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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발제] <들풀> 1220
삼월 / 2017-12-20 / 조회 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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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사>

 루쉰은 어떤 전사가 있어야 한다고 쓴다. 그 전사는 문명의 무기가 아닌, 야만인이 쓰는 투창을 맨몸에 들고 있다. 무물의 진에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인사로 사람을 죽이는 전투가 벌어진다. 각가지 좋은 명칭을 수놓은 깃발 아래 여러 좋은 무늬를 수놓은 외투를 입은 자들의 전투에서 전사는 깃발과 외투 대신 투창을 들었다. 전사의 투창이 무물의 물 가운데에 심장을 명중시켰을 때 넘어진 건 외투뿐이었다. 그러나 전사는 좋은 명칭을 해친 죄인이 되었다. 인사로 사람을 죽이는 전투, 깃발, 외투들과 다시 마주쳤으나, 전사는 투창을 들었다. 마침내 무물의 진 속에서 늙어 죽고, 무물의 물이 승자가 되었다. 더 이상 투창을 던지는 자도, 전투의 함성도 없다. 태평太平이라는 두 글자만 남았다.

 루쉰은 이데올로기의 전투에서 맨몸으로 야만인의 투창을 든 전사를 그려낸다. 자신이 그런 전사가 되고 싶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전사였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런 전사가 필요하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루쉰이 이데올로기의 전투가 아닌, 투창에 맞아 진짜 피를 흘리는 전투를 원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좋은 명칭(자선가, 학자, 문인, 원로, 청년, 아인, 군자)과 좋은 무늬(학문, 도덕, 국수, 민의, 논리, 공의, 동방문명)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전투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실 전투에는 좋은 명칭도, 좋은 무늬도 필요 없다. 투창 하나면 충분하다.

 

<총명한 사람, 바보, 종>

 늘 신세타령만 하는 종이 총명한 사람을 만나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하소연만으로도 마음이 가뿐해진 것 같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하소연할 상대를 또 찾아 나선다. 다음 하소연 상대인 바보는 종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호통을 친다. 방에 창문이 없다는 종의 집 흙벽을 냅다 부순다. 종은 바보를 주인에게 이르고, 칭찬을 받는다. 총명한 사람을 만나 칭찬받은 사실을 자랑하며, 큰 희망이라도 생긴 듯 기뻐한다.

 이 글에서 이름이 아닌 ‘총명한 사람’과 ‘바보’라고 표현되는 인물들은 사실 정말 총명한지, 혹은 바보인지 의심스럽다. 두 사람의 행동을 구분하는 기준이 총명한가, 아닌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총명한 사람은 지난 시간 읽은 글 <입론>에서 아기에게 훗날 부자가 되거나, 벼슬을 할 거라고 말한 이와 비슷하다. 부질없는 맞장구와 동정 섞인 호의가 그의 주특기이다. 그렇다면 바보는 훗날 아기가 죽을 거라고 한 이와 비슷하다. 당연히 실현될 것을 말했다고 매를 맞은 이처럼, 바보는 현실에서 가능한 돌파구를 찾다가 강도취급을 받고 쫓겨난다. <입론>의 아기 부모처럼 종 역시 무엇이 현실의 자신을 위한 일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종은 종이다. ‘총명한 사람’이 총명한 사람이 아닐 수 있고, ‘바보’가 바보가 아닐 수 있지만, 종은 여전히 종이다. 굶주림과 열악한 잠자리를 해결할 자신은 없어도, 주인에게 받는 의미 없는 칭찬 한 마디에 희망을 품는 이는 여전히 종일 수밖에 없다.

 

<마른 잎>

 책 속에서 작년에 끼워둔 병든 잎을 발견했다. 까맣게 테를 두른 작은 구멍이 눈알처럼 사람을 응시하는 병든 잎. 초라하다기보다 기괴한 형상을 가진 이 병든 잎을 루쉰은 뭇 이파리들보다도 더 보존하고 싶었던 것이다. 병든 것의 기괴한 반짝임에서 오는 다채로움이 주는 강한 인상.

 

<빛바랜 핏자국 속에서> - 몇몇 죽은 자와 산 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를 기념하여

 조물주와 맹사가 대결한다. 비겁한 조물주는 천재지변을 일으키지만, 지구를 훼멸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그에게는 인류를 멸절할 용기가 없다. 몇 개의 폐허와 황량한 무덤 위에는 아득한 슬픔을 곱씹는 죄인과 노예들이 새 슬픔의 도래를 기다린다. 여기에 반역의 맹사가 출현하여 조물주의 농간을 간파한다. 조물주의 착한 백성인 인류는 소생하거나, 소멸될 것이다. 비겁한 조물주가 숨고, 하늘과 땅이 맹사의 눈앞에서 변한다.

 

<일각>

 폭격준비를 마친 비행기 소리를 들으며, 루쉰은 죽음이 덮쳐드는 것처럼 느낀다. 동시에 ‘생’의 존재감도 깊어졌다. 덮쳐오는 죽음 앞에서 루쉰은 묵혀두었던 젊은이들의 원고를 정리한다. 아름답고 순진한, 사랑스러운 젊은이들의 영혼이 루쉰의 눈앞에 스쳐간다. 젊은이들은 고뇌하고, 신음하고 ,분노하다, 마침내 거칠어졌다. 평화로운 신선의 세계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루쉰은 젊은이들의 할퀸 영혼 앞에서 자신이 인간 세상에 살고 있음을 다시 기억한다. 젊은이들의 적막한 울림이 자신에게서 쉬고자 할 때, 루쉰은 감동 받는 동시에 슬퍼한다. 피 흘리는 젊은이들의 영혼이 루쉰에게 인간 세상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해가 저물자 청춘이 눈앞을 달려 지나가고, 몸 바깥에는 저녁 어스름만 남았다.

 <희망>이라는 글에서 루쉰은 자신의 청춘이 지나갔어도, 자기 몸 밖에 청춘이 존재한다고 여겼다고 적었다. 그러나 적막 속에서 루쉰은 세상의 청년들이 죄 늙어버리고 몸 밖의 청춘이 스러져버렸다고 한탄한다. 몸 밖의 청춘을 찾지 못하면 몸 안의 어둠이라도 몰아내겠다던 루쉰. 그 포부 앞에서 어둔 밤마저 존재를 부정당했다. 그러던 루쉰이 이 글 <일각>에 이르면, 다시 눈앞에 청년들의 모습을 그린다. 루쉰이 청춘을 찾던 몸 바깥에는 어둔 밤도 아닌, 저녁 어스름만이 남았다. 루쉰은 여전히 청년들을 사랑한다. 자기 몸 안의 어둠을 몰아낼 존재로서가 아니다. 오로지 그 영혼들이 루쉰이 인간 세상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런 방식으로 ‘생’을 깊게 만들었다.

 

올해의 마지막 발제는 루쉰이로군요. 이번 연말 루쉰에게 받은 위로를 어찌 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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