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발제] 성의 역사3_자기 연마
김현
/ 2018-01-05
/ 조회 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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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세미나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 2018.01.11. 현
제2장 자기 연마
이 장을 통해 계속 언급될 에픽테투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무소니우스, 세네카, 플루타르코스의 저작들에는 온갖 엄격함이, 그 중에서도 성적 엄격함이 강조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재임 시기에는 결혼 보호, 가족 우대, 내연 관계의 규제 등과 같은 법률 면에서의 강압적 조처가 있었고, 사상적인 움직임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래에 있을 변화의 실마리를 이런 제도나 법률로부터 찾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푸코는 말한다. 왜냐하면, 위의 제도 및 법률 같은 것들은 산발적이었으며, 효과도 미미했고, 당시 모랄리스트들 역시 공권력의 형식으로 일률적 규제나 징벌을 제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을 따져보자면, 기원후 1, 2세기는 차라리 고대보다 덜 엄격했고, 금지조항이 강화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기울여야 할 주의’(57)의 강조가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당시의 성적 엄격함은 금지조항을 규정하고 강화하는 형태라기보다는 ‘자기를 자기 행위의 주체로 형성하게 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형태를 취한다.’(57)
이렇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강조되는 면에서, 개인주의의 성장이 눈에 띈다. 당시의 성적 엄격함은, 공권력의 강화에 있지 않고, 오히려 과거에 비해 정치적, 사회적 틀의 약화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렇게 느슨하게 도시국가에 편입된 개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철학에서 행동 규칙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교의에서는 인류, 시민, 가족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자칫 모순되는 듯 한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를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개인주의적 태도’로 소속된 집단이나 제도에 비해 허용되는 개인의 독립성의 정도에 의해 나타나는 범주, 둘째, ‘사생활에 대한 가치부여’, 즉 가정 활동, 가산 등에 부여된 중요성의 범주, 셋째, ‘자기에 대한 관계의 강화’, 스스로의 변화를 위해 자기 자신을 인식의 대상이자 행동영역으로 삼는 형식이 그 세 가지 범주이다. 하지만, 이 세 범주가 연관이 있을지라도, 모두 합치되거나 비례하여 나타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제정시대의 성적 엄격함은, 증대된 개인주의에서 연원했다기보다, “자기 연마” 즉,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의 발달이라는 현상에서 그 배경을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자기 연마는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는 원칙에 지배되며, 자기 연마를 정당화하고 실천하게 하는 것은 자기 배려의 원칙이기도 하다. 모든 정복을 마치고 돌아 와서도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돌보던 키루스(크세노폰), 노예에게 일을 맡기고 스스로에게 전념하고 싶어 했다는 스파르타 시민의 이야기(플루타르코스), 《알키비아데스》에서 야심에 찬 젊은이에게 통치를 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에게 몰두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충고, 《변명》에서 자기에 대한 배려의 거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 문화에서부터 있어 왔던 오랜 주제이다.
이후 자기 배려는, 삶의 기술의 핵심이 되고, “자기 연마”의 차원과 형태를 획득하게 되었다. 자기 연마는 수많은 여러 교의들 사이에서도 통용되었던 만큼, 당시의 일반적 가치라고 볼 수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 전념해야 한다는 자기 연마는, 개인 상호 관계, 때로는 제도를 야기하기도 하고, 후에는 인식유형, 지식의 형성에 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제정시대의 첫 두 세기는 자기 배려가 발전하고 정점에 이르는 시대이자, 수적으로 범위가 좁을지라도 자기 연마 정점의 시대로 볼 수 있다.
【1】
자기에 대한 관심은, 플라톤 학파(알비누스, 아풀레우스)에서든,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든, 세네카에게서든, 많은 철학적 교의에서 재발견되는 주제로, 이미 이전에 제논이 설파했던 계율이며, 1세기에는 무소니우스, 또 플루타르코스에까지 이어진다. 그러다가 세네카에 이르러 자기에 대한 전념이라는 주제로 풍부해진다. ‘자신에게 몰두함’을 나타내는, 세네카가 썼던 수많은 어휘들, 거기에서는 자신과 일치시키기 위한 세네카의 초조함이 드러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전념해야함을 강조한다. 이 주제의 정점에 이르는 것은 에픽테투스인데, 《대화》에서 인간 존재는 자기 배려의 존재로 정의된다. 동물은 생존의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어 자기 돌봄이 따로 필요하지 않는 반면, 인간은 자신을 자유롭게 활용하도록 이성이 부여되었고, 이 이성을 완성시키면서 자신을 배려할 의무 역시 부여 받은, 자유롭고도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기 돌봄은, 자신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며 자유를 보장해주는, 특권이자 의무인 것이지, 결핍 때문은 아니다.
이러한 자기 배려를 통해 자신을 완성하는 것은, 철학자 등의 일부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원칙이었고, 또한 나이도 중요하지 않으며, 평생의 훈련이라 여겨졌다. 고대의 문헌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조언을 주곤 했던 대상이 젊은이들이었던 데 비해, 이 시대의 조언의 대상은 젊은이들에 머무르지 않는다. 세네카의 조언을 받은 세레누스 역시 성인이었고, 루실리우스는 60이 넘은 나이에도 가르침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또한, 플루타르코스 조언의 수신인도 성인들이었으며, 루시엔(?)의 저작에 등장하는 헤르모티무스는 40의 나이에 철학을 시작한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전념은 성인교육의 차원에 속한다.
【2】
자기에 대한 전념은 일반적 태도를 요구하거나 분산된 전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에피멜레이아”는 하나에 대한 전념이 아니라 모든 전념으로, 자신의 활동, 의무, 보살핌까지를 총칭하며 노고까지도 함축된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이 시간은 결코 빈 시간이 아니다. 신체의 단련, 절제를 비롯하여, 명상, 독서, 진리를 기억해 두는 일 등이 요구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기 안의로의 은둔”을 제시하는데, 그가 제시한 자기 배려의 활동에는 타인과의 대화, 조언을 주고받는 편지까지 아우른다. 이렇게 개인들은 연결되며, 따라서 자신에게의 몰두는 ‘고독의 실천’이 아니라 ‘진정한 사회적 실천’을 이루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제시한 것 뿐 아니라, 진정한 사회적 실천이라 볼 수 있는 자기 배려의 실천은, 제도화된 구조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타인을 이끌 의무가 부과되고,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공동 훈련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필로데무스의 기록) 에픽테투스 역시 학교와 유사한 틀 속에서 가르쳤고, 거기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교수, 지도자, 조언자 등의 역할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서로 뒤바뀌기도 했다. 이런 자신에 대한 전념은 교육 지도자들 같은 사람들만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단지 ‘기술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도움을 청하는 것은 권리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자기 돌봄과 타인의 도움은, 자기 전념을 통해 관계가 더욱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고, 이 자체로 공동의 체험이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에 대한 배려는 본질적으로 타인과의 교환 작용 및 상호적 의무체계의 가능성을 포함한 “정신적 도움”에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73)
【3】
자기 배려는 오래도록 의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 왔다. 플루타르코스의 《건강에 대한 규범》에서는 철학과 의학이 ‘단일하고 동일한 영역’이라고 언급한 바 있고, 이들은 공통된 개념적 도구를 사용하는데, 그 중심에는 ‘파토스’란 개념이 있다. 파토스는 신체적 질병과 정념에 사용되며, 양자 모두에 있어 수동적 상태와 관련한다. 이런 개념으로부터 분석의 틀이 마련되었는데, 스토아 학파의 경우, 병의 발전 양상에 따라 단계를 구별하고 도식화하였다. 이 도식은 신체 뿐 아니라 정신 치료에 공통된 안내 역할을 한다. 즉 심신은 서로 간섭하고, 마음과 육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보살피면 마침내 심신의 치유가 가능하다. 의학적 메타포는 마음을 돌보는 데에도 사용되며, 철학에서 추구하는 영혼의 완성을 위한 ‘단련’(파이데이아)은 의학적 색채를 띠게 되며, 스스로를 형성하고 돌보는 것은 연관된 활동이었다.
에픽테투스는 이 점을 강조하여 학교를 운영하는데, 단순히 지식 습득의 장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며 ‘영혼의 무료 진료소’로 간주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식적인 면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부터 먼저 치유하라며 비난한다. 반면, 갈레누스는 의사인데도, 신체적 질병 뿐 아니라, 정념, 혼란, 오류를 치료하는 것을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연마에 있어, 이 시기의 의학적 관심의 증대는 고대의 신체 단련, 군사 훈련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에는 신체를 돌보기보다 영혼에 전념하는 것이 낫다는 도덕이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와 영혼의 질병은 서로 소통하기 때문에, 정신과의 간섭의 측면에서 육체가 중요해진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의학과 도덕이 긴밀하게 근접해지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상태를 인식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상태를 깨닫는 것, 이것이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에픽테투스는 말한다. 더욱이 마음은 신체처럼 통증을 동반하지 않기에 자신과의 관계를 세우는 것은 중요하다.
【4】
자기에 대한 인식은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주제의 단순한 영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방법, 훈련, 시험과 함께 발달했다.
a. 시험과정. 이것은 미덕을 쌓는 실천적 과정임과 동시에 자신이 이르게 되는 지점을 가늠하는 이중의 역할을 한다. 시험의 목적은 원하는 것의 포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필요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절제에 대한 훈련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경우, 절제로 인해 고통이 시작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아내는 데에, 스토아 학파의 경우, 자신이 가진 것을 잃어도 그것이 아쉽지 않다는 데에 이르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후자의 경우, 극도의 가난을 자발적으로 체험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놀이가 아닌 시험으로, 최악의 상황을 겪으면서도, 잃지 않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 자신에게 있으며, 그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음을 납득하기 위해서 시행한다. 이런 식으로, 절제에 대한 훈련을 통해 이미 단련된 세네카는 축제에 참가하여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자제하여 향락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b. 자기 반성. 자성의 습관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고, 여러 저자가 권유한 방식들이 있지만, 세네카는 《분노에 대하여》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세네카의 자기 점검의 과정은, 마치 주체가 판사와 피고인으로 양분되는 작은 재판 과정 같기도 하고, 평가하고 원칙을 상기하고 바로 잡는다는 면에서는 감독관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검토’하는 과정에서 주체는 판사가 피고인에게 하듯, 유죄 판결이나 징벌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시찰’하고 ‘재평가’하는 등 감독관의 역할에 가깝다. 왜냐하면, 검토의 목적이 유죄를 자신의 뿌리부터 찾아내는 것, 혹은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차후에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적절한 수단을 선택하여 현명한 처신을 위한 이성적 장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c. 사유가 사유 자체에 행하는 작업. 이 작업은 역량 평가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하며, 또한 위반에 대한 평가와는 다른 것으로, 표상에 대한 여과장치와 같은 형태를 띠는, 자기 자신에 대해 취해야 할 일정한 태도를 말한다. 에픽테투스는, ‘불침번’, ‘화폐 검사인’과 같은 비유를 들며, 철저하게, 그러나 다름 아닌, 자신의 영혼에 대해, 검토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의 경구(‘반성 없는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를 참조하는데, 소크라테스의 검토란, 무지와 아는 것 등에 대한 검토를 이르는데 비해, 에픽테투스의 검토는, 표상을 구별, 검토하는 식으로 아무 것이나 수용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 때의 표상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여기에 대한 동의 여부가, 그리하여 ‘선별’작업이 중요하다 여겨지는데, 이런 식의 검토는 결국 자기 지배력에 대한 시험인 동시에 자유의 보장으로,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유롭고 이성적인 선택만을 하기 위해서이다.
【5】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의 목표는, 여러 가지 교의를 막론하고, ‘자기로의 전향’이다. 이 표현은 플라톤적 외양을 띠고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자기로의 전향이라고 해서, 활동을 변화시키거나, 자신에게만 몰두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활동을 할 때에 있어, 주된 목적을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며, 모든 종속과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자신과 합류할 수 있게 해 주는 하나의 궤도이다. 이 궤도 속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영혼은 난공불락의 위치에 자리 잡는다.
이런 자기로의 전향이란 실천의 궁극적 목표는 역시, 자제의 윤리로, 법률적 소유의 모델을 빌려 오자면,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것, 자신의 것, ‘우리 자신의 소관’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권리를 행사함으로 인해, 제한이나 위협을 받지 않는 상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포테스타스 수이’를 소유하는 것) 그리고 이런 모델은, 자기와의 관계 자체 역시 자신의 소유물인 양, 구체적인 관계처럼 정의된다. 여하튼, 자기로의 전향은 외부의 야망, 염려, 두려움에 동요되지 않으며, 견고한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단순한 통제나 지배력을 경험하는 것 이상의, 스스로에 대한 기쁨의 경험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하고, 스스로 즐기는 것, 세네카는 이를 두고, ‘가우디움’, ‘로에티티아’라고 불렀다. 반면 여기에 대비되는 개념으로는 ‘관능’, 즉 외부의 쾌락을 말하는데, 이것은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이고 박탈의 가능성이 도사리며, 충족되지 않을 수 있는 종류의 쾌락이다. 자기 내부의 환희는 ‘관능’과 같은 일시적 쾌락을 대체하면서도 고갈되지 않는다. 세네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 그것이 곧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루실리우스에게 말한다.
정리 (88~90)
기원 후 초기 몇 세기 동안 쾌락의 도덕은 자기 연마와 그 실천 속에서 전개되었다. 앞서 언급했듯, 금지조항들의 강화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그러한 변화는 개인이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형성해가는 방식과 관련한다. 그리고 자기 연마의 발달은 도덕적 주관성을 구성하는 요소와 관련된 어떤 변화들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전통적 윤리와의 단절이라고 보긴 어렵고, 강조점이 이동되고 수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전히 윤리적인 면에서의 성적 쾌락은 자신의 지배력의 차원에 속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 윤리는 삶의 미학적, 도덕적 기준을 규정하는 삶의 기술에 개인이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기술은 점차로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보편적 원칙들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자기 연마(아스케시스를 구성하는 절제와 자제의 훈련)를 통해 자기 인식의 중요성은 증대된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도덕적 주체 형성의 중심이 되고, 자신에 대한 지배력이 여전히 중요한 귀결점이 된다. 그렇지만 이 지배력은 지배의 형태에서 나아가 욕망도 동요도 없는 즐김의 경험까지 확장되는 데에 이른다.
아직은, 성적 쾌락과 악의 결부, 보편성 속에 규정되는 성 도덕, 욕망의 해석과는 거리가 멀지만, 악이 어떻게 힘이란 주제에 작용하기 시작하는지, 금욕의 실천 속에서 진실과 자기 인식의 원리가 발전해 나가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앞으로의 내용
자기 연마가 어떤 배경과 원인에서 ‘그런 형태’로 발전해 나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