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발제] 위험한 책 :: 2부 5~8장
빠른거북이
/ 2017-12-23
/ 조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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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가 왜 크리스마스에 발제한다고 해서 연휴에 이러고 있을까요.
다들 즐겁게 놀 이브까지 이걸 붙잡고 씨름하고 싶지는 않아서 오늘 두 번 읽었어요.
2부
5장 신체야 말로 큰 이성이다
서구의 전통에서 신체는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 철학자들은 정신이나 영혼만이 참된 진리를 소유한다고 말하고, 성직자들은 그것들만이 불멸해서 천국에 이른다고 강론한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
영혼(정신)과 신체 이원론적 사고 - 플라톤, 데카르트 등.프로테스탄트에 이르러서는 부부간의 성교에서도 쾌락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
자아가 아니라 자기다
형제들이여, 너희들이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 역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장난감에 불과하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에게 신체는 영혼이나 정신보다 큰 개념이다. 156쪽.
가령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김래원 목소리를 듣고 가슴이 떨린다면 이것은 나의 자유의지가 개입된 것인가?
니체는 말한다.
그것은 "두 개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커다란 제3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서광). 차라투스트라는 그 제3의 것을 신체라 하고, 자아와 구별하여 자기라고 부른다. 157쪽. → Q 자아는 자기와 어떻게 다른가? 니체는 말한다. 신체가 바로 자기라고. 그리고 자아는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자아는 자기의 행동과 실천이 있은 후 형성된 자기에 대한 어떤 관념일 뿐이다. 158쪽
언어적 습관
자아같은 원인을 따지는 이유는 언어적 습관 때문. eg) 비가 내린다
창백한 범죄자
살해범 판관이 묻는다 "왜 살해했는가?"
니체는 살해가 광기때문이고 그것은 병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재판관은 의도가 있어야 죄를 성립시키므로 자꾸만 의도를 묻는다.
신체는 생성하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신체는 정신의 상대물인 육신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이나 육신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다. 그는 정신이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신체의 기호로서 다시 확정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신체는 무엇보다도 역동적인 복합성으로 정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체란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힘들의 복합체에 다름 아니다.
참고 - 니체의 사고와 현대 뇌과학은 거의 일치함
1. 신체 인식은 '다중 감각 통합'을 거쳐 생긴다. 다시 말해 뇌는 신체로부터 받는 세 가지 감각 정보, 시각·촉각·고유감각(공간을 점하는 팔다리 위치에 관한) 정보를 통합한다. 시각 정보는 후두엽에서, 촉각 정보와 고유감각 정보는 체감각피질에서 처리된 뒤, 상두정소엽(위마루소엽)에서 결합되어 신체도식이나 신체상 등으로 지칭되는 신체의 역동적인 표상을 만들어낸다.
이 표상은 신체에 대한 심상이 되고, 우리가 자기 신체를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 심상을 통해서다. 신체 인식이 교란되면 뇌에서 그 표상이 바뀌고, 자아 감각(자기감)에 심각한 변화가 올 수 있다. -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뇌과학지식 50 中, 모헤브 코스탄디, 반니, 15쪽
2. 특정한 조건이 갖추었을 때 일어나는 파도처럼, 자아는 실체도 허상도 아닌 현상일 뿐이다.- 송민령의 놔과학연구소, 송민령, 동아시아, 170쪽.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역시 결과론적 표현)
여기서 질문
Q 니체는 신체 작용이 '정신'이란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 시대에. 이건 니체에게 물어야겠죠?
6. 노동이 아니라 전쟁을 권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전쟁을 하라고 가르친다. 차라투스트라의 '전쟁'을 '총쏘는 전쟁' 수준으로 격하시키지 않도록 주의하자!
<개미와 베짱이> 우화가 가르치려는 근면의 중요성. 그러나 성공한 개미들이 근면으로 성공했을까?
TV에 출현하지 않는 개미들, 즉 기적을 체험 못한 대부분의 개미들은 불행히도 우화 속 주인공과는 많이 다르다.
열심히 일만 하느라 예술적 감성도 기를 틈이 없어, 좋은 그림을 봐도 그것이 왜 좋은지 알지 못하고, 왜 훌륭한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개미들 노동의 숭고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더 많은 노동이 더 큰 부를 가져올 것이라고 강조한다.
노동에 대한 허영심과 수치심
노동하지 않을 수 없게 내몰면서도 노동하는 것을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물인 양, 심지어는 대단한 권리인 양 떠드는 현실을 니체는 '허깨비'이자 '환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아주 수치스러워 하면서도 사실상 '임금 노예'인 자신의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노동을 찬미하는 일에 쉽게 동의한다는 것이다.우리가 고대 노예보다 더 가지고 있는 건 바로 '허영심'이다.
노동이 아니라 전쟁이다
노동가치설 : 니체는 어떤 행동의 가치를 거기에 들인 시간이나 열정 따위로 환산해서 계산사려는 시도 자체가 문제라고 여긴다.
노동으로 인한 심신의 상실도 문제지만 더욱 큰 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할 능력을 상실한 점. 그 가치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자기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고 '타자의 가치'를 생산했다는 점이다. 178쪽.
어떤 활동이 자기 자신을 자유인으로 만들어주기보다 노예로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활동을 빨리 멈추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노동을 거부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노동을 거부하자고 하면 어떤 이들은 '우리 모두 게을러지자는 이야기냐'고 항변한다. 하지만 게으름이나 권태야말로 노동 사회의 이면이다.
가치 창조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고 해도 '너희 모두는 너희들의 사상을 위한 전쟁에 나서야 한다.'
Q 허영심?이란 표현은 적확한 표현이 맞나?
Q 전쟁해야할 만한 노동은 어떤 것인가.
Q고병권의 책에서 ''어떻게 노동 없는 사회가 가능하겠느냐'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노동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주장과 그것을 찬미해야한다는 주장은 전혀 별개다.'' 왜 니체와 고병권은 노동=노예로만 보려고 할까. 이것은 노동을 일로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철학자 니체나 고병권의 피상적인 노동 이해로 인한 말장난이 아닐까.
대부분의 노동이 노예상태인 것, 전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일부 노동은 자아창조나 공동의가치창조에 기여하는 노동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고민은 어쩌면 내가 '행복한 노예' 상태이므로 내 노동에 대해 항변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7.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조심하라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국가가 전쟁을 종식할 필요성에서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무서운 힘을 가진 괴물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홉스의 놀라운 점은 국가 형성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악의 축'을 막겠다며 전쟁을 일으키는 미국에서 보듯 '전쟁을 막기 위한'다는 명목은 핑계로 보인다.
무시무시한 괴물의 냉혹한 사기
국가의 출현이야말로 민족과 대중의 죽음이다.
자유보다는 복종을, 생명보다는 죽음을 부추기는데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진심어린 봉사를 끌어내는 존재, 그것이 국가다. 186쪽.
전쟁을 막는 국가, 국가를 막는 전쟁
니체는 전쟁을 막기는커녕 전쟁을 재생산하려 했던 고대그리스국가에 대해 말한다. '천진난만한 야만성'
모든 재능은 싸우면서 만개해야 한다. 농부는 농부와 경쟁하고, 목수는 목수와 경쟁하며, ...시기와 질투는 경쟁을 파괴하려는 충동에서 나오는 것.
그리스인들이 두려워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그것을 가로막는 초월적 존재의 출현.
중요한 것은 챔피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전쟁 본능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의 "존중할 만한 적을 찾으라"는 말도 사실은 함께 경쟁할 친구를 찾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아곤]이 전쟁의 참된 의미다.
지난시간 '강자', '귀족'에 대한 재정의에 이어 이번엔 '전쟁'에 대한 재정의.
Q "어느 누구도 최강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최강자는 경쟁에서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요? 여기서 최강자의 의미는 넘사벽이라 좌절을 주는 존재란 의미일까요?
8.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
여성들에겐 니체를 읽는 게 꽤나 곤혹스러운 일이리라.
수수께끼
혹시 니체가 여성을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 우리가 니체의 '여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194쪽
Q 늙은 여자와 채찍.(??) - 살로메와 함께 찍은 사진의 채찍과는 의미가 다르게 읽힌다. 채찍은 204쪽 인용에 한 번 더 나온다.
바우보
19세기 페미니스트는 남성이 되고 싶었다고 보여진다. 그들은 '거세된 여성'으로 기준을 남성으로 본 페미니스트다. 니체는 이들을 비판한다.
진리, 삶, 영원회귀를 여자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잡힐 듯 하지만 항상 조금씩 미끄러져 나가는 진리와도 같다. 200쪽.
늙은 여인은 임신이 어려운, 젊은 여인은 임신이 가능한 존재.
늙은 여인은 삶의 피상성, 표면성을 그 본질이라 믿는다. 때문에 그녀가 볼 때 심오함이란 이 진리를 가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즐거운 지식)
아마도 여성들이 화장을 잘 하는 것은 무엇보다 표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9쪽.
니체는 진리를 바우보(음란한 여신, 여성의 생식기를 신격화)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성을 '거리' 자체라고 본다. 201쪽. 이 '거리'도 '채찍'처럼 곱씹어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아리아드네
자궁에서 강조될 것은 결핍이나 공허가 아니라 생산이나 창조이다.
생산능력이 없는 늙은 여인, 생산능력이 있는 젊은 여인으로 구분.
"무엇이 내 삶을 유지시키는가? 그것은 임신이었다."
젊은 여인은 삶이다. 203쪽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고, 유혹하는 존재.
(이런 비유가 싫어요. 니체 같은 철학자가 왜 이런 비유를 쓰는지...)
파괴는 창조를 필요로 하고, 하나의 창조는 다음의 창조를 필요로 한다. ... 한번 더 라고 말하는 영원성의 여인이 필요한 것이다. 아리아드네이다. 206쪽
그에게 여성은 영원한 생성을 의미할 뿐이다.
--- 아래 부분은 참고로 ---
저는 평소 니체의 여자에 대한 비유나 여자에 대한 서술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 니체에 대해 저보다 오래 공부하셔서 많이 아실 고병권샘이 이를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네요. 성적 감수성의 차이인지 아니면 제가 아직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병권샘은 니체는 여자를 진리나 삶에 대한 은유로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자의 자궁을 영원회귀의 가능성과 위버멘쉬를 낳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니체가 비판하는 것은 당대의 페미니스트라고 하면서 남성성을 따라하는 '거세된 여성'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니체의 여성관을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니체의 '여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아닙니다. 대체로 그 정도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니체는 때론 여성성을 찬양하고(마치 여신처럼 찬양해서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때론 모욕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또한 '여성성'을 너무 전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여성'을 그가 생각하는 '여성'의 틀 안에 가두고 있습니다. 솔직히 여성성에 대한 은유가 너무 유치하고, 모욕적입니다. 채찍을 준비하라는 것도 저는 아직 이해하기 힘듭니다. 저만 이러한 생각을 하는 걸까 자료를 찾아보니 김애령이란 철학자가 <여성, 타자의 은유>라는 책에서 니체의 은유를 비판하고 있어서 나만 '불편'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책의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자세한 것은 세미나 때 토론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실제 니체의 저술을 읽어가면서 토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악의 저편>의 '여성을 위한 일곱가지 잠언' 중 "검은 옷을 입고 침묵을 지킬 때 어떤 여성도 영리하게 보인다"라든지 "말은 짧게, 의미는 길게-이것은 암탕나귀가 중의해야 할 미끄러운 빙판길이다!"와 같은 언급은, 니체를 '여성 혐오자'로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증거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실려 있는, 반복적으로 인용되어 온 아포리즘의 한 구절인 "여자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회초리를 잊지말라!"나 "여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의 해결책을 갖고 있으니, 임신이 바로 그것이다"와 같은 언급들은 또 어떠한가? 이러한 언급들은 전통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사유, 주체 중심의 동일성 철학을 비판하면서 "모든 가치의 가치 전환"을 시도하는 니체로부터 사유의 무기를 발견하고자 했던 여성 철학자들에게 당혹감마저 안겨 준다.
특히 당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주장이나 여성해방운동, 또 그것을 주장했던 여성운동가들에 대한 니체의 언급은 불편함을 야기한다. 여성의 자립 욕구를 니체는 여성다움, 진정한 여성성의 포기이자 타락으로 묘사한다.
'우리 남성들은 여성이 계몽에 의해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계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교회가 '여성은 교회 안에서 침묵해야만 한다!'고 선언했을 때, 이는 남성이 여성을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이었다. 나폴레옹이 너무 말이 많은 드 스탈 부인에게 "여성은 정치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고 시사햇을 때, 이는 여성의 이익을 위해 일어난 일이었다. - 그리고 오늘날 "여성은 여성에 대해 침묵해야만 한다!"고 여성에게 소리치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 여성의 친구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악의 저편, 니체, 224쪽)
- 여성, 타자의 은유 중, 김애령, 그린비, 113~1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