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힘과 의미작용Force and Signification - II
정수
/ 2017-12-05
/ 조회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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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힘과 의미- Part2 (29~52)
20171205 왕정수
괴물 같은 선들이 있다…..선 하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한 개의 선에 표현력을 주려면 둘째 선이 필요하다.
큰 법칙(들라크루아)
골짜기는 흔히 꿈에서 여성을 상징한다, (프로이트)
한편으로 구조는 대상 자체가 문학적 사물 자체가 된다. 구조는 언제나 읽거나 쓰기 위한 의미들을 집합시키고 테마들을 확인하며 불변수들과 상응점들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 내지는 관계에 불과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구조의 개념은 행태학적이거나 기하학적인 공간인, 형태들과 장소들의 질서인 공간에만 관련된다..
루세는 일변 형식 구조와 지향점의 통일을 구조라고 부르면서도, 실제 분석들에서는 공간적 모델들과 수학적 기능들.선들,형태들에 절대적인 특권을 부여한다,
<형식과 의미>에서 기하학적 요소나 형태학적 요소는 동역학에 의해서는 절대 수정되지 않고, 오직 기계학에 의해서만 수정된다. 그런데 언어의 영역에서, 육체의 영혼과의 관계보다 더 깊이 “영혼과 관계”를 가지는 글쓰기 영역에서, “위대함의 개념, 형상 개념, 운동 개념이란 생각처럼 그렇게 명확한 것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우리의 지각에 관련된 무엇, 상상적인 무엇을 담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루세가 지나치게 데카르트적이고, 너무나 조금 라이프니츠적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학 작품에서 언제나 하나의 선을, 동일성과 그 운동의 총체성과 그것이 지나가는 지점을 설명해 줄 선을, 그 선이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니 말이다.
우리의 담론은 철저히 형이상학적 대립들의 체계에 속한다. 이러한 소속 구조와의 결별은 어떤 조직 방식, 어떤 전술적 조직의 이용에 의해서밖에는 예고될 수 없다. 이 전술이란 형이상학적 대립의 영역 내에서, 고유의 전술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여 해체력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 해체력은 체계 전체에 그 힘을 확대시켜 체제 전반에 균열을 만들고, 제한을 가하여 체계를 붕괴시킬 것이다.
작품의 힘, 천제성의 힘, 일반적으로 창출하는 것의 힘, 이것이야말로 기하학적 은유의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문학 비평의 교유한 대상이다. G.풀레와는 다른 의미에서 루세는 때로 ‘예술에 별로 관심이 없는’듯하다. 루세는 의미와 일치되는 형태만, 형태가 먼저 의미와 연합하고 있어서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만 아름답다고 전제하는 듯하다. 아름다움이 기하학자에 의해 지지되거나 완전히 규명된다고 가정하면 미의 극치, 숭고한 것의 경우 기하학자는 가히 폭력적인 행위를 할 것이다.
힘과 가치와 지속의 전성설(前成設).목적론.환원. 이러한 것이 기하학주의와 하나를 이루고, 이러한 것이 구조를 만들고 있다. 루세의 책의 에세이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부 지배하고 있는 사실상의 구조를, 최초의 마리보에서도, ‘복식 기재’의 도식과 연계 될 수 없는 모든 것은 ‘젊은 시절의 습작 소설’로 루세는 본다.
루세의 미학은 클로델의 미학과 일치한다. ‘구조적 일률성’의 테마가 이러한 유사성들을 함께 집합시킨다. 그 미학은 하나의 형이상학을 표현한다. ‘순수한 상태의 시간’을 프루스트는 그것을 또한 ‘초시간성’ 또는 ‘영원성’이라고 부른다. 클로델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구상되어 창조된 그대로의 우주의 본질적 진실의 표면성의 이미지.표피.현상에 불과하다. 이 진실, 그것은 절대적인 동시성이다. 하나님처럼 클로델은 창조자로서, 그리고 제작자로서 “함께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시간의 형이상학과 시간의 지배된 미학이 프루스트나 클로델을 읽는 데 있어서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며, 풍부한 성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구조적 책읽기는 언제나 자체의 활동에 의해, 언제나 책의 신학적 동시성을 설정하고, 언제나 그것에 도움을 청하며, 동시성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본질을 박탈당한 듯이 여긴다. 루세는 “어쨌든 지속적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책읽기는 포괄적인 읽기가 되기 위해서, 작품의 모든 부분에 작품이 동시적으로 출석해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J.P리샤르는 지적한다. “모든 구조주의적 기술에 있어서 어려운 점은, 사실상 한꺼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하나씩 차례차례 기술해야 하는 데 있다. 루세는 결국 책읽기에서 진실인 동시적인 것에 도달하는 어려움을 말한다. J.P리샤르는 글쓰기에서 진실인 동시성을 기술하는 어려움을 말한다. 이 두 경우에 동시성은 전체적인 책읽기, 또는 전체적인 기술에 있어서 이상적인 조정자로 격상된 신화이다. 동시적인 것의 추구는 공간적인 이미지가 발휘하는 매력을 설명한다.
말라르메는 대문자의 책의 단일성을 비현실화했다. 사람들이 그 속에서 책의 단일성을 안심하고 생각한다고 믿고 있었던 카테고리들을 떨게 함으로써, 요컨대 대문자 책의 ‘자기 동일성’을 말하면서, 말라르메는 대문재 책이 동시에 ‘동일한 것이자 다른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 자신을 가지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예정된’목적론 도식에 의거하여 설명되지 않고, 그 도식의 동시성 속에서 알아볼 수 없는 모든 것을 우발적인 것이나 혹은 찌꺼기 정도의 지위로 격하시키고자 결정하는 점에서,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구조에 의해 유도된 에세이인 프루스트론과 클로델론에서조차 루세는 ‘중심 테마’, 또는 ‘작품의 전반적인 구성’에 비추어 ‘우발성 고립 현상으로 확인’할 수 밖에 없는 ‘일화며 인물’의 경우, ‘발생 변이’로 간주하기로 결정한다.
구조주의는 그것이 멘 처음 나타난 생물학적 분야와 언어학 분야에서 무엇보다도 그 고유한 수준에서 각 전체의 일관성과 보완성을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구조주의는 우선 주어진 외형에서 미발달 부분이나 결여부분을 고찰하지 못하게 한다. 텔로스나 어떤 관념상의 규범에 의거하여 정립된 정향 진화의 맹목적인 선취, 또는 신비스러운 일탈처럼 보일 수 있는 모든 부분의 고려를 금지한다. 구조주의라 함은 먼저 의미의 조직에, 자율성과 고유한 균형에, 매 순간 각 형체의 성공적인 구성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적 형식에 의해 포괄되지 않는 모든 것을 우연한 변이로 치부해 버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맹세와 현상 사이의 차이 속에서, 그리고 그 차이에 의해서 산다.
루세로부터 권유된 다시 읽기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적으로 모든 구조주의를 위협하는 바로 그것에 의해 빛이 내면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음을 인식한다. 요컨대 의미를 발견하는 행위 자체를 통해 의미를 은폐할 가능성을, 어떠한 생성과 구조를, 어떠한 힘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 그것은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의미를 잃는 것이다. 고유하고 순수한 특성 속에서의 생성과 힘의 의미, 그것은 시작과 끝의 휴식이요, 지평이든 얼굴이든 어떤 의미 자체에 의해 가려진다, 의미의 의미는 그 안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에 의해 아폴론적이다.
비평이 어느 날 문학적 글쓰기와 해명하고 교류해야 한다면, 우선 비평이 그 원칙들을 물려받을 어떠한 미학적 방법론을 지배하는 ‘철학’속에서 이 저항이 조직화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사실 철학은 철학 역사속에서 시의 개관에 대한 반성처럼 규정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구조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그 전략적 조작을 고의적으로 개시하지 않는 한 비평은 구성적 조화를, 기하학을, 시선의 특권을 “무엇보다 우선 눈에 시각 기능을 주는 눈의 흥분을 일으키는” 아폴론적 희열을 포기할 수단을, 특히 동기를 갖지 못할 것이다. 비평을 힘을, 선을 이동시키는 운동을 포용할 정도로 운동을 선들의 우발적 사고나 현현으로서가 아니라 운동을 운동으로서, 욕망으로서, 그 자체로서 포용할 정도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글쓰기로까지 가지 못할 것이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사이의 약동과 구조 사이의 갈등, 요컨대 차이는 역사 속에서 지워지지 못하니, 왜냐하면 차이란 역사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도 역시 조금 엉뚱한 의미에서 원초의 구조, 요컨대 역사의 개시요, 역사성 자체이다. 차이란 여러 말할 필요도 없이 역사에도 구조에도 속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의미 자체 내의, 의미 밖으로의, 의미 하강으로서의 출구이다.
글쓰기는 존재 속의 타자의 이 원초적 계곡의 순간이다. 추락으로서의 깊이의 순간이기도 하다, 장중함의 심급이요, 집요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