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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엽서] <발생과 구조와 현상학> 발제
최원 / 2017-12-19 / 조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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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발생과 구조”와 현상학」

(발제: 최원)

후설의 철학에 대해서 ‘구조와 발생’이라는 개념쌍 또는 적대의 고전적 형상을 가지고 조작적 논쟁을 행하는 것은 주의 깊은 검토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 삼기, 과잉조사가 될 위험이 있다. 후설은 항상 논쟁, 딜레마, 아포리아에 대한 혐오, 즉 양자택일적 방식에 의거한 성찰(질문을 닫고 자신의 기대나 관심을 하나의 선택, 하나의 결정, 하나의 해결책 안에 봉쇄하는 것)에 대한 혐오를 표명해 왔다. 형이상학자 뿐만 아니라 경험주의적 과학의 지지자들 역시 저지르는 이런 오류는 일종의 설명주의적 죄를 짓는 것이다. 반대로 현상학자는 사물 자체로 돌아가서 의미작용들의 독창성과 원초성을 앞에 두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는 ‘진정한 실증주의자’이며, 선택의 망령(구조인가 발생인가)을 떨쳐 버린다. 후설은 체계와 사변적 폐쇄를 거부함으로써 의미의 역사성, 의미의 생성가능성에 주의를 기울이며, 구조 속에서 열린 채로 있는 것을 존중한다.

기술(description)의 테마에 대한 이런 충실함은 후설이 그의 여정 내내 간직하는 자기 자신에의 충실성에서 나타난다.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1. <산수의 철학: 심리학적 논리적 연구Philosophy of Arithmetic>에서 <논리연구Logical Investigation>(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관념적 객체들의 객관성을 초시간적 고정성 속에서, 그리고 어떤 주관적 생성에 관한 자율성 속에서 기술하는 것이다)로 이행. 그렇지만 이 이행은 설명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40년 후 <산수의 철학> 긍정). 물론 이런 충실성은 쉽게 설명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데, 심리학적 발생에 집착했던 지향을 ‘초월적 발생’의 영역에서 다시 포착하는 것이 문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이념들 1Ideas 1>(1913)에서 사용된 정태적 구성의 구조적 분석들이 이후 사용된 발생론적 구성의 분석들로 이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행은 여전히 어떤 극복, 어떤 선택, 어떤 후회를 의미하지는 않는 단순한 발전, 작업의 심화이다. 발생론적 기초와 기원적 생산성을 드러내는 것은 표면적 구조들을 흔들거나 파괴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발생 그 자체의 형상적 형태들, 즉 “구조적 선험들”을 다시 조명한다.

따라서 후설에게 구조-발생 문제는 결코 없고, 단지 주어진 것의 종류 또는 방법, 기술 공간에 따라 이 두 조작적 개념들 가운데 하나에 우선권이 있을 뿐이다. 현상학은 언제나 객관성, 만질 수 없음(intangibility), 선험성을 고찰하는 본질들의 철학이지만 그것은 경험의 철학, 생성의 철학, 체험된 것의 시간적 변화에 대한 철학이기도 하다. 현상학은 ‘초월적 경험’이라는 의념이 성찰의 바로 그 장을 지시하는 철학이다.

후설의 목표에 대해 이런 주의를 환기했으므로, 이제 다음 두 가지를 입증하겠다.

1. 이 개념들의 평온한 사용 저 밑에, 기술의 행보에 규칙과 리듬을 주는 논쟁이 성립되고 있다. 이 논쟁은 기술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또한 논쟁의 미완성은 현상학의 각 단계를 불균형상태로 머무르게 하면서 새로운 환원과 새로운 설명이 끝없이 필요하게 한다.

2. 이 논쟁은 방법의 원칙들 자체를 매순간 위험에 빠뜨리면서, 결국 후설로 하여금 순전히 기술적인 공간(즉 현상학적 공간)을 넘어설 수밖에 없게 하고, 역사의 형이상학을 향한 그의 연구에 있어서 초월적 주장/가장을 위반하게 한다. 그런데 역사의 형이상학에서 텔로스의 탄탄한 구조는 그 구조를 본질화하고 그 지평을 규정함으로써 갈수록 현상학적 선험주의와 초월론적 관념론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 같은, 갈수록 확장되는 길들여지지 않은 발생론을 재전유하도록 허락하는 것 같다.

후설 사유에서의 내부적 논쟁 방향과, 후설이 그의 연구 분야의 면에서 두 번에 걸쳐 영위한 투쟁--딜타이주의와 게슈탈트주의--의 방향을 교대로 따라가 볼까 한다.

현상학 경계 바깥에서 벌어진 논쟁(구조-발생)

후설은 구조주의적 요구와 발생론적 요구를 조화시키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현상학적 기회 자체가 이런 시도의 첫 실패에서 생긴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산수의 철학>에서 구조의 객관성(수와 산수적 연쇄)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 발생과 관련되어진다. 후설은 이런 보편적 구조의 이해가능성과 규범성이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라도 되듯이 덥석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산수적 가치들과 대상들의 주관적 기원을 향해 가고자 노력하는 것, 그것은 지각 쪽으로, 지각 총체 쪽으로 다시 내려가는 것, 거기서 수학 이전의 조직 속에서 주어지는 다수성과 전체성 쪽으로 다시 내려가는 것이 된다. 이러한 회귀는 이른바 심리학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후설은 리프스와 분트 등과 달리 사실의 발생론적 구성을 인식론적 정당화(epistemological validation)로 간주하지 않는다.

후설의 독창성은 다음과 같다. a) 그는 수를 개념, 즉 구성물, 심리적 인공물과 구분한다. b) 그는 수학적, 논리적 조합을 심리적 시간성의 ordre(순서, 질서)로 환원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c) 그는 그의 모든 심리적 분석을 ‘일반적인 어떤 것’(etwas überhaupt)의 이미 주어진 가능성에 기초시킨다. 프레게는 이 ‘일반적인 어떤 것’을 핏기 없는 유령이라고 부르며 비판할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이미 객관성의 지향적 차원을 지적하고, 또한 어떤 심리적 발생도 설립하지는 못하며, 다만 그 가능성 안에서 가정할 수밖에 없는 대상에 대한 초월적 관계를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산수적 의미의 존중, 그 관념성과 규범성에 대한 존중은 후설로 하여금 수에 대해 심리적 연역을 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이다. 아무튼 발생의 움직임에 의해 전제된 지향성은 후설에 의해 여전히 하나의 특성으로서, 의식의 심리학적 구조로서, 사실성의 성질이나 상태 같은 것으로서 생각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후설은 숫자의 본질이 심리학에서 도출되는 것은 북해의 실존이 심리학에서 도출되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된다는 프레게의 비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후설은 심리학적 길을 포기하지만 그는 비판자들이 그에게 강요하려는 논리적 결론은 거부한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리주의는 논리적 관념성의 독립성에 집착하지만, 후설은 사실의 모든 의식에 대한 논리적이거나 수학적 관념성의 규범적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주관적 일반에 대한 근원적 의존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결국 그는 논리주의적 구조주의와 심리학적 발생주의라는 두 암초 사이를 건너야 했다. 그는 구체적이지만 경험적이지 않은 지향성의 발견, 창조적이면서 동시에 폭로적(revelatory)이고,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인, 구성적인(constitutive), ‘초월적 경험’의 발견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했다. 기원적 통일성, 능동성과 수동성의 공통된 뿌리가 후설에게선 의미의 가능성 자체이다. 이 공통된 뿌리는 구조 발생의 뿌리로서 경험된다. 후설은 다양한 ‘환원’을 통해 이 공통된 근본성(radicality)에로의 접근을 준비한다. 현상학의 첫 단계는 구조주의적인데, 왜냐하면 심리학과 역사주의에 빠지지 않으려고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생론적 기술 일반이 제외된 것이 아니라 다만 인과주의와 자연주의에서 그 도식을 차용한 발생론적 기술, 사실들의 경험주의적 과학에 의존하는 발생론적 기술이 제외된다. 현상학적 태도로의 전환은 발생론의 철학적 무능에 의해 요청되었다 하겠다.

현상학적 공간이 발견되지 않는 한, 초월론적 기술이 시도되지 않는 한, 구조-발생의 문제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객관적 의미 작용의 여러 영역을 그 정적인 독자성을 존중하면서 구별, 분리하는 구조의 관념도,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의 이행을 남발하는 발생의 관념도 후설의 문제인 객관성의 기초를 밝히는 데에 역부족이다. 이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발생 개념이나 구조 개념은 그것들을 아무리 단순하게 사용하려고 해도 자연의 영역과 객관성의 분야를 엄정하게 분류해야 하는 것이 그 최소한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구분, 각 영역 구조의 의미 설명은 현상학적 비판의 소관일 수밖에 없다. 현상학적 비판은 언제나 원칙상 일차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만이 모든 경험적 조사에 앞서 다음과 같이 묻기 때문이다. 물질적 사물이란 무엇인가? 심리적 사물이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물이란 무엇인가? 등등. (그러나 데리다의 이런 주장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산수의 철학>이 심리발생론의 기도와 동시대적인 저작이라면, 후설의 최초의 현상학적 저잘들은 최초의 구조주의적 기획들과 동시대적이다. 그런데 딜타이주의와 게슈탈트주의 같은최초의 구조철학의 원리에 대해, 후설은 발생론에 반대하여 영위했던 것과 동일한 반대를 보낸다. 딜타이의 세계관의 철학의 구조주의는 후설이 보기에 역사주의이다. 딜타이는 맹렬히 항의했지만, 후설은 세계관의 철학은 모든 역사주의처럼 상대주의도 회의주의도 피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길 고집한다. 라이프니츠의 언어로 말하자면 사실의 진실과 이성의 진실을 혼동하고 말기 때문이다. 진리의 관념은 무한의 관념이다. 그런데 결정된 역사의 모든 구조=세계관을 활성화하고 통일시키는 관념이나 기획은 유한하다. 결국 모든 것은 세계관의 구조적 기술에 기초해서 설명될 수 있지만 진리로의 무한한 개방, 즉 철학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언제나 구조주의적 목표를 실패시킬 개방 같은 어떤 것이다.

후설이 딜타이주의에 치열하게 반대한 것은 딜타이주의가 유혹적이기 때문이다. 딜타이주의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정신의 삶의 실증주의적 자연화에 반대한다. 설명과 객관화에 대립된 이해하기(comprendre)의 행위는 정신과학이 따라야할 길이라고 본다. 후설은 다음 몇 가지에 호의를 보인다. 1) 이해 원칙 또는 재-이해의, 재체험 원칙의 관념에 대해(감정이입, 재활성화--다른 정신의 과거 지향을 적극적으로 다시 체험하고 의미 생산을 다시 일깨우는 것). 2) 내재적 의미의 통일성을 가진 전체주의적 구조들, 세계관에 상응하는 문화 세계가 존재한다는 관념에 대해. 3) 외적 인과성에 의거하는 물질 구조들과 동기부여에 의해 조직된 정신 구조들의 구분에 대해.

그러나 이런 쇄신은 근본적이지 못하고 역사주의의 위협을 가중시킨다. 역사가 그 방법을 개선했다고 해서, 인과론, 원자론, 자연론을 구조주의로 대체했다고 해서, 문화적 전체성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고 해서, 역사가 사실들의 경험주의적 과학이 되길 그치지는 않는다. 가치와 존재에 대한 혼동이 역사적인 것이라는 애매한 범주 아래 있고 모든 실재 타입과 관념 타입들의 혼동이 있다. 결국 세계관의 이론을 고유영역에 엄격히 제한된 한계로 복귀시키든가 환원시켜야 한다. 그 윤곽은 지혜와 지식 사이의 어떤 차이에 의해, 그리고 윤리적 기소와 참을성 없음에 의해 그려진다. (지혜 -> 실용적 실천적 해결책 -> 세계관 -> 임시도덕) vs (지식 -> 과학 -> 이론적 정초의 지연(차연))

현상학 경계 안에서 벌어진 논쟁(구조-발생)

형상적 환원과 초월적 환원을 염두에 두고 후설 내부의 논쟁을 고찰해보자.

현상학적 기술과 구성적 분석의 제1단계는 정태적이고 구조적인데, 두 가지 이유로 그렇다. A) 후설은 역사주의적 심리주의적 발생론을 반대하여 논쟁하면서 그 이론에 대한 반발로 모든 발생론적 편견을 획일적으로 배제한다. 마치 그가 모든 발생을 연합적, 인과적, 사실적, 현세적인 것으로 간주하듯이 사태가 진행된다. B) 후설은 대상 일반(영역적 소속이 어떠하든)과 의식 일반(원영역) 사이의 접속에 열중하고, 명증 일반의 형식들을 정의함으로써 현상학적이고 비판적인 최종 권한에 도달하고자 하는데, 이 권한에 후일 가장 야심적인 발생론적 기술이 포섭될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두 가지 형태를 취할 것인데, 모두 그것은 닫힘과 열림의 문제이다.

1. 수학적 본질들 -> 정확함(기하학 수학). 순수 의식의 본질들(경험, 현상) -> 엄밀함(현상학). 현상학은 엄밀할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부정확/비정확하다. 정확함이란 언제나 이데아화와 극한화 조작의 부산물이거니와, 이런 조작은 추상적 형상적 구성물(공간성)에만 관련된다. 따라서 기하학은 물질적이고 추상적인 과학이다. 또한 그런 까닭에 경험의 기하학, 현상의 수학은 불가능하다. 의식의 본질들, 특히 현상들 일반의 본질들은 구조에 소속될 수 없고 수학적 타입의 다수성에 소속될 수 없다. 후설이 살던 시대에 수학적 다수성의 특징은 닫힘의 가능성이다. 후설이 정확한 과학과 형태적 과학(현상학)을 비교하며 강조하는 것은 구조주의 현상학을 닫는 것의 원리적 불가능성이다. 그것은 체험된 것의 무한한 개방이다. 칸트적 의미의 관념은 의식 속으로의 무한의 침입으로서 그것이 대상과 세계를 통일시킨 것처럼, 의식의 시간적 흐름을 피치 못할 미완결에도 불구하고 예견에 의해서 통일시키는 것이다. 이 관념의 이상한 현전이야말로 또한 모든 정확함의 극한과 생산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2. 노에시스-노에마(noesis-noema), 형상-질료(morphe-hyle). 2개의 상관성, 4개의 극.

A) 구조의 지향적 계기들인 노에시스와 노에마는 노에마가 의식에 실제적으로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구별된다. 의식 일반 속에는 의식에 실제로 속하지 않는 심급이 있다. 이것은 노에마의 비실재적 함유의 어렵지만 결정적 테마이다. 노예마는 세계에서도 의식에서도 유래하지 않고, 의식에 있어서 세계이다. 틀림없이 노에마는 지향적 의식에 기초해서만 권리상 발견될 수 있지만, 노에마는 의식을 실재화하기를 피함으로써 은유적으로 ‘재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을 의식에서 차용하지는 않는다. 어떤 영역에도, 원영역에조차도 실제로 소속되지 않는 노에마의 이러한 비소속, 이러한 아나키는 의미와 객관성의 가능성 자체이고 뿌리이다. 그런데 이 점을 인식하게 되면 초월적 환원이 기만적으로 보일 수 있게 된다. ... 열림의 초월성은 동시에 근원이자 실패이고, 모든 구조의 가능성의 조건이자 특정한 불가능성의 조건이다.

B) 노에마가 지향적이고 비실재적인 구성물인 반면, 물질(hyle)은 체험된 것의 실재적이지만 비지향적 구성물이다. 물질은 지향적 활동 이전의 정서(affect)의 감각적 소재이다. 그것은 순수 수동성의 극점, 비지향성의 극점으로, 이 비지향성이 없으면 의식은 의식 자체가 아닌 다른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고 지향적 활동도 할 수 없다. 이런 수용성은 또한 핵심적인 열림이다. 후설은 물질(형태 없는 물질이나 비물질적 형태)을 그 자체로 검토하기를 포기하는데, 이는 그 분석이 구성된 시간성 내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물질은 우선 시간적 소재이다. 물질은 발생 자체의 가능성이다. 이리하여 이 열림의 두 극에서, 그리고 모든 의식의 선험적 구조의 내부 자체에서 발생의 구성으로 이행할 필요가 나타난다. 그리고 끊임없이 예고되지만 언제나 미루어지는 새로운 ‘초월적 감성학’으로 이행할 필요가 나타난다.

구조주의로부터 발생론적인 것으로의 이행의 필요성은 결별 또는 전환의 필요성이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잠시 두 번째 경계선 문제를 살펴보자. 즉 현상학적 심리학과 초월론적 현상학 사이의 평행 관계에 대해서. 후설은 그의 <관념들 1>에서 구조심리학 또는 총체심리학에 비판을 가하고, 게슈탈트 심리학을 명시적으로 비판한다. 현상학적 심리학을 그것과 평행관계에 있는 초월적 현상학과 구분해주는 거리를 밝히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서로 만나는 것을 막는 그 nothing에 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nothing이 초월적 환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초월적 환원은 의미의 총체성과 총체성의 의미가 자신의 기원이 출현하도록 허락하는 이 nothing에 주의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핑크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이 세계의 기원이다.

<관념들 1> 이후에 전개된 발생론적 현상학은 세 방향으로 회절된다.

A) 논리적 길. <경험과 판단> <형식논리학과 초월론적 논리학> 등은 과학적 관념화들의 상부구조들과 객관적 정확성의 가치들을 해체하고 환원하느 것이지만, 또한 생활세계에서의 주관적-상대적 진실들의 문화적 층위에 속하는 모든 서술적 침적이기도 하다. 이는 가장 원시적인 전문화적 생활에 기초하여 서술작용을 재포착, 재활성화하기 위함이다.

B) 에고론적 길. 형상자아 일반의 문제. <데카르트적 성찰>에서 말하듯이, cogito-cogitatum 장의 안쪽으로 내려와 자체로서 존재하고 “존재자로서 자신을 끊임없이 구성하고 있는 자아 그 자체의 발생을 포착하는 것이다.” 수동성과 능동성의 미묘한 문제말고도 자아의 발생론적 기술은 한계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로서는 이 한계들을 결정적이라고 판단하고 싶지만 후설은 물론 일시적인 것으로(현상학이 초보단계라서 생긴 문제) 간주한다.

C) 역사적-목적론적 길. 이성의 목적론은 모든 역사성을 끝까지 통과하며 자아 역사의 통일성을 통과한다. 이 세번째 길은 역사성 일반의 형상으로서의 텔로스에 접근하는 길인데, 역사의 형상론은 기타 다른 형상론 가운데 하나가 아니며, 그것은 존재자들 전체를 포괄한다. 사실상 인간 의식에 로고스가 침투해 오는 것, 이성의 무한과업에의 관념이 자리잡는 것은 일련의 개혁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이런 단절은, 후설이 인정하듯이, 항상 이미 “혼란과 어둠 속에서” 지시되어 있다. 즉 생명과 인간 역사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들 안에서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동물성과 자연 일반 안에서. 현상학 자체 내에서 현상학 자체에 의해 필연적이 된 그 단언이 어떻게 현상학 내에서 전적으로 확실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것이 형이상학의 단언이 되는 것을 막고 있는가?

결국 이성은 스스로 자신의 베일을 벗는다. 후설은 이성은 역사 가운데 산출되는 로고스라고 말한다. 로고스는 자신을 말하고 자기를 듣기 위해 존재를 관통한다. 로고스는 자기감응이다. 로고스는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자기현전의 살아 있는 현재 속에서 자기 안에 회수된다. 자신으로부터 나오면서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들음은 글쓰기라는 우회로를 통해 이성의 역사로 구성된다. 로고스는 이렇게 자기를 재점유하기 위해 자신과 달라진다. <기하학의 기원>은 이성이 현세적 기록 속에서 서술될 필요성을 기술하고 있다. 이성의 이 서술은 대상들의 진실성과 관념성의 구성에 필수적이지만, 또한 기호의 외부에서 오는 의미에 대한 위험이기도 하다. 글쓰기의 순간에 기호는 언제나 자신을 비울 수 있고 깨어남과 재활성화에서 도망칠 수 있으며 영구히 폐쇄되어 벙어리로 머물 수 있다. 쿠르노에게서처럼 글쓰기는 ‘critical epoch’ 이다.

그러나 후설의 언어가 직접적으로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은 아니다. 후설은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도 현상학이 갱신된 형이상학임을 말한다. 텔로스 또는 이념의 현상학적 의식에의 현존은 후설이 칸트적 의미의 관념을 말할 때마다 지적된다. 칸트적 의미의 관념은 현상학적 명증 속에서 현재적이고 적합한 명증의 본질적인 넘침의 명증처럼 주어진다. 그러면 아마 이 관념이 현상학의 관념이거나 기획 자체라는 것이 나타날 것이다.

텔로스는 전면적으로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텔로스가 역사성의 구조적 선험의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텔로스를 존재와 의미의 발생을 가두고 정보를 줄 정태적이고 결정론적 가치처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텔로스는 역사의 구체적인 가능성이요, 탄생 자체이고, 생성 일반의 의미이다. 결국 텔로스는 기원으로서, 그리고 생성으로서의 구조적으로 발생 그 자체이다. (열린 목적론?)

발생, 구조, 발생과 구조의 역사적-의미론적 관계를 묻는 것은 언어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초월론적 환원이 가능해지고, 동기 부여의 기초를 제공하는 역사적 지반의 통일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된다. 후설이 이 문제를 역사적 문헌학의 용어로 검토하지 않았다면, 이는 구조와 발생을 환원에 의해 분리하기 이전에 구조나 발생 일반의 개념의 의미에 관해 검토하는 일은, 곧 초월적 환원을 선행하는 것에 대해 검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초월적 환원은 질문의 자유로운 행위, 자신을 선행하는 것 전체--자신의 역사성과 과거--에서 자신을 해방하는 것(그 전체에 접근하기 위해서)이다. 초월적 환원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답을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은 질문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 갭에 기초해서 초월적 자아는 무의미의 형성되지 않고 벌거벗은 사실성의 가능성에 대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묻도록 요구받는다. (역사적 환원의 역설. 쓴다는 것은 초월적 환원을 행하는 것.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서 주체는 초월적 ‘우리’의 관점을 택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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