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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후기] 위험한 책 :: 2부 1~3장 +12
빠른거북이 / 2017-12-23 / 조회 2,990 

본문

저는 질문과 여러분들 생각 위주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정답은 없으므로...  

제가 잘못 정리한 것이나, 굳이 언급이 안 되었으면 하고 원하는 내용이나, 이 질문들에 대한 여러분들 추가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셔도 좋겠습니다.   


1. 신은 죽었다

 

Q 신이란 무엇인가?
저는 중세시대에서 근대시대로의 선언, 인격신의 죽음으로 이해를 했습니다만 좁게 해석한 것 같고요. 호골산님은 우리가 의지하는 대상에 대한 것, 그리고 그것의 상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Q 신의 죽음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무님이 ‘우주의 미아’라고 하셨어요. 와닿는 표현이었습니다.  
엇결님은 신의 죽음으로 인한 불안에 대해 생각하셨다고 했고요.
고병권샘은 신의 죽음이 ‘신앙의 죽음이고,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인 인간의 죽음’이라고 표현했는데 역시 와닿았습니다.

 

Q ‘우리 모두는 신의 살해자이다.’ 왜 니체는 신의 ‘죽음’에서 더 나아가 ‘살해’라는 표현을 쓰는가?
살해라는 표현은 인간이 신을 죽이려는 ‘의지’, ‘의도’가 강하게 들어가는 말이 아닐까 싶어서 질문을 드렸습니다만 다른 분들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신의 죽음을 방조할지언정 살해한 적은 없는데 왜 니체는 우리가 살해했다고 표현했을까가 궁금했습니다.
이건 나비가 박제되는 순간 나비가 아니듯, 신이 인간에 의해 우상화되어 박제되면 그것이 살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말을 하신 요고마고님 의견이 기억에 남네요. 엇결님이 살해라는 표현보다는 ‘우리 모두’에 중점을 두고 읽었다는 말씀도 기억에 남습니다.
고병권샘은 그의 책 110쪽 아래에서 ‘창조주에게 한없이 못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가능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신을 살해하진 않았습니다. 과실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살해하지는 못 했고, 살해에 가담한 공범들은 니체 이전에는 스피노자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정도 밖에 없는 게 아니었을까요.
한편 과학이 인간의 자립성을 키워준 것은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신앙일 수 있다는 시각이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106쪽)

 → 이 부분은 오늘 제가 책 '5 신체야 말로 큰 이성이다'를 읽다 보니 니체는 인간의 범죄에서 '자유의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게 나오네요. 짜라투스트라를 몇 번씩 읽고서도 개별 해석할 때는 제가 니체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네요.

 

Q 신의 사인. 왜 죽었나?
110쪽 신이 죽은 이유에 대해 아직은 납득을 못 하겠습니다.
1. 연민으로 죽었다? 우리가 못나서?
2. 인간이 위버멘쉬가 되어서 죽었다?...위버멘쉬는 아직 오지 않은 존재아닌가요? 어떻게 신은 죽은 걸까요?

 

Q 112쪽 ‘가장 철저하게 살해하려고 하는 자는 웃는다는 것을.’ 여기서 웃음은 비웃음일까, 호탕한 웃음일까?

본문 맥락을 다시 읽어봐도 정확히 드러나지 않아서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웃음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전반적으로 나왔던 걸로 기억납니다만 특히 4부 ‘차원 높은 인간에 대하여(민음사 514, 516쪽)’에 웃음 이야기가 조금 나옵니다. 이 바로 뒤에 ‘나귀제’에서 웃음 공격으로 신을 죽입니다. 

16
여기, 대지 위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큰 죄악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웃고 있는 자에게 화 있을지어다!”라고 한 그자의 말이 아니었던가.
그는 대지 위에서 웃어야 할 어떤 근거도 찾아내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서툴게 찾았을 뿐이다. 아이조차도 여기 이 대지에서 그 근거를 찾아내는데 말이다.

18
웃는 자의 이 면류관. 이 장미꽃 다발의 화관. 나 자신이 이 화관을 내 머리 위에 씌웠다. 나 자신이 나의 커다란 웃음을 신성하다고 말했다. 오늘날 나는 이렇게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어떤 다른 사람도 보지 못했다.
춤추는 차라투스트라, 날개로 신호를 보내는 자, 경쾌한 차라투스트라, 모든 새들에게 신호를 보내며 날아갈 준비를 간춘 자, 만반의 준비를 갖춘, 더없이 행복하고 마음이 가벼운 자.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참되게 웃는 차라투스트라, 성급하지도 무조건적이지도 않은 자, 뛰어오르기와 가로뛰기를 사랑하는 자. 나 자신이 이 화관을 내 머리 위에 씌웠다! 

 

그리고 고병권샘도 이 다음에 바로 113쪽에서 마지막 환한 웃음을 이야기합니다.

더 이상 초월적인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환하게 웃을 때, 신의 죽음이 찾아오며, 그때의 죽음은 인간에겐 가장 영예로운 일이 될 것이다. - 113쪽

 

참조 (네오바르사님 발견)
신의 죽음을 유발한 두 ‘웃음 공격’ 결과가 다름 111~112쪽
다신교 신들의 죽음 웃음 유일신이 가한 ‘웃음 공격’ 때문에 죽음 --- 어이 없어서 신들이 죽음(피해자가 웃다 죽음)
유일신 웃음으로 죽임 (가해자가 웃어서 공격해서 죽임)
웃는 주체가 다름


2. 너희는 너희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Q 왜 우리는 원하는 삶을 선택했는데 고통스러운가?
엇결님의 고민에 고병권샘은 ‘노예 = 고통, 자유=행복이란 공식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행복한 노예가 있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원하는 일을 하고자 오래 근무했던 회사에서 나와서 백수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그때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왜 행복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당시 제 나름의 결론은 이 세상에 완전한 자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새로운 얽매임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그래도 자유에도 층위가 있고, 행복에도 층위가 있겠지요. 어쨌든 현실을 일깨우는 빨간약을 먹고 고통에 빠진다면 ‘행복한 고통’이라고 믿어야할 것 같습니다. 니체는 역설적 표현을 흔하게 하고, 역설적 삶을 가능하게 해주네요. 
소소님이 그냥 시간표대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속 질문해나가면서 사는 것은 굉장한 힘이 필요하다는 말씀도 기억에 남습니다.
올리비아님에 따르면 2018년 트렌드는 행복을 자기 나름의 행복을 찾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트렌드까지 배우는 니체 세미나 !
 
Q 강자는 누구인가?
강자와 귀족에 대한 정의가 새로운 것도 재밌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니체에 대해서 오해를 했어요. 귀족주의자인 줄. ‘강자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다.’ 멋있는 말입니다.  

 

Q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
올리비아님이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아이의 그림처럼.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Q 각자 가치 기준이 충돌할 때(좋음과 좋음이 충돌할 때) 어떻게 할까?
올리비아님은 관계에서 고민해야하지 않을까를 이야기했고요.
오라클님은 자본가의 권리와 노동자의 권리가 충돌했을 때를 예로 들어 이야기했습니다. 권리와 권리가 부딪힐 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할 것이다라고. 

 

Q 어릴 때 선악의 기준을 정립하는 것 잘못된 것인가? 그리고 혹시 20대 이전에 니체 선악의 저편이나 짜라투스트라 같은 책을 읽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제가 요즘 20세 이하 고등학생들이 학종부 기재를 위해 니체 짜라투스트라를 읽는 상황을 말씀드리면서 고등학교 때 그렇게 급하게 읽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질문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선생님으로부터 윤리 기준을 배우고 나름의 가치기준을 세운 후에는 그것이 꼭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괜찮을 것 같은데 바탕도 기준도 없는 고등학교 때 이런 책을 읽는 것이 괜찮을까가 걱정되어서 사족을 붙였습니다.
연두님이 니체를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이런 부분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도 사실 니체를 처음 읽었을 때 보편적 선이 없고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충격적이고 저를 끌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등학교 때 니체를 접했다면 제 머리로는 아마 제대로 이해 못 하고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데미안을 읽은 후 절실한 것이 있어서 니체 짜라투스트라를 찾아서 읽었다는 널깊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 생각이 촌스럽게 느껴졌어요 ^^ 올리비아님 의견처럼 어릴 때부터 철학 강연을 하는 프랑스 사례를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3. 사랑을 가르친다, 벗을 가르친다


Q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도 친구를 창조해야 한다 왜 창조해야 할까요?

친구를 창조해야 한다는 말이 약간 반감이 들기도 하는데...

연두님 말씀처럼 한국에선 친구가 같은 반이어서, 혹은 동네에 살아서 자연스럽게 주어져있는 존재라는 말이 기억에 남네요. 그런 친구관계에 익숙한 제게는 창조라는 말이 어색했습니다. 행위의 동반자라면 행위 안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서 친구가 창조되는 게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도 하셨어요. 

모로님은 관계에서 서로 성장하는 거라서 '창조'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라고 말씀하셨어요.

어쨌든 가혹한 요소가 있다...이것이 진정한 우정이 맞을까요?

 

 Q 연민, 동정 / 동등 의식

올리비아님 페미니즘 세미나 예시를 들었어요. '남편이 아내를 보호하려고 한다' 그것은 동등한 의식이 아닌 것. 

소소님 해고노동자를 돕는 것은 건강한 가치가 아닌가하는 생각. 저도 동의합니다.  

별명 바뀌신 오골골님(?)은 거지를 돕는 것에 대해 이견을 주셨지요. 우리는 결론을 못 내렸습니다. 좀 더 고민해보는 걸로 해요.  

 

여전한 질문

Q 연민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일까. 구걸하는 80대 할머니를 돕는 것, 나쁜 것인가? 대안이 없는 경우 죽는 것보다 구걸하는 게 나은 게 아닌가? 

Q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앞으로 오게 될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그럴까요?

Q 꼭 위버멘쉬 되어야 하나?, 인간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다른 존재인 위버멘쉬가 되려는 것 그것이 현재의 삶을 만족스럽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면?

 

쓰면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했네요.
계속 기대해보겠습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금요일 작성 중에 토요일이 되었어요 죄송합니다 )

댓글목록

요고마고님의 댓글

요고마고

빠른거북이님의 다정한 기록들, 잘 읽었습니다.
니체세미나를 차분히 스케치하셨네요.
지난 순간들과 말들이 되살아나 즐겁습니다~!^^

요고마고님의 댓글

요고마고 댓글의 댓글

빈칸을 채우는 것도 좋지만 빈칸을 그대로 두고 견뎌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 같아요. 그런데 조바심 때문에 늘 빈칸을 메꿔버리게 되요. 중간중간 열어두신 빈칸들 또한 좋았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Q1. 연민에 대하여 :: 이 주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등장하는 물음입니다.
그러니 쉽게 결론으로 가지 말고, 물음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어요.
'연민'이야말로 '물음-문제 복합체'로 정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거든요!!

다만 니체가 연민이나 동정이라는 도덕감정에 대해 부정적 가치를 부여했던 것은,
그것이 연민의 대상을 약자적 상태에 머물게 하고
동시에 연민하는 사람조차 '건강'을 해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연민하는 자는 연민의 대상과 관련하여 자신의 우월함을 전제하거나,
반대로 연민하는 자는 연민의 대상과 동일시를 통해 약자의 감성으로 물들기 때문입니다.
어느 경우든 강자의 건강함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니체의 '강자 혹은 약자' 정의는 다른 사람과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니체는
강자는 긍정하는 자이며 능동적인 자(창조하는 자, 시작하는 자)이고,
약자는 부정하는 자이며 반동적인 자라고 말합니다.

Q2.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먼곳에 있는 사람과 앞으로 오게될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니체가 의미하는 바의 '이웃'은 누구이며, '먼곳에 있는 사람'이나 '앞으로 오게될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책의 맥락을 좀 보고 다시 말해야 겠군요^^

Q3. 위버멘쉬에 대하여 ::
이것 역시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란 누구인가가 먼저 정의되어야 겠지요. 빠른거북이의 말처럼,
'위버멘쉬-되기'가 자신의 삶을 불만족하게 한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되기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이해하는 위버멘쉬는 어떤 특별한 인간유형이 아니라, '자기극복으로 정의되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위버멘쉬는 결과로 주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과정으로 구성되는 존재입니다.

"네가 지금의 너 자신으로 남아있으려 하는 집착은 너를 계속 제약한다."_공각기동대
지금의 자기한계를 넘어서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내 안의 위버멘쉬와 결속하는 과정이며,
따라서 이 과정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참된 나와 만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위버멘쉬-되기'는 '참된 나-되기'로 번역해도 좋을 듯합니다.

인간적 제약을 넘어 새로운 생명으로 도약하는 영화 [공각기동대]는
인간의 자기극복을 철학적 과제로 삼았던 [니체의 기획]과 직접적으로 닿아있습니다. 니체는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몰락하는 존재이기 때문이고,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 인간으로서는 몰락해야 한다고 합니다.

빠른거북이님의 댓글

빠른거북이

요고마고님, 오라클님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치열하게 고민해보아요
실제 짜라투스트라 읽을 때 한번 더 토론할 기회가 있으니 기대됩니다 진심으로요...^^

미라클님의 댓글

미라클

빠른 거북이님의 알찬 후기 감사합니다 ^^
Q ‘우리 모두는 신의 살해자이다.’ 왜 니체는 신의 ‘죽음’에서 더 나아가 ‘살해’라는 표현을 쓰는가?
Q 신의 사인. 왜 죽었나?
 - 저는 빠른거북이님이 질문하실때까지 이 ‘죽음’과 ‘살해’의 차이점에 대해서 그냥 가볍게 넘겼어요. 근데 오늘 거북이님이 올리신 후기를 보면서, 죽음과 살해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신의 죽음은 신이 자신의 피조물이 추악하다는 사실 때문에, 즉 연민 때문에 죽는것이고, 신의 살해는 인간이 위버멘쉬로 변신하면서 인간의 ‘의지’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것같아요.
그래서 신의 사인은 2가지(연민,위버멘쉬) 모두 해당되지만, 연민은 그저 신의 수동적 실해(죽음)라면, 위버멘쉬의 등장은 신의 적극적 살해(죽음)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Q 112쪽 ‘가장 철저하게 살해하려고 하는 자는 웃는다는 것을.’ 여기서 웃음은 비웃음일까, 호탕한 웃음일까?
- 맑스는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두 번 반복된되는데, 어떤 역사가 희극으로 반복되고 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어진다고 했습니다. p112쪽의 차라투스트라의 웃음은 여기서 희극에 해당하는 것이겠죠. 차라투스트라는 웃음으로 신을 살해했고, 신의 부활조차 막아버렸습니다. 기존에 나를 형성했던 모든 가치들을 부숴버렸고, 다시는 내 앞에 오지 못하게 한 것이죠. 그런 무의미한 것들 앞에서 우리가 웃는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더 이상 기존의 가치들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면, 호탕한 웃음이 아닐까요? 고병권쌤도 책에서, ‘더 이상 초월적인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환하게 웃을때, 신의 죽음이 찾아오며, 그때의 죽음은 인간에겐 가장 영예로운 일이 될 것이다.(p113)’라고 하셨어요.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환하게 웃는것은 비웃는 것은 아닐꺼 같아요.

Q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순간 멈칫했었어요. 나한테 소중한 가치가 있었던가? 라고요. 소중한 가치라고 하면 왠지 굳건한 약속, 영원해야한 할 것 같은, 그런것들이 먼저 떠올랐거든요. (다이아몬드도. 하하)
다시 생각해보니, 저한테는 소중한 가치는 엄청 많은것 같아요. 근데 그게 지속적인게 아니라, 순간 순간 바뀌는 것 같아요. 어제, 오늘은 친구와의 만남이 있었기에, ‘친구’가 가장 소중한 가치였어요. 내일은 가족과의 시간이 가장 소중한 가치이구요. 하지만 저녁에는 물론 니체세미나가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보면, 어쩌면 ‘순간’그리고 ‘지금’이 저한테는 가장 소중한 가치일 수도 있겠네요 ~

소소님의 댓글

소소

빠른 거북님의 후기를 읽다보니 휘발됐던 이야기들이 머리에 속속 들어 오네요~~ ^^
또한, 답을 찾고 결과를 정리하기 보다는 계속 질문하고 기록하는 과정이 후기의 중요한 의미라는 것을 빠른 거북이님의 후기를 통해 배우게 되었네요!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질문들이 제 삶에서 계속 맴돌기 바랄 뿐 입니다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저도요! 소소님의 기록이 그날의 후끈했던 열기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
계속해서 질문하게 하는 힘이 니체에겐 있고, 고병권샘도 그 점을 매우 중요하게 보신다고 생각해요.
니체 세미나는 질문을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힘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것 같아요.
정답과 오답이 모두 사라진, 질문만 남은 그 곳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할 것인지.
함께 하는 여정이라 벌써부터 좀 든든합니다. ^^

엇결과 순결님의 댓글

엇결과 순결

후기를 통해 못다했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동정과 연민에 대하여
  - 거북님의 해고노동자를 돕는 사례를 보며 느낀 건데요, 해고노동자를 돕는 행위의 순수한 동기가 동지 의식에서
    나온 거라면 충분히 친구를 만들기 위한 행동으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행동으로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 금번 세미나를 통해 발견한 것은 니체에게는 순간의 지배적인 감정이 무엇인가가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입니다
    이 점에서 니체가 자신을 가장 위해한 심리학자이기도 하다고 한 것이 아닌가.....네이버 지식백과를 보니 일부 의견은 니체를
    심지어 심리학자에 불과할 뿐 철학자가 아니라고 까지 폄하하는 글도 있더군요.^^(저는 동의할 수 없지만요.)
2.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앞으로 오게 될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그럴까요? ​라고
    거북님이 남겨주신 멘트에 대하여.
  - 지난 주 제가 발제했을 때, 꼭 다뤄보고 싶었던 주제인데요. 시간상 못해서 여기서 해봅니다.
  - 저는 이번에 책을 읽으며, 처음 읽었을 때와 다른 해석을 한 부분이 여기입니다.
    처음에는 더 먼 곳에 있는 이웃, 훗날 올 이웃을 단지 장소적으로 먼 곳, 시간적으로 언젠가 다가올 이웃 정도로만
    이해했었는데요.
  - 이번에 불현듯 스친 생각은......세미나를 통해 느낀 것이기도 한것은.
    '먼 곳의 이웃'은 관념적인 이웃, 즉 동성애자, 낙태주의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적이 아닌가 했습니다.
    우리는 나를 잘 알고 나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이웃들에 대해서는 무한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생각이 다르고
    행태와 습속이 다른 이들은 그저 멀게만 느끼고 더 나아가 몰이해에서 비롯된 공격 성향까지 나타냅니다.
    니체는 진정한 사랑이란 너희에게 먼 곳에 있는 그들까지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라고 일갈하는 듯 합니다.
  - '먼 훗날 찾아올 이웃'은 요즘들어 특히 실감하고 있는 것인데요.
    세대를 건너 뛰어 접촉하게 될 다음 세대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했습니다.
    요즘들어 개인적으로 사회 전반의 꼰대 의식에 대해 매우 비판적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내가 연장자, 선배, 직장 상사라는 이유만으로 훗날 찾아온 이웃들에게 강압적이고 훈계적이며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스스로 꼰대가 되기도 하고요.
  - 남과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한 Perspective 속에 차이와 반복을 강조했던 들뢰즈와 같이 니체는 이미 이런 메시지를
    남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3. 추가하고 싶은 이야기
  - 몇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얻은 결론은 우리 세미나의 진정한 교재는 고병권씨의 '위험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는 우리의 생각을 이끌어 내는 도구일 뿐 진정한 교재는 우리 삶속의 니체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 우리 모두는 각자가 나름 니체에 대한 관심 속에 살아왔고, 그것은 각자마다 텍스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좌가 아닌 세미나에 온 것은 생활 속에서의 니체적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더이상 자구 해석이 아니라 삶속에 실천하고픈 욕구와 그 어려움의 경험들)
    그 어려움을 서로가 경험담으로 주고 받을때 진정 니체가 말하는 스스로 창조하는 삶에 더욱 가까워 진다고 생각합니다.
  - 니체 텍스트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니체 스스로가 단일한 Perspective를 거부했는데, 그의 텍스트가 정답을
    가르키고 있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동일한 인물 니체를 자신의 철학적 모티브라고 주장하면서도, 하이데거를 데리다가
    공격하고, 그런 하이데거를 니체 해석의 중요한 모티브 제공자로 추켜세우는 사르트르까지.....우리는 저 위대한 철학자들도
    다양한 해석을 내리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물며 철학에 아마추어인 우리들이 정답을 알기란 어려운 거겠지요.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정답엔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각자의 해석이 각자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그것이 니체적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모임의
    진짜 이유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몇시간 후면 성탄절에 니체를 만나는 특이한 경험이 있겠군요.
세미나에서 뵙겠습니다.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2. 아. 저도 이웃에 대한 이야기 세미나 이후에도 오래 남았습니다. 좀 더 얘기 나누고 싶기도 했구요.
엇결과 순결님 말씀 대체로 동의해요.
'먼 곳의 사람'은 언제나 다른 이웃에 의해 이해된 적 없는 이웃으로,
나의, 우리의 도덕을 보편적 도덕이라 믿고, 보편적 선이 존재한다고 믿을 때
항상 배제될 위험에 처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약자, 소수자일 수도 있고, 정말 이해된 적 없는 자, 가령 무슬림이나 북한 사람일 수도 있겠고요.

'앞으로 오게 될 사람'은 말씀하신 것처럼 다음 세대를 담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제게 좀 다르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저는 '앞으로 오게 될 사람'은 기존 가치의 해체와 함께 파괴되거나 몰락한 나 이후의 나, 그리고 내가 창조하는 친구와 같은 자들을
적극적으로 부르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버멘쉬가 끊임없이 자기극복하는 존재, 항상 생성하는 자라면
'앞으로 오게 될 사람'은 자기극복 이후의 나,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새로운 나이기도 하겠죠!
끊임없이 나를 새롭게 만들고, 그리고 그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끝없는 생성과 분열을 얘기했던 들뢰즈가 생각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만, 여튼
그것이 숭고한 사랑이라고 니체는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3. 저도 니체적 삶에 관해 고민하는 세미나 회원들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가끔 나누며, 니체 세미나가 더욱 강도높은 장이 되고 있고요.

함께 텍스트를 읽어가며 서로 다른 해석과 관점을 나누더라도,
니체 텍스트가 정답이 아니고, 그가 정답을 가리키지 않더라도,
그 맥락과 핵심을 오독하지 않게 주의하며 짚어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답이 없으니, 각자 나름대로 해석하면 되는 것은 아닐 거라고.
그게 제가 세미나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거든요.

빠른거북이님의 댓글

빠른거북이

미라클님, 살해와 죽음에 대한 제 문제제기 의도를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저는 살해라는 표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거든요. 소소님, 이런 후기 괜찮을까? 생각했는데 지지해주셔서 든든합니다. 엇결님 '이웃'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되네요. 다른 해석, 좋습니다 ^^

연두님의 댓글

연두

아주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았던 만큼 세미나가 흥미롭게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엇결과 순결님이 발제를 잘해주셔서 무척 도움이 되었습니다.

빠른거북이님도 그날의 기록을 잘 남겨주셔서, 질문들을 더 붙들고 있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날 죽음과 살해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혼자 책을 읽을 땐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이고, 세미나 하면서 또 후기와 댓글을 읽으며 더 정리가 됩니다.
저도 미라클님이 정리에 동의해요.

성탄절에 못 갔지만, 다음 세미나 기대되네요!

올리비아님의 댓글

올리비아

연말에 정신 없어 이제 후기를 봤어요 ~~
꼼꼼하고 생기 넘치는 빠른거북님의 후기도 대단하고,,, 댓글들도 .. 와우 ~~
다들 정말 열심이 공부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멋쩌요 ~~
저도 자극도 되고 생각도 많아 지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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