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공백] 시즌5 후기 12월 19일 나혜석 +2
우주
/ 2017-12-20
/ 조회 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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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공백 시즌5 시간에는 나혜석의 시를 읽어보았습니다. 나혜석을 이야기할 때 그녀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이와 관련 온라인 기사 링크해둡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3278&mobile&cid=58863&categoryId=58863
http://m.navercast.naver.com/mobile_magazine_contents.nhn?rid=2045&contents_id=13636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9734454&sid1=001
세계여성시인선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아티초크)에 실린 나혜석에 대한 소개는 이렇습니다.
나혜석(1896.4.18-1948.12.10)
페미니스트 나혜석의 근본 이념은 인간은 자유롭고, 여성은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혜석은 <모된 감상기>에서 모성이 허위의식임을 피력했고, <이혼 고백장>에서는 조선의 정조관념을 정면 비판했으며, <우애결혼, 시험결혼>에서는 이혼의 비극에 대처하기 위해 시험결혼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 가부장제 타파와 양성평등을 위해 투쟁했다. 그녀의 고군분투는 1930년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듬해 나혜석은 ‘사랑의 자유 선언’에서 여자에게도 성욕이 있으며 그것은 죄악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탕녀로 낙인찍혀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여승이 된 친구 김일엽이 있는 수덕사에 찾아가 승려가 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9년 3월 4일, 서울시립병원은 65세로 추정되는 무연고자 여성이 영양실조와 실어증으로 사망했다고 처리했다. 이 여성이 바로 1948년 12월 10일에 사망한 53세의 나혜석이었다.
시대를 앞서 불행했던 여인 나혜석. 그녀를 생각하면 저는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인형의 가(家」), 「아껴 무엇하리 청춘을」, 「노라」,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라는 네 편의 시와 「모(母)된 감상기」라는 수필 속에 포함되어 있던 메모를 읽어보았습니다.
우선 「모(母)된 감상기」 속 메모는 산고를 잘 표현한 메모였습니다. 산고를 겪어보신 분들의 경험담을 들으며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산고를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산고는 정말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한 고통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습니다. 무엇보다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며 후천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나혜석은 생각했다고 하는데요. 이런 생각은 요즘에서나 언급되는 시대를 앞서간 통찰입니다.
「아껴 무엇하리 청춘을」 은 청춘이 지나간 후에 청춘을 회상하며 지난 청춘을 아껴 무엇하겠느냐며 노경을 잘 맞겠다는 생각이 담겨 있는 시였습니다. 이 시에서는 나이 먹은 사람이 "기린과도 같고 물소와도 같다"는 표현이 특이했는데요. 이를 나이가 들면 사람이 예민해지고 투명해진다는 감각으로 풀어주신 토라진님의 생각이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인형의 가(家」)와 「노라」는 1921년 입센의 《인형의 집》이 번역되면서 이 작품을 희곡으로 만든 공연에 쓰였던 노래로 짐작됩니다. 이 중 「노라」만 옮겨둡니다.
노라
새날의 광명이 비쳤네
아버지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였네
[후렴]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다오
높은 장벽을 열고
깊은 규문을 열고
자연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머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 되려네
나는 사람이로세
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천부(天賦)의 힘은 넘치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새날의 광명이 비쳤네
이 시에서 "나는 사람이라네"라는 구절에 주목해보았습니다. 당시의 여성들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할 수 있을 만한 대접을 받지 못했었죠. 사실 이 부분에서 여전히 '여성' 이해가 아쉬운 한국의 정책의 예를 떠올려봤는데요. 희음님께서 말씀해주신 공중화장실의 평수가 있었습니다. 과거엔 남녀화장실의 평수가 같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죠. 남자는 소변기, 여자는 양변기가 주로 필요한데 평수를 같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양변기의 수는 당연히 더 적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근래에서야 이를 인식하고 조정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아직도 여성에 대한 이해는 여러 모로 부족한 면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를 읽으며 토라진님은 루시드폴의 <사람이었네>가 생각났다고 했지요.
어느 문닫은 상점
길게 늘어진 카페트
갑자기 내게 말을 거네
난 중동의 소녀
방안에 갇힌 14살
하루 1달러를 버는 난 푸른 빛 커피
향을 자세히 맡으니
익숙한 땀 흙의 냄새
난 아프리카의 신
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
문득 어제 산 외투
내 가슴팍에 기대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난 사람이었네
공장 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어느 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 루시드폴, <사람이었네>
이 노래엔 하루 1달러를 버는 중동의 한 소녀의 삶이 담겨 있지요. 가수 이상민 역시 자신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빚 때문에 모두에게 욕을 먹던 시절-에 이 노래를 듣고 힘을 낼 수 있었다고 하네요.
(위 이미지는 최원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삶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파생되어 나온 거라는 짐작을 하며 우리가 스스로 사람임을 인식하게 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 혹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어야 사람이 아닐까 등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마시멜로님 역시 장애인 운동을 했던 경험을 공유해주셨는데요. '피플퍼스트(People First)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이 말에서도 우리는 '사람의 중요성'을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인권 운동'과 '인권의 정치'의 의미를 생각해봤는데요. 이런 부분에 대하여 한나 아렌트와 아감벤은 다소 다른 사유를 했다고 하네요.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이란 표현을 통해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깊이 사유했다고 합니다. (이는 <폭력 비판을 위하여> 속 벤야민의 사유하고도 만나는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호모 사케르》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습니다. 그러자 내년 1월부터 시작할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세미나를 열심히 참여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보다 많은 분들이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는 이렇습니다.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남매 아해들아!
애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애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애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나혜석은 본인이 객사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남편에게 이혼 당한 후에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시는 슬픕니다. 한때 파리에 살았던- 그 곳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예술가들과 교류했던- 나혜석의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곳”인 파리에 "죽으러" 가고 싶은 심경이 저에게도 아프게 다가오네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나혜석은 끝내 파리로는 가지 못하고 한국에서 행려병자로 객사하는 참담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주체적인 여성 나혜석. 뛰어난 화가이자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나혜석. 그러나 말로는 비참했던 나혜석의 삶은 여성이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여성적 삶의 아픔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걸까요. 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구조'를 사유하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탈구조'를 논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탈구조하는 행위'는 여전히 너-무- 멀고 타자의 욕망이 훨씬 더 자주 손에 잡히기 때문입니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후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그 세미나 시간에 다시 몸이 푹 잠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다른 세미나 때와 다르게 나혜석의 시를 읽으면서는 그다지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아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나혜석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거예요. 눈빛과 가슴의 언어로 우리의 시간은 이미 꽉 차버렸던 거죠.
그 시간을 꼼꼼히 되살려 주시고 또 그 시간이 풍성할 수 있게 발제와 자료 준비를 충실히 해 주신 우주 님께 고마운 마음.
아감벤 <호모사케르> 세미나 홍보 문구를 빨갛게 볼드처리해 주신 저 깨알 센스에도 박수를!^^
(초저녁에 잠들었다 좀 전에 일어나서 이렇게 후기를 읽고 있으려니 뭔가 몽환적이고 마치 그 시대의 나혜석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네요.^^)
마시멜로님의 댓글
마시멜로꼼꼼한 후기, 간략한 정리, 그리고 인용! 두루두루 담아주셨네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은 언제나 멋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