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공백] 시즌5_1205 후기_보들레르
희음
/ 2017-12-10
/ 조회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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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
이따금씩 어렴풋한 말소리 새어나오고:
인간이 그곳 상징의 숲을 지나가면,
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본다.
밤처럼 그리고 빛처럼 끝없이 넓고
어둡고 깊은 통합 속에
긴 메아리 멀리서 어우러지듯,
향기와 색채와 소리 서로 화답한다.
어린애 살결처럼 싱싱하고,
오보에처럼 부드럽고, 초원처럼 푸른 향기들이 있고,
- 또 다른, 썩었지만 기세등등한 풍요한 향기들이 있어,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으로 확산되어,
정신과 관능의 환희를 노래한다.
이 시 <Correspondances>는 ‘만물조응’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시간에 대한 노래. 이 시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나오는 시들 중 드물게 희망이나 이상을 노래한 시로서, 보들레르 시작의 초창기에 위치하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창작 작업에 있어서도, 그리고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에 있어서도 아직은 우울의 그늘이 덜 드리워진, 환한 청년의 시기에 씌어진 시이죠. 1연에는 특히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아우라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구절이라며 가리키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그것은 ‘인간이 그곳 상징의 숲을 지나가면,/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본다.’는 두 행입니다.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사물 역시 바라보는 자에게 시선을 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아우라의 순간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만물조응의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3연의 마지막 연은 황현산 번역에서 좀더 정확하게 표현됩니다. ‘썩고 풍성하고 진동하는 또 다른 향기들이 있어’라고. 그 썩은 것들을 대표하는 향은 다음 연에 나옵니다.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이 되어서 말이죠. 이것들은 썩고 발효된 것들의 향입니다. 살아있는 것, 통상적으로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생생한 것들보다 오히려 죽음과 잿빛의 사물 혹은 자연물들이 무한한 기쁨으로 우리를 발산하게 하는 데 더 크게 기여한다고 보들레르는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과정 또한 자연의 선물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고요.
전생
나는 오랫동안 널따란 회랑 아래 살았다,
바다의 태양은 수천의 불빛으로 그곳을 물들였고,
곧고 장엄한 큰 기둥들로
저녁이면 그곳이 마치 현무암 동굴 같았다.
물결은 하늘의 그림자를 바다 위에 떠돌게 하고,
그 풍부한 음악의 전능한 화음을
내 눈에 비치는 석양빛 속에
엄숙하고 신비롭게 섞어놓았다.
그곳이 바로 내가 살던 곳, 고요한 쾌락 속에서,
창공과 물결과 찬란한 빛 가운데서
온통 향기 배어 있는 발가벗은 노예들에 둘러싸여,
그들은 종려 잎으로 내 이마를 식혀주었고,
그들의 유일한 일은 내 마음 괴롭히는
고통스런 비밀을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었다.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에는 이것이 ‘이상’에서 ‘우울’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시가 아닌가 했습니다. 이상으로 그리는 세계와 굴러 떨어진 세계 사이에서 아직 꿈꾸고 있는 자의 노래로서요. 1, 2, 3연이 모두 시적 화자가 맛보았던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순간들의 경험으로 채워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4연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일은 내 마음 괴롭히는/고통스런 비밀을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 깊숙이에 있는 고통스런 비밀이란 무엇일까요. 이 행복도 머잖아 끝이 날 것이라 예감하는 일? 아니면, 다음 생에 해당하는 현생의 고통을 이미 알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고통? 그 고통이 무엇이든 간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편안하고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유일한 책무일 법한 노예들이 그들의 주인을 고통받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노예들은 시적 화자를 보좌하고 곁에 있으면서 고작 부채질 정도를 했을 뿐일 텐데. 이에 대한 유일한 힌트는 ‘향기’가 아닐까요. ‘향기 배어 있는’ 노예들이 그 ‘향기’로써 주인의 깊은 안쪽을 파고들면서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도 없이도 가능한 일입니다. 화자는 향기를 갖지 못한 채로 그 향기를 맡는 자로서만 그 자리에 있습니다. 끝없이 고통받으면서요. 이것을 앞의 <만물조응>이라는 시와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이미 어떠한 교감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요. 무한한 소외감에 시달리면서 자연과 구분되는 존재로 살아가야만 하는 자.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우울로 나아가는 매개적 작품이 아니라, 이미 우울의 한복판에 있는 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울
낮고 무거운 하늘이 뚜껑처럼
오랜 권태에 시달려 신음하는 정신을 내리누르고,
지평선 사방을 감싸며
밤보다 더 음침한 검은빛을 퍼붓는다;
땅은 축축한 토굴로 바뀌고,
거기서 희망은 박쥐처럼
겁먹은 날개를 이 벽 저 벽에 부딪히고,
썩은 천장에 제 머리 박아대며 날아간다;
끝없이 쏟아지는 빗발은
거대한 감옥의 쇠창살을 닮고,
소리 없는 더러운 거미떼가
우리 머리 속 깊은 곳에 그물을 친다,
그때 갑자기 종들 성나 펄쩍 뛰며
하늘을 향해 무섭게 울부짖는다,
악착같이 불편하기 시작하는
정처 없이 떠도는 망령들처럼,
그리하여 지금 긴 영구차가 북도 음악도 없이
조용히 내 영혼 속을 줄지어 가고, 희망은
패배하여 울며, 포악한 고뇌는 푹 숙인 내 머리 꼭대기에
검은 깃발을 깊숙이 꽂는다.
이 시는 우선 그 구성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1, 3, 5연은 정적 분위기가 지배적이고 어떤 짓누름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는 반면, 2, 4연은 동적 분위기를 가지며, 그 내용은 저항하는 자들의 몸부림으로 가득합니다. 그 짓누름은 ‘권태’나 ‘낮고 무거운 하늘’, ‘감옥의 쇠창살’처럼 느리고 무겁습니다. 그것은 또 ‘소리 없는 더러운 거미떼가/우리 머리 속 깊은 곳에 그물을’ 치는 것처럼 예고도 없이 찾아오고 그 끝을 기약할 수도 없을 만큼 지리멸렬하며, 우리가 손쓸 수 없을 정도의 집요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저항하기 위해 시인은 그에 합당할 만한 저돌적인 대리 표상들, 박쥐나 종(鐘), 그리고 망령들까지 불러들이지만 그들은 날개를 이 벽, 저 벽에 부딪히거나, 또 울부짖거나, 정처 없이 떠돌기만 할 뿐 그 소리 없고 무거운 공격에 맞설 만한 전술을 쓰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정해진 수순처럼 패배합니다. 머리 꼭대기에 검은 깃발이 꽂힌 채로 말입니다. 영구 행렬에 가담하는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보들레르는 이 시로써 우울의 극한을 선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의 내용과는 다르게 시의 에너지는 뜨거움으로 들끓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 시의 그로테스크한 묘사와 표현들 때문일 텐데요, 보들레르는 자신이 처한 시대 체감을, 그만의 방식으로 우울과 죽음 욕망이 농축된 펜 끝으로 밀고나가듯 써내려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나가는 어느 여인에게
거리는 내 주위에서 귀 아프게 아우성치고 있었다.
큰 키에 날씬한 한 여인이 상복을 차려입고
화사한 한 손으로 가에 꽃무늬 장식된
치맛자락 치켜 흔들며 장중한 고통에 쌓여 지나갔다;
그녀는 조각상 같은 다리하며 민첩하고 고상하다.
나는 마셨다, 넋 나간 사람처럼 몸을 떨며,
태풍 품은 납빛 하늘 같은 그녀 눈 속에서
매혹적인 감미로움과 목숨 앗아갈 듯한 즐거움을.
한 줄기 번갯불 ··· 그리고 어둠! - 그 눈빛이
순식간에 나를 되살리고 사라져버린 미인이여,
영원 속이 아니라면 그대를 다시 볼 수 없는가?
여기서 멀리 떨어진 저승에서나! 너무 늦었다! 결코 못 만나리!
그대 사라진 곳 내가 모르고, 내가 간 곳 그대 모르니,
오 나는 그대를 사랑했을 터인데, 오 그대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리!
지나가는 어느 여인은 말 그대로 화자의 곁을 그저 스쳐서 지나갔습니다. 한 번 스쳤을 뿐이고, 또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화자는 그녀를 사랑한다 말합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그 답은 ‘스쳐 지나간 것’ 그 자체에 있어 보입니다. 순간 스쳐 지나갔고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영원의 사랑으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라캉이 말하는 ‘대상 a’처럼 말이죠. 한 번 맛보았지만 영원히, 다시는 채워지지 않는 공백, 그래서 영원히 그 잃어버린 구멍과 장소를 그리게 된다는 그 악명 높은 ‘대상 a'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완벽한 사랑의 대상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그녀가 ’상복을 차려입‘은, 가까운 누군가를 죽음으로 떠나보내고 슬픔에 휩싸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으로 충만한 완벽한 대상인 것이죠. 그 여인을 바라보면서 성적 충동으로 가득해진 화자 또한 마치 죽음을 맛본 것처럼 말합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몸을 떨며’ ‘목숨 앗아갈 듯한 즐거움을’ ‘마셨다’고 합니다. ‘마셨다’라는 표현은 흡사 오르가즘의 순간에 대한 체험을 드러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죽음을 향한 ‘주이상스’의 시간 안에 있었던 듯합니다. 성적인 것과 죽음이 서로의 몸을 얽는 시간. 이 시를 일러, 치명적인 슬픔의 대상에게서 그 슬픔을 이어받은 자가 부르는 주이상스의 노래라 하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