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들풀 1213세미나 발제+후기 +3
아라차
/ 2017-12-18
/ 조회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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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했던 텍스트에 세미나 때 나눴던 인상적인 얘기들을 덧붙어봤어요. 루쉰의 글에서 물론 시대상, 민족성 등 많은 부분들이 읽히지만 무엇보다 깊이있는 ‘자기’ 탐구에 대한 뚜렷한 개성을 느낄 수 있어요. 거기에 위트있는 글쓰기가 더해져서 매번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됩니다. 읽고 얘기만 하는 것임에도 그 안에서 여러 번의 감각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이번에도 그 분위기를 다 담지는 못하고, 간략하게 몇 가지 이야기만 남겨놓네요;;
길손
목이 마른 지친 길손이 늙은이와 여자아이에게 온다. 길손은 이름도 모르고 어디로 왔는지도 모르고 서쪽으로 계속 걸어간다고 한다. 길손은 앞쪽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고 늙은이는 ‘무덤’이 있다고, 여자아이는 꽃들이 있다고 대답한다. 무덤너머에 뭐가 있는지 늙은이도, 여자아이도, 길손도 모른다. 늙은이는 되돌아가라고 하지만 길손은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더 많다. 길손은 앞에서 자신을 재촉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를 늙은이도 들은 적이 있다. 늙은이는 그 소리를 모른 척했지만 길손은 멈출 수가 없다. 쉴 수도 없다. 늙은이는 길손을 설득하는 걸 포기한다. 길손은 서쪽으로 걸어간다.
- 아이는 미래를 긍정하고, 늙은이에게 미래는 무덤이다. 생의 한 가운데 있는 길손은 삶의 여정을 멈출 수 없다?
- “고마워하지마시오. 그건 댁에게도 좋지 않소”가 반복·강조된다. 감사, 애착 등의 애락을 경계라는 태도가 보인다.
- 여자아이의 ‘헝겊’은 희망을 의미. 그 작은 ‘희망’에 위로를 받지만 나에겐 그조차 무겁다. 희망조차 짐이 되는 상황이다.
- 분명 피를 흘려야 하는 투쟁의 상황임에도 그 투쟁과 지향성이 애매모호하다.
죽은 불
거대한 얼음산 사이를 달리는 꿈. 발밑을 보니 불꽃이 있다. 그것은 죽은 불이다. 생로병사에 그을린 흔적으로 보아 이제 막 죽었나 보다. 나는 죽은 불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얼음골짜기가 빨간 불꽃을 너울대며 나를 에워쌌다. 죽은 불이 타고 있었다. 죽은 불이 깨어났다. 나의 온기가 불을 타오르게 한 것이다. 불이 활활 타 오를 수 있도록 가지고 나가겠다고 하니 타 없어진다고 한다. 그러면 남겨두고 가겠다고 하니 얼어 죽고 말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찌하리까? 불은 나를 데리고 얼음골짜기 밖으로 나왔으나 돌연 수레바퀴에 치여 나는 깔려 죽고 말았다. 그리고 수레가 얼음골짜기로 떨어지는 것을 본다. 얼음산에 더 이상 죽은 불이 없다.
- 번뇌에 불타서 죽는 것이나 죽어서 얼어붙어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 ‘죽은 불’은 그 자체로 없는 것이다. 역설!
- ‘죽은 불’은 ‘자기’가 아닌가?
- 얼음골짜기에서만 ‘죽은 불’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루쉰이 처한 상황.
- “차라리 타버릴까!”를 선택하는 루쉰. 이렇게 타버리거나 ‘죽은 불’이라는 예외적 상황 뿐이다. 한쪽은 소멸, 한쪽은 죽음---> 그렇다면 차라리 장렬한 타오름을 선택하자! 역설적 통쾌함이 있다.
*‘혁명영웅’, ‘민족혼’ 등 중국적 루쉰읽기가 있다. 그런데 오히려 최근에는 이런 루쉰읽기도 폐기하고 있다. 어쩌면 ‘공자’가 중국의 ‘민족혼’으로 다시 오를 것 같다.
개의 힐난
좁은 골목길을 가는 꿈. 나는 영락없는 거지였다. 등 뒤에서 개가 짖는다. 나는 “주인을 믿고 유세하는 개새끼”라고 개를 꾸짖는다. 개는 오히려 “나는 사람만 못한 게 부끄럽다”고 한다. 나는 분개한다. 극단적인 모욕이다. 개는 “구리와 은도 구별 못하고, 무명과 비단도 구별 못하고, 관리와 백성, 주인과 노예도 구별 못한다”며 부끄러워한다. 나는 달아난다. 개가 얘기 좀 더하자며 붙든다. 나는 더 힘을 다해 달아난다. 꿈에서 깰 때까지.
- 개는 사리분별 못한다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데, 인간은 온갖 구별을 하면서도 개만도 못하다?
- 사람의 악덕(구분짓기)을 행하지 않는 개의 미덕.
- 구별하고 구분짓는 걸 아는 그 사람의 형편이 “영락없는 거지”라는 아이러니.
잃어버린 좋은 지옥
지옥의 가장자리에 있는 꿈. 인류가 투쟁하여 쟁취한 곳이 결국 지옥이었다.
루쉰은 신해혁명 뒤 군벌 간의 세력다툼이 민중에게 초래한 재난을 다음과 같이 개괄했다. “신이라 일컬어지는 것과 마귀라 일컬어지는 것이 싸우는데 천국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옥의 통치권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그런 까닭에 승자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지옥은 지옥일 수 없다.”
- 루쉰은 ‘이상세계’를 잘 그리지 않는다. 여기서도 결국 싸워서 만든 게 지옥이다. 프랑스혁명 등 국가주의 혁명들과의 거리감이 있다. 현시대 이상주의자들과의 거리두기.
- 루쉰은 혁명가라기보다 게릴라다. 군중으로서, 그렇지만 분명 늑대의 무리로서는 아닌, 초인적 ‘자기’구성의 의지가 보인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지향성을 발견해내기가 힘든 듯.
빗돌 글
돌비석에 새긴 글을 읽는 꿈. “호탕한 노래 열광 속에서 추위를 먹고, 천상에서 심연을 보다. 모든 눈에서 무소유를 보고, 희망 없음에서 구원을 얻다.” 빗돌 뒤로 돌아가니 무덤이 있다. 주저앉은 무덤 틈새로 주검이 보인다. 가슴과 배가 벌어져있고, 심장과 간이 없다. 얼굴은 애락의 표정없이 흐릿하다. “심장을 후벼 스스로 먹다. 본디 맛을 알고자. 아픔이 혹심하니, 본디 맛을 어찌 알랴? 아픔이 가라앉자 천천히 먹다. 이미 성하지 않으니 본디 맛을 또 어찌 알랴?” 나는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무덤 속에서 일어나 앉은 주검이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한다. “내가 티끌로 될 때에, 그대는 나의 미소를 볼 것이다!” 나는 줄달음질쳤다.
- 오래된 죽음을 가까이 경험한다. 가까운 죽음은 엄두가 나지 않으나 죽음의 인정은 미소를 낳는다?
무너지는 선의 떨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꿈을 꾼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작은 집 내부다. 굶주림, 고통, 노람, 수치심, 기쁨이 너울대고 있다. 그녀는 배고픈 아이를 달래며 잠을 재운다. 나는 갑갑함에 깨어난다. 날이 새기에는 아직 먼 듯하다. 아까 꾼 꿈을 계속 이어 꾼다. 여러 해가 지난 후다. 젊은 부부와 어린애 한 무리가 원망하고 깔보는 눈초리로 한 늙은 여인을 보고 있다. 대화를 들어보니 전번 꿈의 그 여인이다. 그들은 늙은 여인을 원망한다. 그녀는 싸늘한 욕설, 독한 웃음을 등 뒤에 남겨둔 채 깊은 밤 속으로 걸어 나갔다. 사방은 거친 벌판이다. 찰나간에 지나간 모든 것을 본다. 그녀는 하늘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입술 사이로, 인간 세상에 없는 언어를 흘린다. 낱말 없는 언어조차 사라지고 오로지 떨림만이 햇살처럼 퍼진다. 가없는 황야에 솟구쳐 흐른다. 나는 가위에 눌린다.
- 살아서 한 노력이, 삶에서 가졌던 희망이 낱말없는 언어로 속절없이 허공에 흩어져버린다. 나는 삶이라는 가위에 눌릴 수밖에 없다.
- 주인공은 몸을 팔아서 가족을 부양한 여성이다.
- “평정을 얻었다.”, “모든 것이 합쳐졌다.”, “위대하기가 석상같은”의 의미?
- 많은 작품에서 루쉰이 만든 “가상의 공간”은 가없는 황야, 황량한 벌판이다. 이 작품에서는 “집”이 등장한다. 그러나 루쉰이 그리는 집과 가정은 돌아갈 어떤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입론
나는 내가 소학교 교실에서 작문 준비를 하는 꿈을 꾸었다. 선생님께서 논지를 세우는 방법을 물었다.
“쉽지 않다!” 선생님이 안경테 너머로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더니, 말했다.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주마. -- “어떤 집에서 아들을 낳았단다. 온 집안이 몹시 기뻐하였다. 만 한 달이 되자, 아기를 안고 나와 손님들에게 보였다. 물론 덕담을 듣고 싶어서였지.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아이는 훗날 큰 부자가 되겠네요.’ 그 사람은 한바탕 감사의 말을 들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아이는 훗날 벼슬을 할 겁니다.’ 그 사람은 몇 번이고 칭찬받았다.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아이는 훗날 죽을 서요.’ 그 사람은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아프게 맞았다.
“죽을 것이라고 한 것은 필연을 말한 것이다. 부귀를 누리리라는 건 거짓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거짓을 말한 사람은 보답은 받고 필연을 말한 사람은 얻어맞았다. 너는…”
“저는 거짓말을 하기 싫지만 얻어맞고 싶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선생님, 저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
“그렇다면,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옴마! 야가! 얘 좀 보세요. 얼마나… 아이구! 하하! HeHe! He, hehehehe!”
- 거짓말을 할 수 없다면 그냥 감탄사만 남기는 수밖에. 사회생활 입론.
죽은 뒤
내가 길거리에서 죽어있는 꿈. “몇몇 벗들은 나의 안락을 빌었고, 몇몇 원수는 나의 멸망을 빌었다. 나는 그러나 안락하지도 멸망하지도 않고, 그작그작 살아왔다. 어느 한쪽의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림자처럼 죽었다. 원수들이 알지 못하게. 그들에게 공짜 기쁨을 조금치도 선사하고 싶지 않다.”
- 나의 죽음에 슬퍼할 사람이 있고, 나의 죽음을 기뻐할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역시 원수에게는 기쁨을 주지 않아서 통쾌하다. 나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보다는 나의 죽음을 기뻐할 원수들의 기쁨이 더 신경쓰인다.
- 원한과 원수에 대한 감각의 차이.
- 원수들이 내 죽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는 소리를 안 들어서 다행이라는 루쉰. 루쉰에게 ‘용서’라는 건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인 것 같다.
-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밀어주는 원동력이 될 때도 있다. 어떤 역설적 건강함도 읽힌다.
- “그작그작 살아왔다”에 공감.
루쉰의 의지는 "머무르지 않으려는" 어떤 의지. 이것은 근원적 욕망에서의 출발도, 욕망으로의 출발도 아닌. "출발도 목적도 없는 의지"가 아닐까 . 생生, 의意, 명命이 순환하는 의지.
- 길은 아득하여 멀기만 하나, 나는 오르락 내리락 하며 찾아보련다.(路漫漫其修遠兮 吾將上下而求索) <이소> 굴원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발제와 후기를 섞어서 읽는 신박함이라니!
이렇게 읽다보니 지난 세미나시간을 자연스레 곱씹게 되는데, 어쩜 이리 글들이 좋았을까요.
그리고 꼭 나를 위한 글 같을까요.
마치 족집게처럼 내 맘을 아는 루 선생이 약 백 년 가까운 시간 전에 적어놓은 듯 말입니다.
'죽은 뒤'를 읽고 세미나 시간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어떤 시간을 떠올렸어요.
장렬하게 죽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없는데, 그렇다고 헛발질하다 개죽음했다는 누군가의 수군거림은 죽어도 듣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악착같이..는 아니고,
그작그작, 오르락내리락, 그래도 어떻게든 가려니 하고 가다보니 크게 나쁘지는 않네요. ㅎㅎ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간결하고도 시원한 정리 감사드려요.
한 겨울 루쉰을 읽으며 여러 생각에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고 있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롭게 보게 되는 부분도 있구요.
세미나에서 나눈 이야기가 술술 펼쳐나가는 것 같아 반갑군요 ^0^
자연님의 댓글
자연
세미나 하면서 [들풀]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리가 잘 된 후기글 읽으니 새로운 감흥이 느껴지네요..잘 읽었습니다.
생의 한 가운데서 삶의 여정을 멈출 수 없는 길손처럼 우리는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야겠지요..
그작그작 살다가도 어떤 때는 과감하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