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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발제] 성의 정치학_0103
소리 / 2018-01-03 / 조회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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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반혁명 1930-1960

1. 반동적 정책 : 나치독일과 소련의 표본

제1기의 혁명 운동은 혁명이 아닌 개혁으로 끝났다. 제1기의 운동으로 인해 부권제도가 부식되고 개량되었으나 근본적인 부권제 중심의 사회질서의 본질은 그대로 남았다. 혁명은 결혼과 가족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인 사회변형을 필요로 하며, 부권제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다른 상상력이 필요했다. 여자의 종속을 제도화하는 가족구조 자체의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를 위한 변화의 움직임은 밀렛에 따르면 1930~1960년대까지의 반혁명적 운동에 의해 저지된다. 밀렛은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기간을 반혁명적 기간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체제가 충돌했던 혼란스러운 시기이다. 이에 더불어 군국주의 문화와 국가주의의 문화가 강화되면서 가족제도의 부권제의 필요성이 다시 강조되었다. ‘가정’은 인간다운 감정의 마지막 흔적이자, 공동체적 정서의 유일한 피난처로서 인식되었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부권제적 질서의 가정은 국가의 핵심 축으로 기능할 수 있는 많은 기능들을 가지고 있었다. 부권제와 권위주의적인 국가, 독재체제의 분위기는 부권제적 성격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부권제적 가족의 응집력은 여성과 아이들의 경제적 종속에 기초를 두고 있다.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많은 부분에서, 국가의 적극적 원조와 방조로 부권제는 강화되었고, 부권제를 기반으로 한 파시스트적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이에 대한 훌륭한 표본으로 나치 독일과 소련이 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이라는 매우 다른 사회가 이용한 반동적 정책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부권제 강화를 통한 파시스트적 국가체계의 강화라는 동일한 효과를 보인다.

 

나치 독일

먼저 나치 독일은 가장 계획적으로 부권제적 제도들을 부활시키고 강화시킨 경우이다. 재향군인 단체들의 지속적인 지지에서부터 시작한 나치 독일의 모체인 국가사회주의 노동당은 총통을 중심으로 여성과 아이들로 이뤄진 부족민의 절대복종체계를 이루려 했다. 국가사회주의는 처음부터 성 혁명 및 남녀 동등권을 신중히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치당이 권력을 잡기 5년 전, 4개로 갈라진 여러 여성단체가 거대한 연합체가 되었고 이를 필두로 동등권 운동의 요새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분열공작과 간첩, 지도자 지위탈취 등의 공작을 통해 운동의 지도자를 운동과 공적 생활에서 숙청했다. 또한 여성 단체를 기관으로 바꾸어 국가에서 흡수하여 나치 지배하게 놓이게 만들었다. 지도자들은 표면적으로 여성이나 실질적으로 통솔하는 것은 모두 당에 가까운 남성들이었다. 이를 통해 국가사회주의 여성단체가 내집단이 되고, 동등권 운동은 외집단이 되었다.

 

나치 독일이 여자에게 부여한 역할은 어머니의 역할과 가정에 헌신하는 것이었으나, 전쟁을 위해 전쟁기계를 생산하기 위한 노동력으로 여성 노동력을 보충했다. 이 모순된 요구 속에서 여성 노동력의 수는 점점 증가했다. 이를 막기 위해 나치 독일은 많은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의사, 변호사 등의 전문직 고급인력으로 여성을 사용했다. 이는 전쟁을 위해 모든 남성을 전쟁으로 보낸 것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여성노동력을 사용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사적 모험과 제국의 건설, 식민화를 위해서는 인종의 번영이 필요했다. 국가의 입장에서 이를 위해서는 출생률의 증가가 더 이득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도 채택한 값싼 여자 노동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나치독일은 다른 노선을 택한다. 나치 독일의 나치 독일의 실제적 목적은 여자를 가정에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전문직에서 여자를 쫓아내어 저임금 노동에 임하게 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여성 판사는 법정에 서지 못했고, 여성의원들은 사라졌다. 기혼/미혼의 구분 없이 여성은 무조건 해고가 대량으로 이루어졌다. 이로써 여성들이 다시 노동시장으로 불려갔을 때 저임금의 보조자로서의 역할 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가 요구하는 그러한 노동은 공장 및 농업 노동과 같은 힘든 노동이었다.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가정과 아이들 그리고 남편에게 헌신하며, 미혼일 때에는 여성적인 형태의 여성에게 알맞은 직업에 종사하고 남은 직업은 남성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당시 내무장관은 말했다.

 

나치 독일은 성 혁명의 원천이 유대 공산주의라고 지적한다. 남녀의 관습적 영역을 구분하지 않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의 나치 독일이 다른 서구 나라와 다른 주목할만한 점은 이 모든 것들을 설득의 형태로 취한 것이 아니라 법제화 했다는데 있다. 미혼 남녀에게 과세를 하고, 결혼대부금이라는 제도를 통해 아이가 하나 태어날 때마다 세금과 이자의 상환이 이뤄지는 제도를 시행했다. 피임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불법이 되었고, 피임기구를 배부하던 결혼상담소는 모두 폐지되었다. 그러나 성병예방용으로 쓰도록 콘돔의 사용은 장려되었다. 임신중절은 아이가 선천적 장애가 없지 않는 한 금지되었고, 결국 모든 아이는 낳아야만 하게 되었다.(현재 한국) 동성연애는 배척되었고, 남편의 바람기로 사생아가 태어나는 것은 인구 증가를 위해 묵인되었으나 기혼여성이 사생아를 만들 경우는 인구증가로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나치독일의 모습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기절적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밀렛은 말한다. 나치의 성공의 태반은 독일문화에 일관하여 존재하는 고도의 가부장제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소련

소련은 공산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부권제를 종결시키기 위한 기본단계로서의 가족이란 제도를 폐기하려 노력했다. 자유 결혼과 이혼, 피임, 요구에 응하는 임신중절을 모두 허용다. 또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아이들과 여성에 대한 남편의 경제적 지배권을 폐기했다. 사회주의 당국이 주장하는 원시적 공산주의체제인 원시적 모권제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 경제적기반을 마련했긴 하지만, 엥겔스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부권제의 역사적 심리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었고, 부권제를 심어주는 심적 습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성 혁명을 실시하려면, 모든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진짜 변화는 태도의 변혁, 전 심리적 과정의 변혁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부는 이 사실에는 무지한 채 가족 성훤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가족의 소멸을 선언했던 것이다.

실패의 이유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주어진 성의 자율과 자유를 무서워했고, 성욕은 사회적 노력과 헌신과는 상반되는 것이라는 인식, 임신과 출산이 생물학적 약함이라는 인식 등등이 있었다. 결국 수정주의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가족을 폐지할 수는 없고, 그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탁아소나 공동육아에 대한 제안이 제시되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불가능해졌다. 결국 그 의무는 모두 여자에게 돌아갔고 이중, 삼주의 노동을 여성들이 짊어져야 했다. 성의 자유 또한 남성들에 한해서만 행해졌고, 보수적인 문화 속에서 나고 자란 여성들은 자신의 성의 자유를 쓸 수 없었다.

이후 임신중절이 과도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우려의 의견들이 나왔다. 그러나 임신중절이 과도하게 이루어지거나 악용된 것은 성욕에 대한 태도가 너무도 부정적이었던 결과로서, 여자는 피임하는 것에 죄악감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처럼 소련도 군국화가 진행되어가면서 대규모 인구증가를 선동하게 되었다. 동성연애도 금지되었다.

소련은 혁명교육을 통하여 부권제의 정신구조에 대신하는 새로운 정신구조를 구성원 속에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가 최대의 과제였으나 실패했다. 군국주의 문화 속에서 성욕을 금욕시하면서 피임대신 금욕을 강조했다. 이후 성욕과 생식은 같은 것으로 구별되지 않게 되었다. 전통적인 부권제와 거의 구별이 안되는 군국주의적 권위주의적 분위기는 전쟁 준비하는 나라에서 평등이라는 옛 과제와는 점차 먼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여자에 대한 가사일과 육아에 대한 부담을 지워지고, 어머니와 군인에 대한 이야기들이 선전되었다. 종국에는 공산주의의 도덕을 위한 기본 원칙이 가족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는데 이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 하에서 행해지게 된다. 가족을 구하라는 구호까지 나오게 되면서 1943년에는 남녀공학까지 폐지된다. 혁명이 있은지 27년 이후 소련은 완전히 역변했다. 결혼, 이혼, 임신중절, 육아, 가족에 대한 초기의 급진적인 자유는 대폭 축소되어 반동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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