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 발제] 철학수업_2부 만남과 자유 :: 0116(토)
요고마고
/ 201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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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세미나] 2018년 01월 16일 발제 요고마고
『삶을 위한 철학수업』
2부 만남과 자유
1. 매혹과 자유 - 술병 속의 연인이 내미는 매혹의 손
<술병 속의 여인들>
․ 블랑쇼의 매혹 - “즉각적인 인접한 거리에서 그것이 직접 나에게 손을 대는 것이다. 내가 그것과 굉장히 먼 거리에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나를 붙들고 독점하는 것이다.”(『문학의 공간』, 1998, 재인용)
․ 저자의 매혹 - 우연한 만남으로 내가 그것에 사로잡히는 것이고 그것에 이끌려 뜻하지 않은 곳으로 끌려가는 것
․ 나의 매혹 - 중력의 새로운 방향이 생겨나는 것.
․ 질문 - 각자가 생각하는 매혹이란?
<감각적 각성>
․ 감각적 각성 - 취하려는 자에겐 결코 오지 않는 여인.
술병 속 여인은 우리를 감각적 각성으로, 다른 감각으로 빚어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존재를 말한다. 이 여인을 만난다면, 다시 말해 감각적 각성이 이루어진다면 각성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젠 둘 중 하나다. 그 여인을 다시 만나던지 만나지 못하던지.
저자는 단순히 여인(감각적 각성)의 부재를 잊기 위해 술에 취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재하는 여인과 ‘만나’ 다른 감각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취함 속에서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 질문 - 각자가 생각하는 감각적 각성이란?
<사물과의 우정>
․ 사물의 용도나 가치 - 내가 손을 내미는 것
․ 사물의 매혹 - 사물이 손을 내미는 것.
‘사물이 손을 내미는 것’이란, 사용가치나 용도를 벗어나 생각지 못했던 어떤 것으로서 사물이 다가오는 사건이다. 이러한 만남을 ‘사물과의 우정’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의 사용가치나 용도를 지워내는 것이 우정의 선행조건이다.
․ 질문 - 사물의 구원(블랑쇼)이란 무엇인가?
사물과 우정을 나누는 것은 ‘사물의 구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원을 “지금의 세계에서 절망한 자들을 다른 세계로 인도해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사용가치나 용도를 벗어난 사물과의 만남은 구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 사물의 구원 - 예술이 여기에서 태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의 구원은 다른 한편으로 타인의 구원을 떠올리게 했다.
․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아담 자가예프스키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위안이 있다, 타인의
음악에서만, 타인의 시에서만.
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인데, 그러나 그 대신
서늘한 대화가 충실히 기다리고 있는 건
타인의 시에서뿐이다.
<매혹과 넘어섬>
․ 자유에 대한 오해 p.90
․ 질문 - 매혹이란 뜻하지 않은 세계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수동성’이나 이것이야말로 자유에 더 가깝다. 왜 그런가?
① 매혹당하는 것도 안목이 있어야 가능하다.
② 그 매혹을 따라나서는 용기야말로 자유로운 상태에 가깝다.
③ 여기서 말한 ‘수동성’이란 내게 다가온 것을 통해 자아의 감옥(기존의 나의 관념이나 감각)을 넘어서는 것을 뜻한다. 자유란 이 ‘넘어섬’이다.
넘어섬 ⇒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연다.
2. 사랑과 자유 - 미친 사랑의 노래와 냉혹한 연애의 법칙
<매혹과 휘말림>
․ 매혹과 휘말림은 강력한 수동적 성격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동성에는 자유가 있다. 그것은 자아로부터의 자유다.
우리는 늘 좋아하는 것만 좋아한다. 그것만 생각하고, 느끼고, 욕망한다. 좋아하는 것들로 구성된 것이 자아이기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통념상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선택했으므로 능동적인 것 같다. 그러나 벗어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는 수동적이라 할 수 있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 강하게 달라붙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습을 버린다는 것이 어렵다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에게 있어 가장 힘센 적이기도 하다. 굳이 벗어나야 하나요? 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겠다. 자아가 감옥으로 느껴질 때 저절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매혹과 휘말림. 이 ‘어쩔 수 없음’을 통해 우리는 가까스로 자아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남이 가능해진다. “사랑하면서 우리는 ‘그’가 선 자리에 끌려들어간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려 시도하고, 그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언제나 그렇듯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시도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백전백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시도하게 만드는 그 매혹이, 나 또는 당신을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인도한다는 데 있다. 그 시도가 예정에 없던 ‘나를 넘어서는 것’을 가능케 한다.
<능동적 사랑과 연애의 게임>
․ 능동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연애의 게임에 적용되는 법칙과 역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 능동적 사랑
① ‘정신 있는 사랑’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상을 남에게서 찾으며 다가간다.
② 자신의 감각과 취향을 상대에게 투영하며 기뻐하는 사랑
③ 자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마저 그 궤도 속으로 끌어들이는 사랑
④ 상대의 마음을 장악하려는 사랑.
⑤ 자신의 수동성을 약화시키고, 상대의 수동성을 강화 ⇒ 밀땅
⑥ 연애의 게임에서 승리하는 사랑
⑦ 사랑에 미쳐선 안 되고, 상대보다 더 사랑해선 안 된다.
․ 연애의 역설
상대의 마음을 장악하기 위해 정신줄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이 사랑의 종착점은 “상대를 전적으로 장악하는 대신, 사랑의 마음이 전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연애의 역설이다. 진정한 능동적 사랑은, 그가 내게 어떻게 하는가 와는 무관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두 극>
․ 영화 <빈집>, 두 개의 사랑에 대하여
타자성에 휘말려 자아를 벗어나버리는 미친 매혹의 사랑
vs
자아의 궤도를 확장하면서 그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 사랑
<사랑의 종합>
“사랑이란 빨간 돌과 파란 돌을 섞어 탑을 쌓는 것이다. 미친 열정의 돌과 차분하고 안정된 돌. 그러나 두 가지 돌을 섞어 탑을 쌓는 것이 어떤 ‘변증법적 종합’이라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사랑의 ‘종합’은 그대로 방치하면 언제나 자아화하는 종합으로 진행되고 탑은 퍼레지기 마련이다. 섞어 쌓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파란 탑을 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빨간 돌만으로 탑을 쌓으려 할 때, 비로소 두 가지 돌이 섞인 탑이 만들어질 것이다.”
3. 우정과 자유 - 친구와 적의 경계를 횡단하는 우정의 가능성
<친구와 적>
․ 질문 1 : 유익함, 즉 이득이 되는 관계는 우정의 충분조건인가?(에피쿠로스)
․ 질문 2 : 정(caritas), 즉 친함은 우정의 충분조건인가?(키케로)
혹은 이득과 정 둘 다 있다면 그것으로 우정은 충분한가?
․ 질문 3 : 적이란 무엇인가?
․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 “정치란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문제”
․ 영화 <친구>, “이득과 정은 우정의 이유가 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이유에서 전쟁의 이유가 된다.” ⇒ 친교와 절교의 이유는 같다(질문1,2,3에 대한 답변).
․ 질문 4 : 만화 <20세기 소년>, “우정은 적대에 의해 재분할된다.”
우정은 적대를 이기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적’을 가려내고자 하는 ‘정치학’은 끝없는 색출과 절교로 이어진다. 그 끝은 아무도 믿지 못하는 고립과 고독이다.)
․ 덫 - 우정이 이득이나 정이라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적대감을 가지면 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그 자체가 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립과 고독에 걸려드는 덫.
이득이나 정. 여기에 호감도 추가하고 싶다. 타인이 나에게 호의적이어야 할 마땅함이란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란 쉽지가 않다. 타인이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부당함은 아니다. 우정이라는 관계는 이것부터 되어야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대를 넘어선 우정>
․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텍스트)
․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경계를 지우고, 모든 이를 친구로 만드는 우정
․ 나우시카, “세상을 적과 우리 편만으로 나누면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게 돼.”
․ 적대적 정치의 말로 - “왕궁은 음모와 술책으로 가득한 독사 굴이다. 쓰레기 같은 왕족, 혈족이 우글우글하단다. 그러나 한 사람도 죽이지 마라. 하나라도 죽이면 나처럼 차례대로 죽이게 되니까.”
마음에서 지워버리는 것, 그것 역시 죽이는 것이 될 수 있다.
<공감능력과 우정>
․ 질문 1 : 나우시카의 ‘모든 이를 친구로 삼는’ 우정은 어떻게 가능할까?
① 경계를 지우고 그 너머의 목소리를 듣는 공감능력
② ‘편드는 것’을 배신하는 능력
③ 위의 ①, ②를 통해 공동성을 형성함으로써 우정이 가능해진다.
<공동성과 우정>
․ 공동성 - 함께 움직이는 신체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 말과 기수.
사랑에는 이유가 없지만 우정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공동성이다.
․ 사랑과 우정의 비교
① 사랑은 내게 다가오는 것 vs 우정은 내가 다가가는 것
② 사랑은 어느 날 닥쳐온 사건의 선물 vs 우정은 함께 한 시간의 선물
․ 우정의 능동성이란 무엇일까?
우정의 시작은 오해와 상처를 받아들이고 긍정하며 다가서는 것이다. 낯선 이들 사이의 날 선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상처를 감내하는 것은 필연적.
<친구와 스승>
․ 이탁오,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분서』)
․ 질문 - 나우시카에게 치유와 위로를 준, 호의를 가진 묘지기야말로 가장 속기 쉬운 적이기도 하다. 왜 그러한가?
4. 선물과 자유 - 아, 존재 자체만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선물의 힘>
․ 선물, 새로운 관계 형성의 다리가 되어준다(예 : 이사 떡 돌리기).
․ 마르셀 모스, 『증여론』.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새로운 사회 모델을 찾기 위해 쓴 책. 원시사회에서의 선물제도들을 다루고 있다.
<선물과 교환>
․ 선물은 ‘의무’ - 선물의 영 하우
․ 데리다는 ‘선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답례가 의무가 되는 순간, 선물은 되갚아야할 채무가 되기 때문”
저자는 데리다의 주장을 선물이 교환이나 채권/채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비대칭적 선물>
․ “준다는 생각 없이 주어지는 선물” 혹은 “받는다는 생각 없이 받게 되는 선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실제로 누군가에게 선물한다는 일은 너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 진정한 선물은 서로가 “계산 없이 송신하는 것”들일 때 가능하므로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선물은 나 자신이 존재하는 매 순간 모든 곳에서 주어지고 있는 셈이다.
<선물-능력>
․ “어디서나 선물을 보고 그것을 받는 이가 있는 반면, 어디서나 고통을 보고 그것을 고통으로만 받는 이도 있는 것이다. 어디서나 선물을 보는 이도 있지만, 어디서나 교환만을 보는 이도 있는 것이다.”
․ “매 순간 주어지는 것을 선물로 받는 이는 항상 기쁨으로 살게 될 것”이므로 이를 능력으로 보았다.
5. 돈과 자유 - 헝그리 정신과 궁상
<헝그리 정신>
․ “헝그리하게 산다”는 것은 “가장 부유하게 사는 법”이다. 왜 그런가?
․ 부 혹은 부유함에 대한 오해
시간부자와 경제부자 - 공상하는 능력(다른 삶의 가능성)과 현실의 중압감
<절대적 빈민>
․ “절대적 빈민”이란?
“돈이 많든 적든 항상 돈의 결여를 느끼고 종일 돈 벌 생각을 하며, 항상 돈 버는 일을 하며 사는 이들”
․ p.138 의문점
“좋은 미감을 갖고 있는 이들은 ‘별것 아닌’ 옷으로도 멋진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너무 단순화시켜서 하는 말처럼 들린다. 좋은 미감이라는 것도 결국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하려면 자원이 필요하고 시간적 여유도 필요하다. 특히 문화적 환경이 필요하다. 필요한 것들 모두 돈이 들기 때문에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가처분소득과 가처분능력>
․ 가처분능력 - 돈이나 시간을 “자신의 삶을 위해 ‘처분’할 수 있는 능력”
⇒ 실질적인 부
소비와 소모의 능력이 아니라 삶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능력이야말로 실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 가처분능력 기르기 - ①감각을 형성 ②필요한 지식 얻기 ③즐기는 방법 찾기
<돈 버는 법과 돈 쓰는 법>
․ 돈을 잘 쓰는 법에 대한 각자의 생각들을 나누어보자.
․ 자본주의에서의 돈 쓰는 법
① 돈을 좀 더 벌기 위해 돈을 쓴다 ② 패턴화된 소비의 방법(?)
<헝그리 정신과 궁상>
․ 헝그리 정신 ⇒ 돈을 쓰는 법
․ 헝그리 정신은 ‘내가 돈을 부리는 것’, 궁상은 ‘돈이 나를 부리는 것’으로 이것은 스타일의 문제이지 양의 문제가 아니다. 궁상이 돈 있는 자들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이유이다(재벌이나 전경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