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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제] 0년 :: 1장 환호 0111(목)
삼월 / 2018-01-11 / 조회 2,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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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우리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지식의 정원에서 소일하는

나태한 자가 필요로 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필요로 한다.

- 니체, 「역사가 삶에 대해 갖는 이점과 단점에 대해」

 


프롤로그: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이 책은 저자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전쟁을 배웠다. 그 역사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역사책에는 연도와 지명, 중요한 인물들의 이름이 가득하다. 그렇게 역사를 통해 전쟁을 배웠음에도, 우리는 정작 전쟁을 겪은 우리 부모와 조부모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저자가 아버지의 경험 중에서 특히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은 전쟁 후에 대학 동아리에서 신고식으로 했다는 ‘다하우’(유대인 수용소) 놀이였다. 명백히 학대로 보이는 놀이를 정상으로 보았던 아버지의 시각. 저자는 그런 아버지 세대의 시각을 전쟁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필사적 노력으로 본다. 또한 역사와 인간에 대한 저자의 물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 일어난 직후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상’으로 돌아가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한 환상이었다. 1945년 이후 제국주의는 표면적으로 힘을 잃었으며, 영국 노동자들은 더 이상 왕과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려 했다. 동유럽은 물론 서유럽에서조차 ‘반파시즘’을 내건 공산주의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전시에 일터를 지켰던 영국과 미국 여성들은 더 이상 가정 안에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저자의 아버지 세대가 폐허의 세계를 재건하며 품었던 평화의 이상은 후대의 우리에게도 전달되었다. 복지국가의 이상, 국제연합, 미국식 민주주의, 일본의 평화주의, 유럽연합,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중국 내전과 마오쩌둥. 이 모든 것들은 1945년을 통해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세계에 속해있다.

 

 

1장 환호: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로 태어나게 한다


연합군은 전후 독일의 수용소에서 해방된 난민들이 자신들에게 순순히 협력할 거라고 믿었지만, ‘해방콤플렉스’라 알려진 새로운 국민에 봉착했다. 해방은 보복과 굶주림, 환호를 불러왔고, 의료와 급식, 위생, 난민들의 귀환과 같은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실제로 해방이 강대국 간의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의 이미지는 쉽게 애국과 연결되었다. 한편 해방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하는 나이든 참전군인과 노부인들의 환호는 저자에게 어떤 에로틱함으로 기억된다. 사실 그들이 기념하고 있는 날짜는 실제의 해방 날짜와 다르다. 네덜란드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을 무장해제할 병력이 충분하지 않아 임시로 독일장교들이 독일군을 지휘하도록 허용했다. 반나치를 외치며 탈영하거나 네덜란드 해방을 환호한 이들은 이 독일장교들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일들은 유럽의 공식 종전일인 5월 8일 직전에 일어났다. 네덜란드가 ‘해방의 날’로 정해 연례행사를 치르는 날은 5월 5일이다.

 

사실 프랑스는 1944년 8월 말에 연합군에 의해 이미 해방되었다. 그런데도 1945년 5월 언론은 히틀러와 독일군의 패배를 전 세계의 해방인 것처럼 묘사했다. 독일 수용소에 있었던 저자의 아버지는 종전날짜에 대해 기억조차 하지 못했고, 세계에는 아직 많은 식민지가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환호했고, 도시는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도시의 빛 속에서 연합군들에 대한 여성들의 환호는 종교적 환희에 가깝게 표출되었다. 여성들은 군인들을 성자, 구원자, 심지어 예수처럼 대했다. 타국의 지배와 패배는 일시적으로 남성의 권위를 무너뜨렸고, 여성들은 순종을 버렸다. 여성들은 직장에 속했고, 레지스탕스를 위해 일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했다. 남성처럼 행동하는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하미나이즈(인류학 용어: 고유의 개성적 인간이 되거나 탄생하는 것)였다.

 

네덜란드에서는 국가 주도로 캐나다 군인들에게 영어를 할 수 있는 여성친구를 제공하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독일 점령기의 파리에서보다도 모든 이가 성매매에 적극적이었다. 남성 군인들이 가진 생필품들의 가치 덕에, 사실은 성매매라고 봐야 할 이 관계들은 매우 불균등했다. 점령지의 여성들이 보이는 점령군에 대한 숭배는 사실상 수치스러웠지만, 저자는 이 여성들을 순진한 영웅숭배자나 무기력한 희생자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보봐르는 파리 여성들의 ‘미군 사냥’을 ‘주요 일탈’로 회고한다. 후에 유명작가가 된 프랑스 인텔리 여성 브누아트 그루는 자신의 ‘미군사냥’을 소설로 남기기도 했다.

 

프랑스 역사가 파트리크 뷔송은 전시 프랑스의 독일군이 여성들에게 반란의 계기를 제공해주었다고 보았다. 불행한 결혼이나 부르주아 가정에 갇혀 있던 여성들, 혹은 계급적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여성들에게 전쟁은 보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점령군과의 교제는 물질적 혜택을 줄 뿐 아니라, 기존 사회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여성들뿐 아니라 동성애자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소수자들에게도 전쟁은 하나의 기회였다.

 

여성들이 미군을 부르는 애칭은 ‘정부보급품’이라는 비하의 뜻을 담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오로지 돈을 위해서만 군인과 관계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몇 년을 보낸 남성들과 살아남은 점령지의 여성들은 따뜻함이나 사랑, 심지어 결혼 같은 것을 추구하기도 했다. 정상으로의 복귀에 대한 갈망이 성적 방종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6년 네덜란드에서 합법적 부부가 낳은 아기의 수는 27만7000여 명으로 그동안의 수치를 훨씬 넘어섰다. 반면에 1939년과 비교하여 5배나 많은 여성이 성병으로 입원했으며, 1939년의 3배인 7000명에 달하는 아기가 부부가 아닌 사이에서 태어났다.

 

죽은 시체와 환자들이 함께 썩어가던 난민 캠프 안에 생기를 부여한 것도 바로 성적 욕망이었다. 상당량의 립스틱이 구호품으로 도착했을 때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던 난민들은 립스틱을 바르며,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난민 캠프의 출생률은 전체출생률에 비해 더 높았고, 과열된 성행위 장소가 되었다. 18~45세 유대인 여성의 1/3이 1946년에 임신중이거나 출산했다. 이는 생존과 생산력에 대한 증명처럼 보였다. 한편 해방 이후의 새로운 세계에 과도한 희망을 품었다가 배신당한 이들은 곧 술과 섹스로 도피했다. 여기에 살아남은 젊은 유대인들에게 가족을 재생산하려는 열망이 강하게 솟아나기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생존자들은 번식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이들에게 섹스는 쾌락이 아닌 멸종에 맞서는 저항행위였다.

 

 

특히 패전국인 독일인이나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군, 영국군, 호주군, 캐나다군, 소련군은 모두 해방자가 아니라 정복자였다. 이탈리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패전국들의 도시는 폭격으로 파괴되고, 경제상황은 참혹해졌으며, 성매매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베를린의 성매매 여성은 폐허의 생쥐로 불렸고, 어린 소녀나 소년들도 사창가에 몰려들었다. 누이를 공창에 보내기 위해 연합군 본부를 방문한 점잖은 이탈리아 귀족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매춘이 처음부터 제도화되었다. 자신들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저지른 일들을 연합군에게 똑같이 당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항복하고 3일 후인 8월 18일 내부부가 정복자 연합군을 위한 ‘위안시설’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일본 정부는 일부의 여성들에게 애국의 이름으로, 일본의 젊은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해달라고 요구했다. 곧 추악한 동시에 신속하고 효율적인 공창제도가 실시되었다. 장교들이 실제 전투 경험이 없는 장교들로 교체되자 미군과 일본 여성의 친교행위는 금지되고 점점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연합군 정부가 1946년 조직화된 성매매를 금지하자 자유계약 성매매 여성들은 더 늘어났다. 이 여성들은 ‘판판소녀’라고 불렸으며, 각각 백인과 흑인, 일본인 상대 여성으로 세분화되었다. 짙은 립스틱과 하이힐의 판판은 일본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인 동시에 질투와 매혹의 대상이기도 했다. 미국산 물품과 그들이 구사하는 정복자의 언어 때문이었다.

 

판판은 일본의 전통과도 잘 맞았다. 에도시대부터 도쿄의 성매매 여성은 최신유행을 따르는 화려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군사적 패배와 전시 검열, 군사교육으로부터의 해방은 과거의 상업적 성문화를 되살렸다. 많은 여성이 생활고 때문에 성매매를 하였으나, 판판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아 더욱 비난을 받았다. 애국으로 위장한 조직화된 매춘은 일본사회에서 용인되었지만, 호기심이나 사치품을 얻기 위한 자유로운 판판은 사회에 위험할 정도로 독립적이었다. 한편 일본의 여성들은 전쟁 시에 일본 정부가 자결을 강요하며 위협한 만큼 연합군이 잔혹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에 일본인들을 재교육하려는 미국인들의 요구가 맞아떨어졌다. 공개적 애정행위는 일본인들에게 교화 차원에서 독려되었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에서의 점령군과 여성들의 관계는 애정보다는 보복의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점령지의 남성들은 점령군들에게 열등감과 모욕을 느꼈다.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이 느낀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현지 여성들은 미군의 느긋함을 바람직하게 보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을 품었다. 전 유럽에서 문화적 미국화가 나타났고, 독일과 일본에서는 더욱 심했다.

 

독일이나 일본의 여성들이 점령군과 친교를 맺는 행위에 대한 남성들의 거부는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점령지 남성들의 이런 분노는 분명 질투와 시기가 원인이었다. 다양한 질투가 공존했다. 패배한 남성들의 승자에 대한 질투, 친교가 금지된 미군의 소련군에 대한 질투, 사병의 장교에 대한 질투 등. 이 질투심이 어떻게 성적 경쟁심으로 나타나는지는 소설 「미국 히지키」에 잘 드러나 있다. 흑인 혼혈에 대한 분노의 원인은 인종적 순수성의 오염에 있기도 했다. 인종은 패배자의 수치심을 더욱 악화시킨다.

 

독일인 남성들의 명예와 일본인 남성들의 수치 속에는 여성의 명예와 수치가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남성의 명예와 수치였다. 이는 남성이 우세한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터져 나온 반응이었다. 전쟁은 도시를 폭격하고 인명을 살상했지만, 구질서 또한 무너뜨렸다. 전후 독일이나 일본의 여성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더 이상 독일이나 일본 남성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국가적 명예, 헐렁해진 도덕, 퇴짜 맞은 점령지의 남성들, 점령군과 관계 맺었던 여성들. 모든 문제는 여성의 비도덕성에 돌아갔다. 패전국에서는 도덕적 공황과 국가적 수치, 성병의 위험 등이 지속적으로 표현되었다.

 

몇몇 진보주의자들만이 이 여성들의 친교행위에 장점이 있다고 보았다. 여성해방을 위한 돌파구이자 남성의 권위와 아내의 복종 같은 낡은 관념의 환영할 만한 종말. 이들은 여성이 담배나 초콜릿 때문에 성매매에 나섰다는 주장은 모욕이며, 성병에 대한 해결책으로 콘돔을 배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전후 오랫동안 논쟁에서 패배했다. 도덕적 공황상태에서는 전통적 도덕 위에 사회를 재건하자는 목소리가 우세했다. 도덕적 공황상태는 보수적 반동이 탄생하는 기반이 되었고, 여성의 성적 방종에 대한 두려움과 부르주아의 안정에 대한 희구 등은 더 전통적인 삶의 질서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한편 전쟁은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성들의 수가 부족해진 탓이었다. 어떻게 해도 세계는 이미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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