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20171212 차이와 글쓰기 3부 발제문
이정훈
/ 2017-12-12
/ 조회 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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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몇 차례 수정을 거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발제 자료를 올립니다.
기원의 의미에 대한 설명 가능성
- 3부 에드몽 야베스와 책의 문제 읽기 -
이정훈
1. 독해 가능성과 독해 불가능성 : 대답 없는 물음으로 질문하면서 이해 가능한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질문에는 대답이 있다. 대답이 있기에 질문의 의미는 유효하다. 대답할 수 없는 것, 대답의 가능성 자체가 전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것을 묻겠다는 것, 질문 하겠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방식으로 행위 하고자 함이다.
‘질문’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 기원에 대한 물음을 다루어 보자면 데리다가 생각한 것과 달리 이 묻는다는 행위 자체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거나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가정한다면 이해 가능한 영역 또는 차원 내에서 대답이 주어지는 것 – 보다 거칠게 말하자면 주어져야 하는 것 – 이다. 대답이 부재하는 물음은 없으며, 세계에 대한 물음들이 모두 유효한 방식으로 던져지고 있다면, 그것 – ‘세계’ – 은 전적으로 이해가능한 것이다. 이해가능성, 독해가능성 밖의 세계는 없다. 데리다가 야베스에 관한 논고의 끝에서 언급한 것과 달리 어찌 보자면 ‘책’이 세계이다.
2. ‘존재론’과 ‘문법’의 구분 : 데리다가 근원적으로 독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언급하며 다루는 대상은 무엇인가? 데리다는 블랑쇼의 어떤 책에나 실려 있을 그의 물음을 인용하고는 그 말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최종 언급, 논고에서 최종 언급의 위상을 지니는 것을 던진다.
“블랑쇼가 “인간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능력이 있는가, 다시 말해 결국 인간은 문학을 할 능력이 있는가?”라고 쓸 때, 인생에 대한 어떤 관념에 기초할 때 대답은 두번에 한 번은 ‘능력 없음’ 일 것이다.” P.128.
블랑쇼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에 대한 것이며 이 능력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 또는 문학을 하는 것과 관계된다. 여기에 있는 말들을 바꾸어 말하면 ‘문학을 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데리다는 인간 능력에 대한 이 물음에 대하여 절반 정도의 가능성만을 인정한다. 할 수 있는 것,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문학을 할 수 있기도 하지만 반면에 그렇게 할 수 없기도 하다. 근원적으로 독해가 불가능한 것, 또는 이해가 불가능한 것 – ‘것들’이 아니라 ‘것’이겠다 - 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의 불가능성이 근원적이기 위해서는 이해가능한 것들의 총체라고 여겨지는 책의 바깥에서나 존립해야 할 것이다. 또는 책과는 아주 무관해야 할 것이다.
“근원적 독해 불가능성은 단순히 책의 내면에, 이성이나 로고스에 속하는 순간이 아니다. 근원적 독해 불가능성은 그러한 것들과 대칭적 관계를 이루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과 교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의 반대도 아니다.” P.127.
데리다의 생각은 존재가 근본적으로 책 밖에 있다는 견해를 통해서 존재론과 문법을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까지 나아간다. 문법으로만 그것이 있음의 이유를 충분하게 들지 못한다. 여기서 데리다가 말하는 문법이란 무엇인가? 어떠한 결함이 있기에 존재의 이유, 그것이 있음의 이유를 들기에 부족함이 있는 것일까?
“죽은 문장 구성법의 모든 뒤바뀜들이 기록되고, 언어에 대한 파롤의 모든 공격들, 문자 자체의 모든 문제화들이 기재되어 온 문법” P.127.
문법을 이상과 같이 정의한다면 기원에 대한 물음은 데리다가 말한 것과 같이 문법 그 전체와 무관한 의미를 지닌다.
“책의 기원에 관한 문제, 절대적인 질문, 가능한 모든 질문에 대한 질문, 요컨대 ‘하나님의 질문’은 결코 어느 책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P.128.
기원에 대해서는 말로써 이해할 수 없다. 그렇지만 기원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있다. 그것의 이유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유효한, 어떠한 효험을 낳을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기원에 대한 물음 자체를 불가능하다고 보는 데리다의 견해를 따르자면 존재함의 이유, 그것 – 세계 – 의 있음의 이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으며 그러니 침묵해야 할 것이다. 말하고자 시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기의 방식은 묻기이다. 극단으로 밀어붙여 말하자면 기원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할 수 없다. 아니 물어서도 안된다.
3. 질문 – ‘기원’의 의미에 대한 질문. 질문이란 무엇인가? 질문이란 말하기의 한가지 방식이다. 질문은 입으로 발화되거나 글로 쓰인다. 데리다는 유대 신화와 그것에 착안하여 소재를 마련한 야베스의 문학을 비평하면서 질문의 발생 가능 조건을 검토한다. 이렇고 저러한 조건들이 충족 되어야 질문이 생긴다. 또는 생길 수가 있다. 비평을 통하여 구성한 질문의 역사는 하나의 말에서 분열된 말들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글쓰기로 이행하는 가운데 내력의 어느 지점에서 일어났던 사건 덕분에 설명된다. 이행의 결과 “인간의 책은 질문의(질문하는) 책이 되었다.”(p.111) 유일신, 의미의 총체적인 체계와의 분리, 그로부터 소외되는 사건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의미는 해석된 결과물로서 남겨지는 것이 되었다. 의미는 처음부터 명백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또한 우리는 손쉽게,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서도 그것을 분명한 것으로 습득하지 못한다.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상상해도 무방할 만큼 커다란 고생 끝에 의미가 자명해 진다. 그리고 질문하기는 험난함을 무릅쓰면서까지 해석을 시도하기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놀라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열했다. 하나님은 말로서가 아니라 침묵을 지키면서, 침묵이 자신의 목소리와 기호들을 중단시키게 하면서, 계명판이 깨뜨려지게 방치하면서 그렇게 했다.” P.111.
세계는 해석을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이다. 한편 세계 이외에도 해석활동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대상으로 다루어 지거나 취급 되면서 인간과 관계 맺는 것이 있다. 바로 책이다. 이점에서 책과 세계는 유사하다. 세계를 책으로 비유하는 수사적인 기법을 어렵지 않게 수궁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또한 데리다의 논고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유사성이지만 책과 세계가 공유하는 또 다른 특성, 아주 근본적인 구조가 있다. 데리다 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책과 세계는 문장과 마찬가지로 다음에 부재를, 휴지를 둔다. 그러나 부재와 휴지는 다음 차례로만 따라오지는 않는다. 시작부터 부재 또는 휴지가 있었다. 책과 세계는 ‘시종(始終)’ 곧 처음과 끝을 지닌다. 처음과 끝 사이에서 차례와 순서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처음과 끝이라는 구조 내에서 배열된 차례와 순서에 따라서 세계는 해석된다. 시도 되지 않은 배열과 조작들이 있을 뿐이지 해석할 수 없는 것이란 없다. 설명할 수 없는 경우, 그러한 경우는 전혀 있을 수가 없다. 언어, 책, 세계, 이들이 시작과 끝을 가지는 한에서 소외됨은 우리의 존재적인 한계가 아니다. 인식적인 한계이다. 그리고 언어, 책, 세계에 있어서 시작과 끝이라는 구조는 본질적이다. 그것 밖의 무엇을 상상하기는 무의미하다. 기원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지금, 언어 내에서 반응할 대답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