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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발제] 1218(월)_위험한 책_2부_1~4장_발제
엇결과 순결 / 2017-12-17 / 조회 1,376 

본문

2-1.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니체 하면 떠오르는 말 중 단연 1위가 아닐까. 그러나 아직도 쉽게 이해되지 않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말은 몇 개의 시대를 건너뛰어서야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다. 니체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직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난 일도 ‘아직’ 알려지지 않을 수 있다.

 

(1) 이미 일어난 사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소식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짜투로 축약)는10년의 내공 수련 후 사상을 선물(설파)하기 위해 하산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 하산하여 성자와 시장의 사람들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전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 뿐.

P100. 세 번째 단락 :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2) 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


- 신 = 만물의 존재의 토대이자 가치의 기준

- 신의 죽음 = 절대적 가치 기준의 붕괴를 의미

 

참고) 니체의 형이상학 비판 : 이 세계(현상계) → 가변적 / 유한한 우리의 경험세계

                                            저 세계(실재계) → 영원   / 불변한 순수한 초경험적 세계(참된 진리와 아름다움 有)

        ex) 플라톤(이데아론), 칸트(物 자체의 세계), 기독교적 세계관(이원론적 세계관)

        ★  문제의 소지 : 저 세계가 항상 이 세계에 명령, 의지를 나타냄

                                  →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근거없고 부당한 명령이 이루어 진다는 점에 주목

 

따라서 “신의 죽음”은 바로 이 세계를 평가절하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 그 영원한 진리나 초월적인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더 나아가 이런 참된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

 

(3) 시체로도 사는 신 : 없애야 하는 것은 신만이 아니고 신앙 그 자체


- 니체는 형이상학적 이론, 공리들의 근거없음을 증명해 왔음. 그럼에도 불구 이미 허약함이 입증된 형이상학적 

  건물이 왜 자꾸 세워지는가?

   → 형이상학적 토대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

        그렇다면 정말로 영원불멸하는 것은 신앙이 아닐까?  신이 있어서 신앙이 생긴 게 아니라, 

        신앙 때문에 신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 따라서 신의 죽음이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신앙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받아들여 질 수 없기 때문이다.

  ★ 신의 죽음 = 신앙의 죽음 = 신앙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죽음 = 모든 인간적 형태의 우상숭배의 종식

                      = 인간의 죽음 이후 위버멘쉬의 탄생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음.

  참고) 고병권씨가 든 우상화의 사례 : 국가, 민족, 화폐, 시장 → “권력화될 수 있는 모든 것

 

(4) 교회와 그리스도

 

- 니체가 신의 죽음이 인간에게 최고의 기쁜 소식, 복음인 이유를 설명

  ① 그리스도의 말 = 복음 : 당시 존재하던 법정도 심지어 교회도 부정했음. 

                                         현세에서의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으며, 

                                         천국을 실천을 통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재정의했음.

      → 기존의 우상과 억압의 수단들을 부정했다는 측면에서 니체의 신의 죽음과 그 내용면에서 동일하다는 것      

  ② 니체, 교회는 신의 무덤이라고 설명

 

(5) 신의 死因 : 신을 죽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유형의 방법

 

- ① 인간 스스로 추악해지는 것 :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죽음 

  ② 인간 스스로 위버멘쉬가 되는 것 : 인간 스스로 신의 필요성을 없앰으로써 죽일 수 있음.

 

- 참고) 유일신이 다신교를 살해한 방법 : “신은 유일하다 그게 바로 나다“

                                    → 다신교 신들은 웃다가 죽고 말았다.(배신자에 대하여)

           “가장 철저하게 살해하는 자는 웃는다는 것을” “오 짜라투스트라여 그대 숨어 있는자, 분노하지도 않고서 

            파괴하는 자, 그대 위험한 성자여, 그대야 말로 악당이다” (나귀제)

 

★ 진정한 신의 죽음은 즐거운 여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고병권)

     더 이상 초월적인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환하게 웃을 때, 신의 죽음이 찾아오며, 

     그 때의 죽음은 인간에겐 가장 영예로운 일이 될 것이다.

     참고) 니체, “무거워지는 것과 깊어지는 것을 구별하라” 

 

2. 너희는 너희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니체 복음의 가치를 사람들은 왜 모를까? → 인간 스스로 가치를 평가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

 

(1) 시장으로부터 멀어져라

 

- 짜투가 처음 찾은 곳이 시장이라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음.

  시장 = 화폐가 지배하는 곳 → 物神主意(화폐가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고 가치를 부여하기까지 하는 절대성을 가짐. 

                                              상품의 고유가치는 소멸되며 상품은 이제 화페의 가치를 재현하게 됨.(가치의 전도)

  따라서 시장 참여자 = 스스로 삶의 목표를 정하지도, 진정한 행복도 모르며,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김.

                                   타인의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여기는 존재 → 스스로 가치평가할 능력의 상실

 

(2) 강함과 선함

 

- 니체 철학에서 ‘강함’의 의미의 이해는 매우 중요, 이는 서열이나 권력의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

  가치창조와 관련이 있으며, 가치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그에 따라 사물과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을 의미

  P118, 아득한 옛날부터 모든 형태의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주체적인 가치 부여라는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주인이 자신들에게 

            부여해 준 가치 이외에는 어떤 가치도 자신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다.(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전형적인 

            주인의 권리였다.) (선악을 넘어서)

 

- 가치판단 양식의 차이 (가치판단 양식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그 바탕이 되는 감정) 

 

  [강함] : 좋음(자기긍지) → 나쁨(연민)

 

         P119,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성을 가리킬 때 ‘좋음’이라는 말을 썼다. 이는 자신들에 대한 긍지로부터

                   ‘좋음’의 규정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반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악의적 목적도 없으며, 

                   감각의 떨어짐 또는 소심함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들어 있었다.

 

              ‘좋음’은 직접적이고 구체적(개별성)

 

        P 121, 고대 그리스에서 ‘훌륭함’을 의미하는 아레테(arete)는 단독적으로 쓰이지 못했고, 항상 ‘누구의 아레테

                   인가?’ ‘어떤 것에 대한 아레테인가?’하는 식으로만 쓰였다. 이는 훌륭함에 대한 보편적인 용법이 불가능

                   하며, 미덕에는 항상 그 주인이 있고, 맞는 쓰임새가 따로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보편적 선을 가리는 토너먼트에는 관심이 없었다.

 

  [선함] : 악(저주 / 원한) → 선(악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선을 이끌어냄)

 

         P120, 노예들은 자신들과 대립관계에 있는 것을 우선 악으로 규정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자신들을 선으로 

                   규정하여 부른다.

 

             ‘선’은 막연하고 모호함.(보편성)

 

         P120, 귀족이 자신들로부터 ‘좋음’을 규정하다보니 그 규정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반면 노예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에서 시작하다 보니 ‘선’에 대한 규정이 막연하고, 모호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난받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뿐, 스스로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개별적인 것을 부정해서 보편적인 것을 얻는다. 그들은 개별적인 인간의 판단과는 

                   상관없는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끔찍한 전쟁들의 대부분이 선악에 대한 보편적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그에 맞서는 자신을 선의 수호자로 생각하는 가치판단에서 나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

 

(3) 선하고 의로운 자들을 조심하라.


  ① 보편적 가치의 역설 설명 : 각 민족마다 고유의 선함의 기준이 있어왔음. 민족의 수만큼 많은 선악의 목록이 

                                             존재한다면 보편적 선악 기준은 없는게 아닐까?

 

  ② 물론 그 누구도 개별적 가치판단은 필요함, 단 보편적 가치는 경계해야 함을 강조

     전체를 포괄하는 ‘선’을 이야기 하는 것은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에 대한 철저한 배제를 의미하기 때문.

     ※ 선악의 기준이 구분짓기의 기준으로 악용되고 결국 차별과 억압이 수단이 됨.

 

  ③ 보편적 가치는 복종을 강요한다.

     인간의 고통을 신이 내린 시험으로 칭하고 신에게 맡기라고 한다. 신이 가치판단 해서 축복과 재앙을 내리실 

     것이므로. 신에 대한 믿음은 곧 법에 대한 믿음으로 쉽게 변환됨.

     결국 법은 지킬 것을 명령함. → 그러나 그 법의 평가는 누가 할 것인가?

 

     ★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판단의 포기’ → 복종으로 이어지기 때문

        P125, 스피노자는 사람들의 능력을 키우고 가르쳐 주기보다는 ‘무엇을 악이라고 비난하는가만 알려주고     

                  공포를 줌으로써만 악을 피하게 하는’ 사람들을 ‘나쁜 덕의 교사들’이라고 불렀다.

 

3. 사람을 가르친다. 벗을 가르친다.

짜투가 찾는 자는 군중이 아니라 친구였다. 왜 친구인가? 거기엔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소유욕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소유가 아닌 열망을 공유하는 ‘우정’을 제시했다.

 

(1) 사랑이라 불리지만 사랑이 아닌 것


  ① 사랑 = 소유욕 → 구속되거나(복종하는 노예) 구속하거나(복종시켜 군림하는) →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포장함.

     니체는 우정은 사랑이 구속이 아닌 자유여야 함을 잘 보여준다. 우정은 노예도 폭군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

 

  ② 니체 제시한 사례, 바그너의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에서 방랑자가 순결한 여인을 만나 결혼하여 정착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으로 묘사 → 방랑자의 본성은 방랑하는 것인데 결혼으로 방랑을 멈추었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파멸한 것

     좋은 결혼은 본인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 하나를 산출하기 위해 짝을 이루려는 두 사람의 의지(창조하는 자를 

     창조하는 것)

 

  ③ 이웃에 대한 사랑 : 타인 지향적인 헌신의 정체를 꿰뚫어라.

     P132,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먼 이웃을 ‘왕따’ 시키는 것이 이웃 사랑의 위험이다.

               “나는 이웃에 등을 돌리고,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권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앞으로 오게 될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2) 제자들이여, 신도가 아니라 친구이다 :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결코 우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상을 사랑하려거든 우상을 파괴하고 친구가 되어라.

 

(3)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도 친구를 창조해야 한다.


- 우정은 서로에게 기쁨으로 주는 사랑임 → 주고 받는 것이 모두 기쁨이어야!   ex) 태양

  ※ 구별해야 할 대상 : 연민, 동정 → 그것을 받는 자를 약자로 만드므로.

 

- 짜투의 맨 마지막 장면, 자신의 구원에 연민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위버멘쉬가 된다는 것.

 

- 창조의 속성 : 상대를 새롭게 탄생시켜야하는 것이기에 가혹한 요소가 있음. 전쟁도 불사해야 하는. 고통의 감수

 

4. 삶을 사랑하라

 

- 에피쿠로스, “그대 살았으면 죽지 않았고, 죽었으면 존재하지 않거늘 죽음이 뭐 그리 두려운가. 혹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쳐다 보다가 가진것마저 망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행운의 선물임을 기억하라.

 

(1) 죽음의 설교자들


- 짜투는 ‘이세계’가 아닌 ‘저세계’ 신봉자들에게서 세계 창조의 의지보다는 세계에 대한 원한과 도피의 심리를 읽음.

  사람들에게 일시적 위안을 주면서, 근본적으로 삶의 피로를 확대시키는 이들을 ‘죽음의 설교자’라고 명명

 

- 구체적 사례 : 플라톤, 소크라테스, 기독교도 → 철학(신앙)은 죽음을 위한 준비

 

(2) 사는 것이 죄?


- [도덕의 계보학]에는 죽음의 설교자들의 작업실을 훔쳐보는 장면에서, 성직자들은 죽음의 설교자이면서도 

   삶의 고통을 치유하는 의사인 척 등장함.

   ⅰ) 네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신이 너를 시험하고 있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 네게 축복을 내리기 위함.

         → 마취제와 진정제를 투여하는 단계

   ⅱ) 삶에 대해 고민하지 말고 기계적인 활동으로 시간을 보낼 것을 처방 → 반복적 기도와 청렴 근면한 일상 강조 

   ⅲ) 공동체 생활의 권유(교회 활동, 이웃에 대한 봉사) → 병세에 따른 조그만 즐거움을 제공하는 사후 관리 요법

   ⅳ) 너 자신이 원죄가 있음을 잊지 말라. → 양심의 가책을 제공

       ※ 성직자(의사)가 돌볼 환자(신도)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음. 자기 삶을 고문하는 도구로서의 양심의 가책

 

   [도덕의 계보학] 그들은(성직자들) 의사로 행동하기 이전에 먼저 상처를 입히는 자이며, 상처를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감염시키는 자이다.     

                           cf.) Marx : 진정 큰 것을 빼앗으려는 도둑은 빼앗기 전에 먼저 준다.

 

(3) 삶에 대한 사랑


- 니체에 따르면 사랑은 친구를 만드는 것, 창조하는 것, 구속되지도 / 구속하지도 않는 것.

 

- 따라서, 삶에 대한 사랑 = 삶을 친구로 만드는 것 = 삶을 창조하는 것 = Amor Fati(운명애)

  ★ 운명애의 의미 : 운명을 거부하지도 순종하는 것도 아닌 = 창조의 고통 = 그러나 기쁨으로 수행

                               →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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