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 발제] 철학수업_1부 삶과 자유 :: 0113
오라클
/ 2018-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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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철학수업 > 1부 삶과 자유 ▪2018-0113(토)
1. 사건과 자유 ::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진” 사건에 대하여
일생일대의 사건
① (만남-사건)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종치기 꼽추 콰지모도에게 에스메랄다와의 만남 / 에이허브 선장에게 거대한 흰 고랙 모비딕과의 만남 / 백인 홀아비 험버트에게 롤리타와의 만남이다. ② (갈라짐-사건) <박하사탕>의 영호에게 ‘그날’ ‘그 사건’은 여러번의 갈라짐이 중첩되는 방식으로 왔다. 면회왔던 순임과 무장을 한 영호를 태운 트럭이 갈려져 가는 길 등. 그것은 영호로 하여금 그 때까지의 자신과 갈라서게 하는 반복적 사건들이었다. ③ (만남-갈라짐의 사건) 콰지모도, 에이허브, 험버트에게 만남이 이전의 삶과 갈라짐을 뜻했던 것처럼, 영호에게 이 모든 갈라짐은 생각하지 않았던 다른 삶과의 만남이었다. 일생일대의 사건은 근본적인 갈라짐이기도 한 근본적인 만남이다.
사건을 거세하는 방어기제
우리의 삶은 사건을 통해 구부러지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곡선을 구부리는 특이점들. 인생이란 특이적 사건들의 집합이다. ① 누구나 ‘사건’을 겪지만, 모든 일이 다 사건은 아니다. 사건은 그것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 없는 어떤 구부러짐(곡절)을 만드는 경우를 말한다. ② 또한 우리는 많은 ‘사건’을 겪지만, 모두 사건으로 겪지는 않는다. 살아온 시간 속에서 사건이 그토록 적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인생을 살고자 하기 때문이고, 자기가 목표로 하는 곳에 애써 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③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거세하여 사건이 되지 않도록 저지하려 한다. 이런 ‘방어기제’ 덕분에 우리는 그토록 많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별다른 사건없이 평탄하고 안정된 인생을 산다. 사건(곡절)이 많은 인생이란 불행한 인생이고, 사건(곡절)이 없는 인생이야말로 행복한 인생이라고 믿는다!
사건과 사고
① (사고) ‘사건’에 대항하여 삶을 애초의 방향으로 되돌려놓으려할 때, 그것은 사건이 아닌 ‘사고’가 된다. 사고란, ‘없었으면 좋았을’ 어떤 것으로 부정적이다. ② (사건) 반면 사건이 되는 것은, 사건으로 인한 변화를 나의 새로운 삶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함으로써다. 사건으로 인한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피할 수 없이 내게 밀고 들어온 그것이 내 삶 안에 자리잡았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변화를 긍정한다는 것은 변화를 새로운 삶의 기회로, 또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긍정한다는 것이다. ③ (사건) 사건이란 어떤 일로 인해 애초의 궤적에서 벗어난 이탈에 대한 긍정을 포함한다. 그래서 사고가 많은 인생은 불행하지만, 사건이 많은 삶은 행복하다. 뜻밖에 닥쳐오는 일들을 사고로 부정하는 이들에겐 삶의 필연적인 불행을 뜻하지만, 사건으로 긍정하는 일들에게 삶의 필연적인 행복을 뜻한다.
오디세우스의 방어기제
에이허브와 오디세우스이에 비하면 행로를 바꾸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기에,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으려고 거부했던 오디세우스는 소심하고 비겁하다. 세이렌의 노래가 뜻하지 않는 길로 가게 하는 사건의 매력을 보여준다면, 오디세우스의 비겁은 매혹하는 사건에 맞서 목적지를 향해가려는 방어기제를 보여준다. 매혹을 거부하려는 이에게 매혹적인 노래는 행복일까 불행일까? 삶의 행로를 구부러뜨리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그런 매혹은 행복일 수 없다면, 사이렌의 노래를 듣는 것이 오디세우스에겐 결코 행복일 수 없다! “오, 신이여, 그에게 사건 없는 평탄한 삶을 내리소서!”
2. 긍정과 자유 :: 기적 같은 삶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서칭 포 슈가맨>의 기적
<서칭 포 슈가맨>은 가수 로드리게스에 대한 다큐영화다. 로드리게스는 음반의 실패 이후 무대 위의 화려함을 포기하고 무명의 일상 속으로 돌아가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평범한 삶을 받아들인다. 그 공장에서 동료들과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선거에 출마하고, 자식들을 책이 있는 삶으로 인도한다. 큰 기대를 안고 시작했던 노래가 실패했을 때, 그 행운이 자기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힘들고 희소한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며, 보이지 않는 기적이고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기적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 결핍과 불만스런 삶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성공을 꿈꾸었던 재능있는 이들은 실제 삶에서 더욱 쉽게 실패한다. 훌륭한 성공의 기술보다 어려운 것은, 훌륭한 실패의 기술이다. 일상의 사는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훌륭한 실패의 기술이다. 성공이야 드물지만, 실패는 셀 수 없이 많으니!
신체교정의 꿈
줄기세포치료법이 발견되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좀더 자유롭고 행복해질까? 생명산업이 각광받는 이유는 그것이 ‘돈이 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백혈병약 글리벡을 1년 복용하는데 2천만원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줄기세포치료법은 얼마나 들까? 억대의 돈을 치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선 치료받기 힘들 것이다. 치료법이 나오기 전에는 장애가 있는 자기 몸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이들이, 치료법이 나오고 나서는 치료비를 버는 불가능한 꿈을 위해 인생을 바치게 된다! ‘정상적 신체, 정상적 삶’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바치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면 돈이 없이 일어설 수 없는 자기 몸을 한탄하고 절망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지연장술’로 소인증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을 때, 미국소인협회의 회원들은 ‘치료’를 거부했다. 평균신장이라는 사회적 척도에 맞춰 사지를 연장할 게 아니라, 사회적 척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있었지만, 몇 년동안 일상적 생활을 중단한 채 휠체어에 앉아서 신체를 연장하는데 바치는 것을 거부했다. 작은 신체를 교정하는 데 인생을 걸기보다는, 그런 신체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선택했다! 자신의 신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막대한 비용ㆍ노력ㆍ시간을 들여 신체를 교정하는데 삶을 바치거나 교정의 희망에 영혼을 바치는 한, 누구도 자유롭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이루기 힘든 희망은 신체의 교정 없이는 행복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의 이유가 되어 되돌아올 것이며, 신체를 교정하면 따라올 것 같은 ‘행복’ 환상은 지금의 신체를 불행의 원천으로 보게 만들 것이다.
기적 같은 삶을 위하여
장애인 전사 박경석. 교통사고 때문에 장애인이 된 그는 한동안 좌절의 시간을 통과한 뒤,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전사가 되었다. 그는 ‘정상인’이었을 때보다 더 자유롭게 사는 장애인이다. 기적 같은 삶이다. 로드리게스는 성공의 가능성이 사라진 ‘정상적인’ 삶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절망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대신 자유로운 기적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다. 박경석은 정상적 삶의 가능성이 사라진 절망적 상황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탄식과 절망 대신 자유로운 기적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다.
소망하는 신체ㆍ행운ㆍ능력ㆍ경제적 조건 없이는 자유와 행복은 없다고 믿는 이에게, 자유와 행복은 결코 다가가지 않을 것이다. 자기 것이 아닌 것만을 부러워하며 그것 없다는 사실로, 자신의 불행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자기 것이 아닌 행운, 자기 것이 아닌 자산을 부러워하는 한, 결코 자유와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허공을 뒤지며 행복을 구하고, 허공을 디디며 자유를 찾는다. 각자에겐 각자의 자유가 있다. 자신이 안고 살아가야 할 각자의 몸이 있고, 그 각각의 몸에 깃들 능력이 있고, 각자의 몸이 펼칠 각자의 삶이 있다. 그 삶마다 가능한 각자의 자유와 행복이 있다. 각자가 서 있는 곳마다 각각 다른 자유와 행복의 길이 있다. 모든 자유와 행복은 자신의 현재, 지금의 몸과 지금의 조건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 몸과 조건을 자기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3. 고통과 자유 :: 피할 수 없는 고통,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하여
건강의 심리학과 고통
몸과 고통의 관계 :: ① 고통은 중요한 생명의 요소인데, 고통을 감지하는 능력 없이는 생존을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병이란 반복해온 행동의 결과가 신체에 위해를 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이다. ② 병이란 부적절한 신체상태나 신체활동을 정정할 수 있는 기회다. 고통이란 ‘유기체’의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대한 기관이나 세포들의 호소와 항의의 목소리고, 질병이란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잠식된 신체의 비명소리다. (의식으로 신체를 장악한) ‘유기체’가 세포기관에 대해 일방적 독재를 시행하고, 독재의 결과 억압된 세포기관이 되돌아온다. 억압된 세포기관이 고통으로, 유기체의 생명과 분리된 채 오직 자기만의 생존을 전면에 내세우며 증식하는 ‘암세포’로 되돌아온다.
철학과 고통의 관계 :: 니체는 철학이란, ‘진리’가 아니라 건강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생리학과 의학은 ‘좋은 삶’을 가르치고자 하는 철학의 다른 이름이다. “커다란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종적인 해방자이다. 오랜 고통만이 우리들 철학자로 하여금 궁극적인 깊이에 이르게 한다.” 고통은 몸이나 삶을 새로운 상태로 바꾸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이며, 더큰 건강, 더 심오한 영혼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위대한 건강’을 설파하는 철학자는 “그대들은 가능한 고통을 없애고자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더 높고 힘든 것으로 갖고자 한다”고 했다. “엄청난 고통의 훈련만이 지금까지 인간의 모든 향상을 이루어왔다!” (니체. [선악의 저편])
고통과 삶의 윤리학 :: ① 고통을 겪는다고 모든 이들이 현명해지지는 않으며, 겪은 고통의 크기가 크다고 삶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감당할 수 있는 역량보다 고통의 크기가 크면 위축된다. 고통이 삶을 심오하게 하는 것은 고통에 익숙해지는 훈련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고통을 직시하고 고통에서 배우려하지 않는 한, 고통은 삶의 깊이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② 고통은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자에게만, 삶의 심오함을 가르쳐주는 스승으로 온다. 고통을 통해 삶에 물음을 던지며, 고통을 스승으로 삶아 다른 방식으로 살기 위한 길을 찾고자 할 때, 고통은 지혜로운 삶의 안내자가 된다.
강자와 약자
강함과 약함 :: 삶의 방식 >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단련시키기도 하지만, 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어떻게 고통과 만나는가에 따라 고통을 통해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 우리 삶에서 강함과 약함은 누군가 갖고 있는 물리적 힘의 크기나 타인에게 행사할 수 잇는 권력의 무게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강함과 약함은 고통 앞에서 자신이 대면하는 사람ㆍ사건 앞에서 그가 취하는 태도에 의해 정되되는 삶의 방식이고 삶의 방향이다.
강자와 약자의 윤리학 > ① 강자는 눈앞의 고통에서 배울 것을 찾고 새로운 삶의 계기를 발견하려는 자이고, 약자는 고통 앞에서 위축되어 고통을 피하려는 자다. ② 약자는 강한 자들에게서도 약점을 찾지만, 강자는 약한 자들에게서도 강점을 찾는다. ③ 약자는 비난할 것을 찾지만, 강자는 배울 것을 찾는다. ④ 이런 점에서 강자가 넘어서는 자라면, 약자는 회피하는 자이다. ⑤ 강자가 강한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반면, 약자들은 약한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⑥ 강자들은 높은 곳으로 가는 상승의 계기를 찾는 것이고, 약자들은 현재 상태에 대한 위안과 위로를 찾고 편한 상태에 안주하기 위한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다. ⑦ 약자는 약한 자들의 생각을 빌려 생각하고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하지만, 강자는 강한 자들의 생각과 대결하여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랑할 만한 적을 가져야 한다” _강자의 윤리학. ⑧ 약자는 논평이나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만, 강자는 비판이나 비난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칭찬 또한 가볍게 넘긴다.
2개의 길 > 우리는 2개의 길을 항상 앞에 두고 있으며, 언제나 이 2길 사이에서 산다. 중요한 것은 고통이나 대결을 함축한 채 지금 다가오는 삶과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대면할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강자와 약자는 따로 존재하는 인물의 유형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2가지 방향, 2가지 삶의 방식이다. 자유란 2선택지 앞에서 어느 하나를 택할 자유가 아니라, 약자의 길과 동시에 다가오는 또하나의 길의 가능성(노예적 삶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매혹의 이름이다.
4. 기쁨과 자유 :: 기쁨의 윤리학과 웃음의 비행술
기쁨과 슬픔
사건 :: 양태와 양태의 만남 > ① (양태) 스피노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양태(mode)’라고 부른다. 사람도, 개도, 컴퓨터도, 물도 양태이고, 세상사란 모두 양태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다. 만날 때마다 양태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② (좋은 영향, 나쁜 영향) 좋은 영향이란, 목마른 내가 물과 만나는 것, 배고픈 내가 밥과 만나는 것, 길을 찾으려는 내가 표지판과 만나는 것이다. 나쁜 영향이란, 멀쩡한 내 신체가 방사능과 만나는 것, 지친 내 영혼이 시끄러운 음악과 만나는 것, 중독된 내 신체가 담배와 만나는 것이다.
좋은 만남_힘의 증가, 나쁜 만남_힘의 감소 > ① (좋은 만남, 나쁜 만남) 내가 다른 양태와 만나 내 신체와 영혼의 힘ㆍ능력이 감소할 때 그것은 내게 ‘나쁜 것’이다. 물은 목마른 내 신체의 힘을 증가시키는 반면, 시끄러운 메탈음악은 지친 내 영혼과 신체의 힘을 감소시킨다. 한편 물을 먹고 싶지 않은데 물과 만나면 물은 나의 힘을 감소시키고, 스트레스의 출구를 찾는 내 영혼과 메탈음악이 만나면 내게 좋은 것이 된다. ② (힘의 증가, 힘의 감소) 어떤 것이 좋고 나쁜지는 미리 정할 수 없다. 삶이란 끝없는 만남의 연속이고, 그 만남이 발생할 때마다 어떤 것은 좋은 것으로, 어떤 것은 나쁜 것으로 다가온다. 나 역시 다른 것에게 그렇게 다가갈 것이다. 누구에겐 힘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누구에겐 힘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기쁨_힘의 증가, 슬픔_힘의 감소 > 힘이나 능력이 증가할 때, 우리의 신체나 영혼은 기쁨을 느낀다. 힘이나 능력이 감소할 때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기쁨이란 힘의 증가에 동반되는 감응이고, 슬픔이란 힘의 감소에 동반되는 감응이다. 신체와 영혼에 발생하는 변화는 어떤 경우든 이 2가지 방향뿐이다. 수많은 감정들은 강도나 양상을 달리하며 나타나는 이 기쁨과 슬픔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감정이나 정서를 크게 둘로 나눈 것이다.
윤리와 도덕
① (윤리_기쁨과 이득 / 도덕_의무, 규칙) 윤리학ethics이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지를 가르치는 지식이다. 기쁨이 힘의 증가와 결부되어 있다면, 기쁨의 윤리학은 힘의 자연학에 바탕한 윤리학이다. ex) 스피노자의 윤리학. 반면 도덕이란 당연히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행하도록 가르친다. 우리에게 기쁨이나 이득을 주어서가 아니라, 의무이고 규칙이기 때문이다. ex) 칸트의 정언명령. ② (윤리_좋음과 나쁨 / 도덕_선과 악) 도덕moral은 선good/악evil의 2범주에 의해 작동하며, 윤리는 좋음good/나쁨bad이란 범주를 기초로 작동한다. ③ (윤리_내재적 / 도덕_초월적) 도덕은 어떤 조건이든 지켜야할 규칙, 모든 조건을 넘어서 준수되어야 할 ‘초월적’ 규칙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ex) 모세의 십계명, 법적인 의무, 상식이나 습속의 규칙. 스피노자가 말하는 윤리에선 절대적 규칙이나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초월적 규칙같은 것은 없는데, 이를 ‘초월적’인 것과 반대로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관계에 ‘내재적’이라고 한다. ④ (윤리적 판단_의학, 영양학, 생물학, 화학 같은 자연학적 지식 / 도덕적 판단_신학이나 법학의 지식) 몸이나 영혼에 ‘좋은 것/나쁜 것’을 따지는 윤리적 관점은 자연학적이다. 좋은지 나쁜지를 가리는 윤리적 판단을 위해선, 의학이나 영양학, 생물학이나 화학 같은 자연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선인지/악이지’를 가리는 도덕적 판단을 위해서는, 그것이 금지된 것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이, 금지의 계율로부터 선악을 해석하고 입증하는 신학이나 법학의 지식이 중요한다.
기쁨의 윤리학
신체/정신의 평행론 > 신체와 영혼을 대립시키던 다른 철학과 달리, 스피노자는 신체와 영혼이 나란히 간다고 주장한다(신체-정신의 ‘평행론’). 신체에 힘이 넘치는데 영혼이 우울해질 수는 없는 일이고, 영혼이 무언가에 짓눌려 침울한데 몸에 힘이 넘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음식소화가 힘든 위무력증과 걸어다니는 것이 힘든 근무력증 같은 신체적 질병이 같이 올 수 있다. 우울증이 걸리면 영혼만 우울해 지는 게 아니라 신체도 이런저런 임상적 질병에 걸리고, 과도한 스트레스나 고민이 위장이나 심장을 병들게 한다.
기쁨의 윤리학 > ① (힘의 증가 <······> 기쁨) 힘의 증가는 기쁨의 감응을 야기하며, 기쁨은 힘의 증가를 야기한다. 그런데 좋은 양태와 만남/그렇지 않은 만남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우연에 속한다. 그러나 같은 일에서도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의 정도는 아주 다른데, 누구는 작은 일에도 크게 낙담하지만 누구는 큰일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② (기쁨 <······> 웃음) 웃는 것이 중요하고, 유쾌하게 춤추는 것이 중요하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빌리면, 기쁘면 웃게 되듯이 웃으면 기뻐지기 쉽다. 기쁨의 윤리학은 언제나 웃고 춤출 수 있어야 한다. 일삼아서라도 웃으면 싫거나 불편한 마음이 줄어들 것이고 힘의 감소도 덜할 것이다. 웃음을 따라 힘의 증가가 발생하고, 웃음은 상대방에게 웃음이나 기쁨을 준다. ③ (미국 야구선수의 사진) 굳게 다문 입술_평균수명 72세, 살짝 올라간 입술_75세, 입술 끝이 올라간 U자모양_79세. 웃는 것만으로도 7년을 더 산다.
웃음의 능력
웃음과 울음의 비대칭성 > 슬픔도 그렇지만 기쁨은 전염되고, 특히 웃음은 쉽게 전연된다. 웃음과 울음 사이엔 비대칭성이 있다. 울음은 혼자, 남이 안보이는 곳에서 우는 것이지만, 웃음은 남들과 함께 웃는 것이다. 울음은 고독하고 개인주의적인 반면, 웃음은 집합적이고 코뮨주의적이다. 울음이 전염될 기회는 많지 않고 그나마 개인에서 개인으로 전염된다. 반면 웃음은 쉽게 전염되고 집단적으로 전염된다. 웃음이 웃음을 낳고 그게 다시 웃게 하는 양의 되먹임.
웃음의 능력 = 웃는 능력 > 웃음의 능력에서 일차적인 것은 웃기는 능력이 아니라, 웃는 능력이다. 조그만 웃음거리에도 썰렁한 농담에도 쉽게 웃는 능력, 그렇게 웃어주는 이가 없으면 웃기는 능력도 쉽게 무력화된다. 유머의 능력이란 농담하는 재능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거리화 능력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웃음의 능력은 상황의 무게를 실제보다 훨씬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슬픔의 강도를 줄여주고 기쁨의 가능성을 확대한다. 권위적인 인물 앞에서 편해지게 만들고, 삶을 짓누르는 무거운 가치로부터 쉽게 떠나게 만든다.
웃음-가벼움-자유 > ① (웃음과 가벼움) 웃음은 가벼움과 결부되어 있다. 자신과 자신이 만나는 타인의 삶에도 경쾌한 기쁨을 촉발한다. 그들의 신체를 가볍게하고 그들의 영혼이 쉽게 날아오르게 해준다. ② (가벼움과 자유) 가벼움은 자유와 결부되어 있다. 중력이 자유로운 비행의 장애이듯이, 무거움은 자유로운 삶의 걸림돌이다. 진지함은 무거움이 아니다. 진지함이 웃음을 알 때, 삶의 날개가 된다. 웃음은 삶의 무게를 덜어주고 그 무게만큼 슬픔의 가능성을 줄여준다. 기쁜 만큼 웃을 수 있듯이, 웃는 만큼 기쁠 수 있다. 자유가 기쁨을 주듯이, 기쁨은 자유의 가능성을 확대해 준다.
5. 꿈과 자유 :: 꿈꾸는 영혼의 감옥
감옥에선 꿈마저 갇히고······
꿈을 꾼다고 그런 세상이 만들어지지는 않겠지만, 꿈을 꾸지 않으면 그런 세상은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꿈속에서 만나는 ‘불가능한’ 세계란 새로운 현실의 가능성을 향한 멋진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꿈속에서조차 자유롭지 않으면, 우리의 꿈조차 우리를 가둔 세계 속에 갇혀있는 경우가 많다. 감옥에서는 꿈속에서도 감옥 속에 있는 꿈만 꾸게 된다. 꿈속에서도 감옥에 갇혀있다. 꿈이란 게 아무리 자유를 변형시켜도 현실을 재료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꿈속에서도 상상이나 환상 속에서도 그다지 자유롭지 않다. 꿈속에서도 감옥을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신체 뿐 아니라 영혼마저 감옥에 갇힌 것이다.
감옥의 일반성
정해진 삶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의 꿈도 그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꿈이 정해진 궤도를 맴돌고 있다면, 우리는 어딘가에 갇힌 것이다. 갇혀있음을 알지 못하며, 출구를 찾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게 된다. 감옥이 자유의 반대쪽에 있는 것은 벽과 철장이 신체를 구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보고 듣고 생각하는 영혼이 갇히기 때문이다. 돈을 잘 벌면서도 돈 버는 것 말고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돈에 갇혀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도 가족밖에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가족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 영혼의 감옥 안에서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이, 누렇게 시들어간다.”
현실적 성공에 갇힌 꿈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타주의자들의 군대]에서 “왜 미국 대중은 그들의 이익에 반하여 공화당에 투표할까? 왜 가난한 지방출신의 청년들은 부도덕한 전쟁에 참여할까?”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미국의 가난한 청년들은 자신의 미래를 자동차판매나 부동산업으로 성공하는 것을 꿈꾸지만, 예술가나 철학자를 상상할 수 없다. 아이비리그로 대표되는 교육기관의 계급적 독점이, 그에 따른 지성과 문화로부터의 제도적 ‘소외’가 그들의 꿈마저 어딘가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꿈마저 ‘현실적인 성공’에 갇힌 대중이 비즈니스를 대표하는 공화당 쪽에 친근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지적 소외와 애국주의
지적 문화적 영역에서 소외된 사람이 단순한 돈벌이가 아닌 이타적 행위를 하고자 할 때, 대개 ‘애국적’ 관심을 갖고 군대에 가거나 경찰관이 된다. 군인이나 경철관이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이타적 행위의 가능성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꿈과 상상력이 현세적 성공에 갇혀버리면, 모처럼 싹튼 이타성마저 애국주의적 치안과 폭력의 쇼비니즘으로 바뀌어버린다.
감옥에 갇힌 꿈, 현실적 꿈
꿈에도 질이 있다. 내가 맴돌고 있는 것과 다른 외부세계를 보여주지 못하는 꿈이라면, 꿈에서마저 현실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현실’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꿈속에서마저 갇히는 것이다. 꿈속에서 마저 작아지는 것이고, 그 꿈마저 편협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