의 사물들을 본다면 차라리 우연이라는 행복한 확신이 든다" ('해뜨기 전에')
◎ 세계의 어린이 제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은 차라리 놀이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그 놀이에는 어떠한 숭고하거나 초월적인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을 거부한다.
세상을 도덕적으로 해석했던 유물론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유한한 삶을 사는 모든 존재들을 죄들의 집합으로 보고 죽음으로써
처벌되는 것이라 하며 그는 '생성이야말로 저주다'라고 외친다. p.268
그러나 니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에 주목한다. '세상이 놀고 있다.'고 만물의 유전설을 주장한 그는 생성과
소멸을 하나의 놀이처럼 느끼고 그 과정 속에서 다양성을 만들며 그것은 하나의 유희일 뿐이라 한다.
생성과 소멸, 건축과 파괴는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이 영원히 동일한 무구의 상태에 있으며, 이 세계에서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유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 다른 세계를 소생시키는 것은 자만의 욕구가 아니라 항상 새롭게 깨어나는 유희의 충동이다. [그리스 비극시대의 철학] p.268
헤라클레이토스는 '놀고 있다'는 말을 통해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한다.
"왜 그러냐고 묻지 말라. 그것은 하나의 유희일뿐이다. 그것을 너무 비장하게 특히 도덕적으로 받아 들이지 말라."
“자만의 욕구가 아니라 항상 새롭게 깨어나는 유희의 충동” (세계를 완전히 충족시킬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대단히 오만한 것)
p.269
놀이의 특징:
-놀이에는 어떤 숭고한 목적이 없고 유희만 있다
-놀이는 시작과 끝만 있을 뿐 과정으로만 존재한다.
->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에 주목하며 세계는 초월적 진리나 숭고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놀이' 처럼 유희만 있을
뿐이고, 항상 새롭게 깨어나려는 유희의 충동으로서 생성과 소멸의 과정으로만 존재한다고 주장.
◎ 우연이라는 귀족
차라투스트라는 우주에는 목적이 없다는 것, 그래서 모든 사물들을 어떤 목적으로 묶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우연으로만 존재하는 파편같은 사물들은 어떤 것도 생성 시키지 못한다. p.271~272
차라투스트라는 그 우연의 파편들을 자신의 냄비 속에 넣고 '제대로 익인 후' 새로운 조합을 구성한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의 생성,
하나의 조합, 하나의 법칙이 출현한다. 이처럼 필연의 법칙이 생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법칙은 생성 속에서, 생성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p.273
-> 인과의 법칙으로 생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생성으로 인해 인과가 성립된다.
ex) 하늘에 흩뿌려진 별들이 어떤 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선을 그었을 때 별자리를 찾아내는 것
학자들은 기여코 생성에 주기를 부여하고 생성의 법칙으로 삼아 설명되지 않는 우발성이나 혼돈들은 예외의 것으로 배제 시킨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주기는 새로운 조합을 구성하는 과정이자 동전의 제 3 의 면, 혹은 주사위의 제 7 의 눈처럼, 우발성이나 혼돈도 포함한다. p.274
◎ 영원한 돌아옴
차라투스트라는 학자들의 주사위 놀이에 속지 말라고 당부한다.
“학자들 또한 가짜 주사위 놀이도 할줄 알거니와, 나는 그들이 놀이에 너무 열중하여 땀까지 흘리는 것을 보았다” [‘학자들에 대하여’] p.274
학자들과 아이들의 주사위 놀이는 다르다. 학자들은 주사위 놀이에서 주사위가 떨어진 결과 값을 구하는데 집중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에 있어서 결과값은 중요하지 않다. 재미를 주는 건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에 있다.
때문에 우리는 학자들의 주사위 던지기와 아이들의 주사위 던지기를 전혀 다른 것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 두 가지 모두 어떤 반복을 나타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학자들의 경우엔 그것이 ‘동일한 법칙’의 확인, 동일성의 반복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대로 아이들의 경우에 반복되는 것은 새로운 상황,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내는 ‘던지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의 주사위 놀이에서는 ‘행위의 반복’, ‘생성의 반복’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새로움의 반복’, ‘차이의 반복’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반복을 구분하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영원회기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p.276
ex) 조카들의 촛불키기 놀이 (노래하고 소원 빌고 촛불을 껐는데 조카들은 또 초에 불을 붙인다. 초가 달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재밌댄다)
주사위 던지기가 놀이가 아니고 반복되는 노동 같은 것이었다면 그 용기도 언젠가는 시들해지고 말 것이다.
(중략) 춤을 추면서 더 잘 추게 되고, 웃음을 웃으면서 더 잘 웃게 되듯이, 그의 주사위는 매번 더 높이 던져졌다. 그가 던진 주사위는
분명히 그에게 돌아왔지만, 그 떨어지는 주사위를 받는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닌 것이다. p.278
◎ 주사위 놀이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영원회귀의 비밀들
본문에서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두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하나, 세계의 관점인 자연학적이고 우주론적 차원에서 니체는 세계를 힘(혹은 에너지)의 바다처럼 생각한다. 비록 세계가 유한해서
그 양에 제한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끊임없이 출렁이고 변전한다. 영원히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생성과 소멸의 운동만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것이 영원회귀의 세계상이다.
둘, 우리들의 관점에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선택(의지)을 요구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로서 우리 역시 생성과 소멸의
반복하는 운동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구체적으로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건강한 변신을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니체는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이 영원회귀를 능동적으로 택하는 것이 좋은 것(도덕적 의미의 ‘선한 것’과는 다르다)임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원회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의지)은 우리 자신 안에, 그리고 세계 안에 예전부터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단지 잠재적
형태로만 그러했던 새로운 존재들을 현실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주사위 놀이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영원회귀의 비밀들- p280 참고
14. 사자가 못한 일을 어린 아이가 한다.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좀 이상한 변긴 이야기.
◎ 세가지 변신
낙타의 정신, 사자의 정신, 어린아이의 정신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p.285
첫번째 동물 낙타
-인내력이 아주 강한 동물
-그의 등은 아무리 무거운 짐도 가뿐히 실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튼튼하다.
-무릎에 굳은 살로 보아 그는 정말로 공경심이 강하며 참으로 예의가 바르고 착한 동물이다.
-그는 무릎을 자주 꿇어 주인의 자존심을 영광되게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자존심에는 큰 상처를 주었다.
-그는 아무리 더러운 물이라도 기꺼이 들어간다. 그 모든 짐을 짊어지고 묵묵히 걷는다.
-이 동물이 주인에게 한번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 동물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 착한 동물이 자기 삶에 얼마나 못된 고문을 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그의 희생은 정말 그의 착한 마음씨에서 온 것인가. 혹시
희생이라 부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 삶을 고된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그가 아닐까.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당신들 중 몇몇은 분명 낙타이다. 자기 스스로가 삶을 ‘견뎌야 할’ 고통으로 만들어 놓고 ‘삶이란 고된 것이다’라는 말을 진리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사막으로 만들과 있는 셈이다. 언젠가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중력의 영은 그런 착한 당신을 원한다고. p.286
낙타와 다를 바 없는 나귀 (‘보다 높은 인간들’이 위버멘쉬가 되지 못한 이유와 관련)
-나귀는 귀가 길어서 남의 명령을 놓치지 않고 잘 듣는다.
-이 동물의 울음소리는 “이-아”(I-a) 그 소리가 “예” (독일어의 ‘예’는 Ja 임)와 비슷하다.
-먹는 것도 별로 가리지 않는다.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감별해낼 수 없어서 무엇을 줘도 “예”하고 잘 받아 먹는다.
두번째 동물 사자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무언가를 시키려하면 우선 으르렁거리기부터 한다.
-이 동물에게는 자유를 향한 열망이 있다.
사자와 용(신)의 대적을 통해 사자의 특성을 설명
아마 사자가 자신을 지배하려 했던 모든 주인들을 물리친 후 마지막 남은 주인, 바로 신에게 대적하려 가는 길이였던 것 같다. 사자의 정신이 신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은 부득이하게 용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용은 말했다.
“너는 해야만한다.” - 용의 목소리는 의무나 당위(Sollen)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는 도덕의 목소리이고, 법의 목소리이고 관습이나
제도의 목소리이다.
“모든 사물의 가치는 내게서 빛난다.” - 용(신)은 자신이 가치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가치를 평가하는 자라고 말한다. 옳고 그름, 귀하고 천함은 오로지 신(神)인 자신만이 정하는 것이라 했다.
사자는 으르렁 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고 싶다. 나를 내버려두라. 나는 그 누구의 명령도 받고 싶지 않다. 나는 자유를 원한다.”
- 그는 누구의 명령도 받고 싶지 않고 자유를 원한다.
왜 정신은 낙타에 머물러서는 안되는가, 왜 정신은 사자를 필요로 하는가. 여기 혹시 자유의 정치, 가치의 창조 그런 것을 꿈꾸는 이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사자가 되어야 한다.
“ 형제들이여, 자유를 얻으려면, 그리고 의무에 대해서도 신성한 ‘아니오’를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사자가 되어야 한다.”
“사자는 갈증에 굴복하여 안락한 자들처럼 되지 않는다. 오아시스가 있는 곳이라면 우상숭배 또한 있기 마련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름 높은 현자에 대하여’]
신과 함께 안락하기보다는 외롭고 굶주리더라도 신 없이 지내는 것, 그때 나의 정신은 분명 사자였다. p289
사자는 용과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자는 용을 완전히 물리칠 수 없었다. 낙타처럼 삶을 사막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 역시 웃고 즐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중략) 사자는 용에게 ‘나는 싫다’고 반항했지만 그러고 나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말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많이 알고 있지 못했다. p290
정신의 세번째 변신, 어린아이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가 해낼 수 있는가? 왜 자유를 강탈해 왔던 사자가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세가지
변신에 대하여’)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도덕이나 법률, 제도는 아이의 행동을 심판할 수 없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을 뿐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없다. 그는 비도덕적 존재이다. (악한 존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도덕을 갖고 있지도 않다는 의미)
-> 어린아이는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는 그 자체로 ‘큰 이성으로서의 신체’인 것 같다.
사자와 어린아이의 차이
아이는 으르렁대지 않는다. 그냥 웃을 뿐이다. 아이는 용을 보고도 웃음짓는다. 용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아이의 장난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용을 죽일 수 있는 건 사자의 으르렁거림이 아니라 웃음이다. 사자에게는 전투였던 것이 아이에게는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전투를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닌 싸움 자체를 무화시키는 아이의 웃음!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에는 아이의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아이에 이르러서야 정신은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세가지 변신에 대하여’) p.291
어린아이들은 자기 욕망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여러분만이 자기 욕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세계의 주인일 수 없는 이유를 아는가?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인인 자만이 자기 세계를 갖는 것이다.
-> 지난번 시간에 언급됐던 ‘욕망없는 관조’와 같은 맥락에서 읽혀진다.
청중 중에 누군가 물었다.
모든 어린아이는 어른이 될 수밖에 없고, 어떤 어른도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가 답했다.
“우리 안에는 어린아이가 있다” (유고, 1882~1883/4)
우리 안에는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낙타도 있고 사자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가 그 모든 것들을 제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중략) 너희의 아이들은 너희가 직잡 찾아야 한다.
“나는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내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내 자신을 위대한 방식으로 사랑할 때 나도 사랑의
결실인 임신을 하는 것이다” (‘뜻에 거슬리는 행복에 대하여’)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네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아이가 나오는 것이다.
-> 욕망없는 관조로 가치중립적인 태도가 불임증을 낳는다와 상반되는 태도
-> 차라투스트라의 여성에 대한 가르침에서 임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부분
질문)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변신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가? 15 장에서는 각각 서로 다른 종으로의 변신이라고 하는데 낙타에서 사자의 시기 없이 어린아이로 변신이 가능할까?
◎ ‘예’ 와 ‘아니오’
차라투스트라가 변신 이야기를 통해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긍정에 대해서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은 ‘삶을
긍정하라’는 말과 같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말이 그랬듯이 ‘긍정’이라는 말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긍정에 대한 오해 최소 세가지
1. ‘저편의 또다른 세계를 신봉하는 자들’의 경우이다. 이들은 ‘이 세계’ 아닌 다은 세계, 즉 ‘저 세계’가 있음을 긍정한다.
(심판 뒤에 천국과 지옥에 대해 떠들어대는 성직자들, 이데아의 세계나 실제계에 대해 탐구하는 철학자들, 신체를 경멸하고 정신과
이성을 떠받드는 자들이 이에 속함) ‘저 세계’에 대한 이들의 높은 평가는 ‘이 세계’에 대한 부정과 평가절하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들의 긍정은 사실상 부정을 기반으로 한다.
2. 낙타와 나귀의 긍정이다. 낙타와 나귀는 주인의 명령을 ‘아니오’라고 거부할 줄 모르고 무조건 ‘네’라고만 말한다. 부정할 수 없을
때의 긍정, 그것은 긍정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가 함께 위버멘쉬가 되기를 원했던 ‘보다 높은 인간들’은 신의 죽음을 받아 들였고
세상의 모든 가치를 뒤집어 볼줄 알았던 사람들이지만 마지막에 나귀를 ‘긍정의 신’으로 섬기는 ‘나귀제’를 열고 말았다. 긍정이란 ‘
긍정의 신’을 포함해서 어떤 신도 섬기지 않는 것)
3. ‘보다 높은 인간들’의 경우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자기극복’의 가르침이지 ‘자기보존’의 가르침은 아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기존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것으로, 스스로 자기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통한다. p.294~296
니체의 긍정이란
-부정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긍정은 부정조차 긍정한다.
-긍정은 자기 안에 부정을 갖는다. 긍정 안에는 “네”와 “아니오”가 모두 들어 있다. 그러나 긍정 안에 있는 부정과 긍정 밖에 있는 부정은 그 질이 전혀 다르다.
긍정 안에 있는 부정 - 이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 들뢰즈는 니체의 긍정은 부정을 포함하지만,
긍정 밖에 있는 부정(은) - 긍정을 포함하지 못한다. (‘부정의 부정을 통해 ‘긍정’을 설명하는 변증법과 충돌)
도식 1) 긍정(부정) = 긍정 / 부정(긍정) = 부정
-> 간장공장 공장장은 간장공장 공장장이고, 된장공장 공장은 된장공장 공장장이다. @_@
파괴와 거부(부정)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창조와 생성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니다.
파괴와 해체라 하더라도 그것이 긍정의 한 단계로서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인 것이다.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했을 뿐이라면 그것은 부정이지만 그가 새로운 삶을 생성시키고 있다면 긍정이다.
파괴가 부정이 아닌 긍정의 질을 갖기 위해서는 다음 번 생성이 있어야 한다.
-> 부정을 포함한 긍정 : 긍정을 위한 단계로서 부정(파괴)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
그리고 한 번의 생성은 다음 번의 생성에 의해 다시 긍정의 질을 획득한다.
한 번의 파괴는 다음의 긍정에 의해, 그리고 한 번의 긍정은 다음의 긍정에 의해 긍정되어야 한다. -> 영원회귀
도식 2) 부정(파괴) -> 긍정(생성) = 긍정(생성) -> 긍정(생성) : 영원회귀의 속성(?)
긍정은 꼭 다음 번의 긍정을 불러 온다. 긍정은 자신을 긍정해 줄 긍정이 영원회귀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p.298
15.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위버멘쉬’와 ‘초인’을 구분할 것 (초인이라는 말은 마치 인간 중에 특별한 타입을 연상시키므로)
◎ 하나의 매듭
‘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올바로 이해했을 때 위버멘쉬가 출연하며, 위버멘쉬만이 신의 죽음을 바로 이해한다.
인간은 신보다 오래된 신앙을 지녔고, 그 신앙으로 신조차 창안했다. 신이 백 번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이유는 바로 신의 창조자인 인간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p302
인간은 태양이 넘어가는 황혼녘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 그것을 섬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림자가 사라질 ‘위대한 정오’가 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 시간은 자기 ‘그림자의 그림자’로 존재했던 인간이 스스로를 극복했을 때 찾아오는 위버멘쉬의 시간이다. 따라서 신의 죽음도 위버멘쉬의 출현도 모두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위버멘쉬’라는 말 자체가 ‘인간을 넘어섬’, ‘인간을 극복함’이라는 뜻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p.303
문제는 결국 인간이다.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의 밧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너희들이 최고 이상으로 섬기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시 검토해 보라. 너희들이 ‘인간적’이라며 자부심을 갖는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 너희가 그것들을 다시 느낄 때에 비로서 너희는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p.308
차라투스트라가 볼 때 인간이 불명예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다. 그것은 ‘인간을 넘어서는 것’, 즉 ‘위버-멘쉬’하는 것이고, 위버멘쉬를 낳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출산은 사실상 변신을 의미한다. 스스로의 힘에 의해 어떤 변신을 이루었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변신 전의 존재가 변신 후의 존재를 낳았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위대해지고 싶다면 인간은 위대한 존재로 변신해야 한다. p.309
그러나 인간은 위대한 자를 낳는 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위대한 자이고 싶어한다. 그들은 위대한 자를 낳는 산통을 두려워 한다.
인간은 자신을 진화의 끝매듭으로 간주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연결된 밧줄로 규정한다.
“사람에게 위대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다리라는 점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p.310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인간이 진화한 종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위버멘쉬가 진화의 최종 목적지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 진화와 변신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에서 위버멘쉬로 넘어가는 것이 ‘발전’이나 ‘진화’라기보다는 철저한 ‘몰락’을 거친 ‘변신’임을 주장한다.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것의 축적을 통해 일어난 질적 변화가 아니며, 인간적인 그 어떤 것도 승계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것의 철저한 몰락만이 위버멘쉬의 출현 조건이다. p.313
-> 사자는 낙타의 강화를 통해서 출현한 것도, 낙타의 부정을 통해서 출현한 것도 아니다. 아이는 사자가 발전한 모습이 아니다. 이들은 전혀 다른 종이다. 사자는 아이가 되기 위해 철저한 변신을해야 한다. p.314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보다 높은 인간들’
예언자 - 세상에 대한 부정의 운동이 극에 이르러 결국 수동적 허무주의에 빠져든 사람
나귀를 탄 두 명의 왕들 - 천민적 도덕과 문화에 염증을 느낀 자들, 이들은 과거의 추억 속에서 현실을 비난한다.
거머리를 연구하는 전문가 - “모호하고 환상적인 모든 것들’을 경멸한다. 그는 학문에 있어 철저히 금욕적인 사람이다.
마술사 - 거짓과 속임수로 이루어진 세계를 연기함으로써 장난을 친다. 그의 속임수는 ‘저 세계를 믿는’ 성직자들이나 철학자들의 거짓을 잘 재현한다.
교황 - 신에 대한 봉사만으로 평생을 보낸 사람으로 유일신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두 눈 중 하나를 제거한 사람.
가장 추악한 인가 - 그의 모습은 얼마나 추악하던지 그를 본 사람은 ‘동정과 연민’으로 쓰러진다. 차라투스트라도 기절했을 정도.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 그는 자긴이 부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줬다. 그러나 부자도 가난한자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악덕을 목격하고 숲으로 도피했다. 빈둥거림을 행복으로 삼고 있는 사람.
방랑자 - 차라투스트라의 그림자를 차처해서 그와 함께 위험한 모험도 마다하지 않은 자, 그러나 피로라는 최대의 적이 그를 덮친 것이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들을 지배하는 건 허무주의다. 어떤 이들은 ‘반동적 허무주의’를, 다른 이들은 ‘수동적 허무주의’를 표현하고 있다. 어떻든 이들 모두는 허무주의다. p.321
◎ 모든 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보다 높은 인간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만찬까지 열어준다. 그러나 ‘보다 높은 인간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믿음을 철저히 배신하고 나귀를 숭배하는 ’나귀제’를 열었다. 그들은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친 긍정을 완전히 오해했다. 그들은 신앙을 만드는 것 자체를 그만두지 못했던 것이다. 변신이라는 불확실한 과정에서 자신을 내맡기기 보다는 뭔가 의지할 것을 찾음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고 지탱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차라투스트라의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극복’이었다.
“보라, 나는 항상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이다” (‘자기극복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질문) 인간에게 이것이 이해한다고 경험할 수 있는 일인가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 p.327
위버멘쉬를 동사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기’, 혹은 ‘인간적인 것’ 으로부터 ‘변신하기’ 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331
댓글목록
소소님의 댓글
소소
아.. 어제 발제까지 끝내고 나니 몸이 천근만근이라 기절했다 오늘 일마치고 부랴부랴 발제내용 올립니다.
게시판에도 내용을 직접 작성하려 했는데, 복사 붙여넣기 과정에서 작성 문자 오류로 몇번 다시 시도하다 파일만 올립니다!
(제 노트북이 맥이라 그런가... 나중에 pc에서 파일 다운 받아 수정해 놓겠습니다.)
같이 공부하니 풍부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아요~~ 다음주 만나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