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12월 6일 들풀 후기 +2
자연
/ 2017-12-07
/ 조회 2,350
관련링크
본문
들풀(복수 - 아름다운 이야기)
[눈] 눈 내리는 적막한 겨울밤, 마음이 적막하다고 말하는 루쉰을 상상해봅니다. 愛憎이 哀樂이 없고 색깔도 소리도 없는 그런 마음이라면 평안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루쉰의 글에서 애증과 애락, 고요함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건 저 혼자만의 감상일까요? 루쉰이 고향인 강남에서 보았던 눈과 북방에서 보았던 눈이 다르듯 자신이 처한 곳과 상황에서 달리 보이는 눈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강원도가 고향인 삼월은 눈을 보면 불편하다는 생각이, 서울이 고향인 도시녀 에스텔 님은 눈 하면 더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합니다. 옹달님은 이 글이 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붕새가 회오리 타고 올라간다는 이야기와 닮았고, 고독한 눈, 회오리쳐 오르는 눈에서 고독한 자유인이 그려진다고 합니다. 어제 마침 눈이 내렸네요. 눈이 평상시와 다르게 보인다면 오버일까요...회오리쳐 오르는 눈을 볼 날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바닥에 쌓인 눈 밑에 파랗게 언 잡초가 있다는 말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복수1] 완벽한 복수란 무엇인가? 루쉰의 복수에 관한 두 편의 글을 읽으면서 했던 물음입니다. 비수를 들고 광야에 선 두 사람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행인들이 무료해서, 그 무료함이 심장에서 털구멍을 뚫고 다른 사람들 털구멍을 파고든다고 하니 섬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행인들은 무료한 나머지 메말라서 흩어져버렸는데. 비수 든 두 사람은 죽은 사람 같은 눈으로 행인들의 메마름을 감상한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복수한 걸까요? 행인들일까요? 복수를 하려고 했는데, 피가 없는 살육이라니... 복수해야 할 대상에게 어떤 행위를 하지 않고, 감상만 하고, 생명 고양의 큰 환희에 잠겨든다고 하니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응시하면서 침묵으로만 복수한 뒤의 해탈한 마음인지도 모르지요. 해탈 뒤의 마음을 제가 알 리가 없습니다.
[복수2] 복수 두 번째 글에서는 보다 오래도록 그들의 앞날을 가엾어 하지만, 그들의 현재는 증오한다고 합니다. 루쉰의 글은 어둡고 냉정합니다. 루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적의로 둘러싸여 있는 느낌입니다. 구경만 하는 대중들을 향한 말이기도 한 것 같고, 이런 세계에서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그러나 뭔가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증오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신이 아니라 사람에게 복수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영원한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것, 완벽한 복수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사람이 신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복수가 더한 복수라는 것.
[희망] [그림자의 고별]에서 “내가 암흑 속에 가라않을 때에, 세계가 온전해 진다.“고 말했던 것처럼 절망과 희망에 대한 것을 역설로 말합니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절망에 대한 깊은 체험에서 희망을 품은 루쉰 자신만의 어떤 경험이 있었을 거라 생각됩니다.”나는 몸소 이 공허 속의 어둔 밤과 육박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실체를 볼 수 없는 것과의 싸움은 얼마나 지난할 것인지, 또 실체로 붙잡을 수 없는 희망이라니, 마음이 힘드네요...분명한 것은 희망이란 절망적인 상황에서 품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연] 이 글 쓸 때 루쉰은 고향에서 나왔지만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감정이 더 남다르다고 하는데요, 루쉰이 자란 고향과 달리 북경은 당시 다른 곳에 비해 특히 투쟁적인 도시였다고 합니다. 반대로 루쉰의 고향은 따뜻하고 문화적으로도 번성해서 낭만적인 데가 있었다고 합니다. 연말연초에 지나온 해를 돌아보니 고향 생각이 절로 났을 것 같습니다. 루쉰은 뒤늦게 동생의 연놀이를 방해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동생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죠. 이 글에서 루쉰의 진짜 마음은 용서가 아니고 자신의 죄의식이었습니다. 동생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죄의식으로 갖고 있으면서 사는 것이죠. 동생이 용서를 받아주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자신에게 죄의식을 남겨두는 것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죠.. “지금, 고향의 봄이 이 타지의 하늘에서, 오래전에 가 버린 추억과 함께 가늠할 길 없는 비애를 내게 안겨 준다. 차라리 스산한 엄동 속으로 숨어 버릴까.” 베이징에서의 루쉰의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문장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글이 몽롱합니다. “나는 몽롱한 가운데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았다.”고 합니다.....그것들을 눈여겨보려는 순간 , 깜짝 놀라 눈을 떴다는군요. 무릉도원은 도원이요, 현실로 돌아와보니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 그렇지만 어둡게 가라앉은 밤에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본 것을 기억한다는. 어떤 희망을 붙잡고 있고픈 현실의 루쉰, 그가 희망하는 세계는 무릉도원과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러나 나는 평안하다. 기껍다. 나는 크게 웃고, 노래하리라.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몸소 이 공허 속의 어둔 밤에 육박(肉薄)하는 수밖에 없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와. <희망>의 세 문장을 저런 순서대로 놓으니 느낌이 확 오는 듯한..
평안해서 웃는 것도 아닌, 어이없어 웃는 것도 아닌 환희의 어떤 순간들.
그래도 여전히 공허 속을 육박해야 하는 현실을 보고 있는 듯 합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희망이나 절망도 사변적이어서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데, 거기다 허망함이라는 또다른 사변의 단어가 얹어지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무엇을 더듬더듬 어루만지고 말로 풀어내고, 그것을 서로 알아듣고 하는 과정이
절대 쉽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세미나가 끝난 뒤에는 가끔 허망하기도 합니다.
그 많은 말들이 결국은 다른 사람을 향한 말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을 향한 말들이었구나, 하는 결론으로 가 닿아서.
그런데 이렇게 자연님의 후기처럼 세미나 안에서 흐르던 말들을 자신의 의견과 섞어 잘 풀어낸 후기를 읽으면
또 소통이란 것이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존재하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소통에 대한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과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러니 나는 그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공허 속 어둔 밤으로 육박해 가는 수밖에요.
나에게 깃든 절망과 대결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을 발견해낸 세미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의 후기, 감사합니다.