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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후기] 1211(월)_위험한 책_1부_2~3장 +2
오라클 / 2017-12-15 / 조회 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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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 > 1부 > 2~3장 _후기  > 2017-1211(월)

 

1. 바그너-니체, 쇼펜하우어-니체로 표현되던 시기의 니체는 ‘진정한 니체’가 아닌가?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과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의존하던 시기를 거쳐, 다른 누구와 혼동될 수 없는 ‘특이한 존재’로 변신합니다. 니체의 변신을 들뢰즈는 [기성의 가치를 대변하던 낙타의 시기] ······> 기성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자의 시기] ······>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어린아이의 시기]로 구분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말하던 시기, 혹은 기성의 가치를 대변하던 시기의 니체는 니체의 철학에서 제외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런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있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 사상을 견지하는 경우 말입니다. 그러나 그 철학자가 보다 높은 경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한계를 극복하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위대한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철학이 아무리 탁월하다 하더라도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위대한 철학이라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처음부터 높은 경지, 처음부터 탁월한 철학으로 존재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만!)

 

니체의 철학은 자기변신과 자기극복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의 철학이란, 자기한계를 포함하는 자기극복의 모든 과정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바그너-니체, 쇼펜하우어-니체의 한계를 보는 동시에, 니체가 그러한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리하여 자신만의 위대한 철학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그너-니체, 차라투스트라-니체까지 포함하여 ‘각각의 니체’에 주목하기보다 ‘자기극복의 철학으로서 니체’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투스트라-니체뿐 아니라, 바그너-니체역시 ‘니체-철학’을 구성하는 기본성분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청년 니체와 마찬가지로 청년 맑스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니체는 무엇 때문에,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가-차라투스트라를 끌어들인 것일까?

 

먼저,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불행한 오류’인 도덕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차라투스트라가 누구보다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2가지 이유가 니체로 하여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고대 페르시아 예언가-차라투스트라를 부활시킨 이유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먼저, 니체는 ‘도덕을 창조’한 차라투스트라를 ‘도덕을 극복’하는 존재로 변신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즉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인간의 자기극복, 도덕의 자기극복이라는 중첩된 과정을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가 도덕적 세계의 탄생을 의미한다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적 세계의 몰락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의미한다. 따라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이자 자기극복이며 새로운 변신이라고 할 수 있다.” _[니체의 위험한 책] 

 

또한, 니체는 ‘정직’한 차라투스라를 통해 ‘정직’이 자기극복을 위한 최고의 덕, 최고의 무기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가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선과 악의 투쟁)을 형이상학(힘, 원인, 목적 자체)의 영역으로 전환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도덕을 창조한 그는 도덕의 오류를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었는데, “무엇보다 정직함에서 오는 도덕의 자기극복(도덕주의자가 자신의 반대편으로 자기를 극복하는 것), 그것이 내입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이다.” _[이 사람을 보라] 

 

3. 정직은 어떻게 자기극복의 무기가 될 수 있나?

 

이어서 정직이 어떻게 자기극복의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말하겠습니다. “삶은 필연적으로 자기극복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니체는 모든 사물은 내부에 자기극복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는데, 정직이야말로 자기극복을 위한 최고의 덕, 최고의 힘으로 칭찬했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도덕뿐 아니라 기독교나 예술, 학문, 역사 등 모든 경우에도 자기내부에 자기극복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 힘이 바로 정직이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정직을 ‘젊은 덕’이라고 칭찬하고 신을 찾는 자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과 [즐거운 지식]에서 기독교의 정직이 기독교의 신을 정복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정직한 진리의지는 신성화된 도덕의 발생과 유래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늘어질 것이며, 이때 자명하고 확고한 것처럼 보였던 도덕은 점차 몰락할 것이라는 거지요. 

 

기독교의 정직성은 어떻게 기독교의 몰락을 가져오는가? “그리스도교적 신을 이겨낸 것은, 그리스도교적 도덕성이다. 모든 위대한 것은 자기지양의 작용에 의해 몰락해간다. 생명의 법칙 속에 있는 필연적인 자기극복의 법칙이 이러한 것을 원한다. ‘그대 스스로 제정한 법에 복종하라’는 외침은 언제나 마지막으로 입법자 자신을 향하게 된다. 그와 같은 교의로서 그리스도교는 자기자신의 도덕에 의해 몰락했는데, 이제 도덕으로서의 그리스도교도 몰락할 수밖에 없다.” _[도덕의 계보]

 

루터나 바울은 ‘기독교의 자기극복’의 시도를 보여줍니다. ······ 루터는 성경을 반복해서 읽었고, 그러고는 성경에는 교황도 면죄부도 없다고 정직하게 말합니다. 또한 루터는 ‘고행을 통해 성자가 되는 길’에 진지하게 도전했고, 결국 그러한 고행이 자신의 활동적 영혼과 육체를 파괴할 것임을 깨닫습니다. “관상적 삶(고행)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만해왔다. 성자들은 우리 자신보다 가치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 니체가 ‘최초의 기독교인’이라고 부른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청년 시절 바울은 유대인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갈망하며 율법을 충실히 따르려 했지만,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육체에 대한 번민과 애당초 지킬 수 없는 것으로 내려진 율법에 대한 의혹 사이에서 괴로워합니다. 율법을 광적으로 숭배했지만 내적으로는 율법에 진저리가 난 그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 말합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박해하느냐?” 이제 바울은 율법이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박해하고 있다고 깨닫고, 율법 바깥에 서게 됩니다. 

 

4. [차라투스트라]가 만인을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를 위한 책도 아닌 이유는?

 

먼저, [차라투스트라]가 만인을 위해 던져졌고, 그런 의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할 책입니다. 동시에,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능력이 있는 자들만이 읽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의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아무나 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니체에게 능력은 권리와 같은 말입니다. 

 

니체는 독자를 선택하는 철학자입니다. 니체는 아무나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고 그렇게 소망하지도 않았으며, 정신의 친구인 ‘완벽한 독자’에게 읽히기를 바랐습니다. “나의 완벽한 독자를 상상해 보면, 그는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이다. 그는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다.” 니체가 독자를 선택하는 과정은 독자가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행위와 동시에 진행됩니다. 독자가 책을 읽는 과정이 니체가 독자를 선택하고 배제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위해서는 차라투스트라 만큼의 높은 긍지, 복수나 원한 따위를 모르는 긍정의 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5. 니체연구자와 니체주의자

 

이것은 니체를 읽는 태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니체연구자가 ‘무엇을 연구하느냐’에 대한 것이라면, 니체주의자는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니체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책을 정리하고 주석이나 다는 철학자들을 경멸했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누구의 생각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만드는 것이며, 누구의 삶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자는 니체를 읽지 않은 채 니체의 독자가 될 수 있으며, 니체를 지지하지 않은 채로 니체주의자가 될 수 있으며, 니체를 연구하지 않은 채 니체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6. 근대성의 극복과 니체 철학

흔히 니체를 맑스, 프로이트와 함께 근대성을 극복한 철학자로 이야기합니다. 니체 철학은 ‘근대 철학’라는 지반을 문제삼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먼저, 존재론의 영역에서 니체는 근대적 주체-단일한 자아의 이미지를 해체합니다. 근대적 주체를 선언한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단일한 자아를 표상하고 있다면, 니체는 힘들의 배치에 따라 수많은 자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하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자기를 생성시킨다”는 인식은, 여러번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아났던 디오니소스의 모습이고 영원회귀에 대한 암시입니다. 

 

또한, 인식론의 영역에서 니체는 객관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거부합니다. 근대적 인식론이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면, 니체는 객관적 진리의 존재 자체,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근대적 인식론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일치를 전제로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니체는 “진리는 무엇을 의지(진리의지)하는가? 어째서 진리가 필요한가?”라고 묻습니다. 나아가 니체는 ‘진리란 반박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오류’이며, 진리만큼이나 많은 '거짓이 우리 삶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댓글목록

엇결과 순결님의 댓글

엇결과 순결

오라클 님의 후기에 대해 몇가지 의견을 올리고자 합니다.(부족한 부분에 대해 다양한 의견 기대합니다.^^)

    상기 후기 3. 정직에 대한 설명 중, 루터와 바울을 기독교의 자기극복 사례로 제시해 주셨는데요.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두사람 모두 니체가 강력하게 비판했던 두 인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안티크리스트'를 부분 발췌독밖에 해본 경험 뿐이라서 아래 인용문이 전체 내용과 일치하는지는
    100% 확신하지는 않습니다.(그냥 문제 제기 정도로만 이해해 주셔요.)

    우선 안티크리스트 P267, 13줄) 사실상 그리스도교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스도교인'이라고, 2천년동안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리어 온 것은 한갓 심리적인 자리 오해에 불과하다. 모든 시대에 '신앙'은 루터를 예로 들어보더라도
    외투이자 구실이며 장막이었다. 그 배후에는 본능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같은 안티크리스트 P 271, 14줄) 바울은 그(그리스도)를 모든 면에서 특징짓는 라비적인 뻔뻔스러움으로 이런 이해 방식을,
    이런 외설과도 같은 이해 방식을 다음과 같이 논리화 시켰다.(중략), 바울 자신은 개인의 불멸을 보상이라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결국 니체는 사랑을 실천적 행동양식이자 목표로서 제시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희생된 것으로 그의 복음은 완결되었고,
    그 이후 바울에 의해 기독교가 신의 개념화, 율법의 형성과 전파 등 교조적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비판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거든요. 니체가 기독교를 사제의 권력의지화된 것이라고 공격할 때, 그 주요 공격대상이 바로 바울이라고까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최초의 기독교인이자, 최후의 기독교인으로 그리스도 자신을 꼽고 있는 것 아닌지요?

    한편 루터는 비로소 중세 신의 시대 장막을 걷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종교혁명을 일으켜놓고는 정작  그 순간에
    다시 신앞에 인간을 끌고 갔다고 니체는 안타까워 하고 비판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루터는 구약을 신약으로 천주교를 개신교로 대체시켰을 뿐이라고 비판했다는 거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학습의지'를 살아나게 하는 전투적이고 좋은 문제제기입니다.
니체가 루터와 바울에 대해 [안티크리스트]에서는 비판적 어조가 강한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 동일한 인물 루터와 바울에 대해 [서광]에서는 긍정적 어조가 함께 존재합니다.

제가 후기에 언급한 것은 니체가 [서광-아침놀]에서 루터와 바울에 대해 쓴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루터에 대한 것 :: [서광] 아포리즘88_위대한 자선가 루터
바울에 대한 것 :: [서광] 아포리즘68_최초의 기독교인
아포리즘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니체는 바울을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니체가 [서광]을 1881년에 썼고, [안티크리스트]를 1888년에 썼으니,
[서광]에 비해 [안티크리스트]의 관점이 좀더 성숙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하나의 사물이 하나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니체는 관점을 이동하면서 루터와 바울의 여러 측면을 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사물을 다양한 높이에서 바라보았던 니체적 퍼스펙티브perspective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대부분 비판적이지만, 긍정적인 관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례로 [선악의 저편] 아포리즘199에서 니체는 나폴레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무리동물 같은 유럽인에게 나폴레옹 같은 절대적 명령자의 출현은, 견딜 수 없는 압박에서 구제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끼친 영향의 역사야말로, 이 세기 전체가 가장 귀중한 인간에 이른 더 높은 행복의 역사이다."

독재자 나폴레옹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찬양은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니체가 어떤 퍼스펙티브에서 나폴레옹을 찬양하고 있는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니체가 찬양하는 나폴레옹은 무리동물의 복종본능을 뚫고 튀어나온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이며,
동물원에서 사육되다가 갑자기 맹수성이 살아난 동물들처럼 역사 속에서 우연하게 튀어나온 자입니다.

따라서 니체는 아래에서 나폴레옹(독재적 인간)을 보지 말고, 위에서 나폴레옹(주권적 인간)을 볼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나폴레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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