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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후기] 들풀 :: 마지막 (12/20) +5
삼월 / 2017-12-25 / 조회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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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의 겉표지에는 이런 수식어가 붙어있다. 루쉰의 ‘피와 살’을 가장 많이 드러낸 작품집. 다른 것도 아니고, ‘피와 살’이라니. 4주 동안 이 얇은 한 권의 책에 담긴 짧은 글들을 꼼꼼하게 읽어온 우리 세미나원들은 그 ‘피와 살’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대체 루쉰은 왜 이 짧은 몇 편의 글들에 자신의 ‘피와 살’을 담아야만 했을까? 그 당시 루쉰의 심경이 궁금해지기도 했었다. 이번 시간에는 《들풀》의 대단원에 자리한 다섯 편의 글들을 집중해서 읽었다. 읽으면서 앞서 읽었던 글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1924년 9월 15일에 시작하여 1926년 4월 10일에 이르는 동안 루쉰이 절망과 어둠과 인간 사이 자신이 가야할 길과 싸움에 대해 고민하던 흔적들을 발견했다. 그 흔적들을 1927년 4월 26일에 루쉰은 떠나보낸다. ‘가거라, 들풀이여, 나의 머리말과 함께!’

 

루쉰의 글들에는 어떤 전사의 이미지가 반복하여 나타난다. 야만인의 투창을 맨몸에 든 전사. <이러한 전사>의 이미지는 <빛바랜 핏자국 속에서>에 등장하는 맹사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자선가, 학자, 문인, 원로, 청년, 아인(고상한 사람), 군자와 같은 좋은 이름으로 수놓은 깃발 아래 학문, 도덕, 국수, 민의, 논리, 공의, 동방문명과 같은 좋은 무늬를 수놓은 외투를 입은 자들의 싸움. 피 한 방울 없이 인사로만 사람을 죽이는 이데올로기의 싸움. 그 싸움 한 가운데서 전사는 좋은 이름도, 무늬도 없이 투창을 든다. 무물의 진 속에서 늙고, 죽고, 주위가 태평해진 뒤에도 전사는 투창을 든다. 전사는 맹사로 변모하여 조물주와 대결한다. 폐허와 무덤 위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인류를 멸절할 용기가 없는 비겁한 조물주와 맹사가 대결한다. 싸움이 끝나면 조물주의 백성들은 소생하거나, 소멸할 것이다.

 

루쉰이 현실에서 지향하는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총명한 사람, 바보, 종>과 같은 글을 참고할 수 있다. 종의 신세한탄을 들은 총명한 사람과 바보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총명한 사람은 종의 미래를 격려하며,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준다. 바보는 호통을 치며, 당장 앞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려 한다. 종은 창문을 뚫어주겠다며 자신의 집 흙벽을 부수는 바보를 강도로 몰아버린다. 종의 집에 창문을 내는 일은 《외침》 서문에 등장한 철의 방을 부수는 일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종은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하소연과 주인의 칭찬, 부질없는 희망에만 의지해 살아간다. 루쉰의 싸움은 철의 방의 벽을 부수어 창문을 내는 것처럼 거칠고, 무모하고, 한편으로는 절박했다. 변화가 곧 생존의 길이며, 희망이 절망만큼 허망하다는 사실을 루쉰은 알고 있었다.

 

루쉰이 미래에 대해 품는 기대는 막연한 희망이나 절망으로부터의 도피와는 거리가 멀다. 루쉰은 자신을 ‘병든 잎’이라 칭한다. 푸르고 싱싱한 기운을 가진 잎이 아니라, 그 잎들 사이에서 병들어 말라가는 잎. 까맣게 테를 두른 작은 구멍이 눈알처럼 잎 가운데 박혀 기괴하게 반짝이는 그 잎은 이미 누군가의 책갈피가 되어 말라가고 있다. 베이징 하늘에 폭격준비를 마친 비행기 소리가 들려올 때 루쉰은, 덮쳐오는 죽음 앞에서 젊은이들의 원고를 정리한다. 젊은이들의 거친 영혼이 할퀸 자국을 숨김없이 내보일 때, 루쉰은 자신이 아직 인간 세상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원고를 정리하다 잠깐 잠이 들고 다시 깨어났을 때, 루쉰은 몸 바깥에 어스름만 남았다고 말한다. <희망>에서 몸 바깥의 청춘에 품었던 희망이 스러졌을 때, 몸소 어둔 밤에 육박하겠다던 루쉰. 몸소 어둔 밤에 육박하여 어둔 밤이 존재하지 않음을 느끼고, 절망도 희망만큼 허망함을 알게 되었던 루쉰. 그는 이제 절망도, 희망도, 허망도 아닌, 살아있음 그 자체만을 느낀다. 눈앞에 닥쳐온 죽음이 ‘생’을 이토록 깊게 만들었다.

 

《들풀》 속 루쉰의 글들에는 섣부른 희망이나 싸움을 북돋우는 어떤 말도 없다. 음습하고, 황량하고, 적막하며, 요상하기 짝이 없는, 사막보다 더한 현실의 조건들이 끝없이 비틀린 채로 나열된다. 그 현실에서 착한 백성은 종이 되어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사나 맹사는 바보 취급을 받으며, 백성들을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이들이 오히려 총명한 사람으로 칭송받는다. 명분도, 무기도 없이 싸움에 뛰어드는 루쉰은 무성한 이파리들 가운데 기괴하게 반짝이는 병든 잎과 같다. 그러나 루쉰은 음습하면서도 부패하지 않은 사람이다. 병든 잎은 마른 뒤에도 여전히 기괴한 반짝임을 잃지 않았다. 루쉰은 어둠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몸소 공허 속 어둔 밤을 향해 육박해 가는 사람이다. 끝없는 분투와 육박 속에서 맨손에 투창을 들고 싸운 뒤에야 절망 역시 허망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다. 그렇게 싸우지 않고 얻어낸 진실은, 총명한 사람이 건네는 위로만큼이나 무력하다. 고통스러워 본 자가 건네는 위로와 격려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진정 싸울 힘을 내게 한다. 죽음이 생을 깊게 만드는 것처럼 때로는 고통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루쉰을 함께 읽었던 지난 8주의 시간, 그 시간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이 어쩐지 나를 더 깊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지도 않고, 있는 이야기를 해석하고 싶지도 않다는 어떤 의지가 늘 작동하고 있어서인지
루쉰의 글들을 하나의 새로운 스타일의 글로 만날 수 있어서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물론 글 안에서 육박했던(?) 어떤 정서들도 감히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고요.
이후로도 계속 루쉰의 글들과 함께 할 것 같은 예감입니다.

같이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댓글의 댓글

맞아요. 같이 읽어서 더 좋았지요.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지도 않고, 해석하고 싶지도 않다는 의지가 뭔지 궁금해요.
저는 의지는 있으나, 역량이 부족해서 못 하는지라...
왜 그런 의지를 갖는 건지 하는 문제도요. 듣고 싶습니다!

연두님의 댓글

연두

루쉰 세미나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자연님의 댓글

자연

새해, 매일 "밝은 창에 깨끗한 책상"의 마음으로.....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뒤늦게...)
한 해를 마무리하며 루쉰의 글을 함께 읽는 건 매우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세심한 정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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